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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 작성자 : 김병옥
- 작성일 : 2011.03.30
- 조회수 : 2000
우연이였다. |
책읽기를 소흘리 한지 꽤 오래다 나이 먹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그래서 일까 허구헌날 노는데도 책 볼 시간은 없었다 |
컴퓨터 영향도 있겠지만 요즘 풍조가 읽고 쓰는 것보다 보고 듣는, 쉽고 자극적인 것만 찾기 때문에 나도 여기에 길들어 |
진 것인지 기껏해야 화장실 갈때나 어쩌다 대중교통 이용시 MP3를 들으며 읽는 게 고작이다 |
이런 나에게 작년 말쯤 막내가 책을 선물했다 |
막내가 준 것이라 시간을 내어 읽었다. 하버드대 샌델교수의 강의내용을 책으로 발간한 것이였다 \"정의란 무엇인가?\" |
우연이였다. |
그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 EBS에서 샌델교수의 강의를 월.화요일 밤에 방영했다. 처음에는 밤 12시에 하다 시청자 요청으로 11시로 바꾸었고 토요일밤에 재방까지 하였다 |
방영이 끝나 몇 프로는 다시 보기를 하다 귀찮아 DVD를 구입했다 6개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까지 이 강의가 재방되었다 시간대도 좋은 9시 50분에 |
강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연상되었고 \"무지의 자각\"을 통해 편견된 원칙이 무너지는 반전과 반전으로 고착된 사고를 디파인(de·fine)해 가는 강의내용에 눈을 뗄 수 없었다 |
서양 철학은 인간조차도 신의 의지인 텔로스를 구현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현제 서양철학은 그렇지 않으나 기독교는 이를 버리지 못한다) 고전적 인간가치에서 부터 |
현대의 자유주의까지 가치관이 송두리채 흔들리는 것에서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꼈다 |
내가 서양 철학서 읽기를 그만 둔 것은 30대 말 쯤이였던 같다 그 시절은 문화던 제도던 우리 것은 무조건 버려야 하고 서양 것을 존중하는 사회적 풍조가 있었다 |
동양 고전은 사주 관상쟁이나 보는 고리타분한 것이라 여겼다 |
서양문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길들어진 나에게 동양고전을 읽게 동기를 제공한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다 이 책은 어럽기도 지독히 어려웠고 |
추상화되어 버린 서양의 본질론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
현대 과학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물질의 근본으로 부터 거시적 세계에서는 우주 탄생의 비밀까지 밝혀냈고 양자론에서 우주론의 통합까지 다가가 서양철학은 |
과학과 수학에 그 자리를 내 주고 화석화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미술이 사진기술에 밀려 추상화되고 개념화되어 버린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
그래서 어렵기만 하고 속 시원한 답을 제시 못하는 칸트를 팽개치고 동양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동양학 번역본도 귀했고 한문 실력도 |
형편없었지만 일단 처음부터 사서 삼경(홍신문화사)전집을 사서 무턱대고 읽어 갔다 자꾸 읽다보니 차츰 동양고전의 심오한 맛이 느껴졌다 서양철학이 논리적인데 비해 |
동양 철학은 현실적이고 사람사는 생활철학이라 이해도 쉬웠다 이런 현실적 합리주의는 겉만 서양옷으로 갈아 입은 나를 쉽게 발가숭이로 만들었던 것 같다 |
샌델강의에서 보듯 서양철학은 윤리와 정의마저도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때문에 끝없는 심연의 늪에 빠져 지금까지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체 방황하고 있지만 |
동양학은 심오한 논리보다 삶의 지침서적 의미가 강해 스스로 답을 만들 수 있게 한다 물론 노장사상의 경우 서양의 논리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으나 초자연적으로 논리를 |
확장하지는 않았다 |
서양이 왜(Why)와 무엇(What)에 대한 질문이라면 동양은 어떻게(Haw)에 대한 믈음이다 즉 |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라는 good&bad 이다 샌델교수의 EBS 특강프로는 이런 동양적 의미가 깊이 스며 있다고 느꼈다 |
특히 책에서는 동양적 생활철학 즉 공자 사상이 짙게 묻어 있는 결론을 제시한다 |
[정의와 좋은 삶] 은 공리주의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나 자유주의자의 [원초적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 법한 [가언적] 선택, [무지의 장막]뒤에서 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
정의는 결국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으로 도덕정치(공자)을 표방한 동양적 합리주의와 인간존엄성(人乃天)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서양의 절대적 정의와 윤리에 대한 사고는 목적론적 진리를 요구하지만 동양은 [삶의 지혜로서의 정의나 윤리]를 보기 때문에 |
자연처럼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을 뿐 절대적 정의나 도덕을 주장하지 않았다 공맹사상을 [유교]라 하지 않고 [유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를 불변의 교리처럼 |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 스스로 깨닫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정의는 사회의 다양성만큼이나 다른 얼굴로 나타나므로 절대적 정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우리가 신봉했던 정의가 반전에 따라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
보면서 얼마나 편협한 사고를 옳다고 믿으며 살고 있었는지 깨닫게 한다 |
지금도 기독교는 고대 서양적 정의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모적 논쟁을 하면서 동양사상을 네포이즘, 즉 |
편협한 가족주의로 폄하하고 전 인류애적 인도주의와 아가페적 사랑을 주장하지만 이런 신앙인들이 오히려 무지렁이 필부보다 더 가족주의적이고 가식적으로 살고 있음은 |
따로 예를 들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정의에 대하여서도 한번쯤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지역간 계층간 갈등에서의 정의, 황금만능주의의 정의, 법과 전통적 윤리의 정의, 친일과 반북의 정의, 권력자들의 정의 등 수없이 많은 과제상의 정의가 |
정립되지 않은 채 선동주의에 편승하고 있는 작금에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진정 버려서는 안될 것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기회였고 |
돈이면 정의조차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오랫만에 만난 유익한 강의였다 |
얼마남지 않은 생의 끈에 집착하지 않고 잠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픈 분에게 감히 권하고 싶어 두서없이 적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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