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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

무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지

근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운동은 그 목적이나 결과에 있어 당시 한반도 주변 동북아시아의 힘겨루기에 그 파급이 엄청나게 커서 막중하게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왜냐하면 양반위주의 계급사회요, 봉건사회이던 그 당시에 지배를 받아오던 일반 민중이 거꾸로 역사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되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여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그 명칭도 동학란,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이라 하여 세기적인 연구과제로 등장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주역이 동학접주가 선봉이 되어 농민들이 일으킨 병란적 성격을 띤 피할 수 없었던 역사발전의 민중 혁명이었다. 그동안 일제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지 못한 고부농민의 단순한 민란이라고 얼버무렸던 친일사학자들의 역사왜곡이 백일하에 들어난 것은 1980년대에 신용하교수가 전봉준장군의 재판기록을 근거로 「무장 봉기설」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계기가 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의 초점이 되었었다.

1894년 3월 20일 창의문 포고를 통해 일어난 무장봉기는 전국적인 근대 민중운동의 출발지로서 고부민란에서 비롯된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혁명적 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킨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고, 고창지역은 환경적 측면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불가피 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고창사람들의 의향기질과 당시 손화중을 중심으로 한 동학조직의 절대적인 강세 등에서 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무장봉기의 요인들이었다. 북으로는 부안, 고부, 정읍 남으로는 장성, 영광, 법성 등과 접하는 지리적인 요지가 되어 동학농민군을 집결시키고 훈련정비하면서 정보교환을 통한 상호연대가 용이한 거점으로서 전력강화를 현실화 할 수 있는 구수내의 갱변땅과 천혜의 조망이 트인 여시뫼봉이 있어 혁명거사의 최적지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일은「무장기포」라고 쓰이는 말투이다. 천도교측에 의하면 동학의 교구가 되는 포가 일어나는 것을「기포」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 당시 무장봉기는 동학의 세가 일어난 것보다는 주동자급은 동학도들이었으나 고창지역에서 일어난 4천군은 흥덕, 고창, 무장 지역의 분기에 넘쳐 일어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축소 지향된 동학의 기포보다는 농민들의 봉기로 보아야 마땅함으로「무장봉기」로 불러야 당연할 줄 믿는다.

동학농민혁명은 왜 무장에서 봉기하였는가?

1893년 11월 고부농민들의 보세감면 원성으로 익산군수로 밀려났던 조병갑은 든든한 비호세력의 성공한 유임공작으로 1894년 1월 9일 고부군수로 다시 왔다가 이튿날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걸군으로 위장해 고부관아를 습격 무기고를 부수고 옥사를 헐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부당하게 거둔 세미를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질 나쁜 아전들을 처벌한 후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만신보」를 헐어냈다.

군수 조병갑은 이미 달아났고 격분한 농민들은 1월 17일 말목장터로 진을 옮겼다가 25일에 백산성으로 옮겨갔다. 조정에서는 2월 15일에야 보고를 받고 조병갑을 잡아다 치죄하고 박원명을 새 고부군수로 임명하며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내 사태를 수습케 하였다.

박원명은 비정을 시정키로 농민들과 약속하고 군중들을 해산시켰으나 이용태는 역졸 8백명을 거느리고 뒤늦게 당도하여 민란을 동학도들의 소행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가옥을 태우며 가족들을 살상하고 노략질까지 일삼는 횡포를 서슴치 않아 농민들의 원한은 극에 달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진 전봉준, 김개남 등은 고부에서의 봉기를 접어두고 무장으로 내려와 손화중 대접주와의 연계 동참할 뜻을 받아내 수년전부터 공음면 굴챙이 고랑에서 비밀리에 양성해놓은 수천의 동학 농민군을 대상으로 하는 동원집결령을 내렸다. 이에 3월 16일부터 밤낮으로 모이기 시작한 농민군은 4천군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이웃 법성면 용현리의 대밭에서 수천개의 죽창을 만들고 총과 괭이, 낫, 가래 등으로 무장을 갖춘 후 3월 21일 동학농민혁명의 3걸인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연명으로 폐정일색이 된 조정을 상대로 선전포고인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세운 창의포고문을 고부가 아닌 무장 당뫼골에서 정식으로 만천하에 선포하고 이튿날 새벽 진격하여 무장고을을 거쳐 정오에는 전봉준의 태생지 고창 당촌에 도착, 점심을 시켜먹은 후 부안면 운양 사창을 지나 흥덕 사포에서 숙영을 하고 23일 정오에 줄포장에 도착 신(辛)부잣집에서 베푼 점심을 마친 후 저녁때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 대오를 정비한 전봉준은 인근 동학도들에게 파발을 보내 25일 백산성에 총집결하였다.

백산성에서 호남의병창의대장소를 설치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 손화중 '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 ' 오시영을 총참모, 최경선을 영솔장, 송희옥 ' 정백현을 비서, 김흥섭을 경호원으로 삼아 농민군의 규율과 체계를 제대로 갖추어 농민궐기를 선동하고 거사의 대의를 밝힘으로써 이제 동학농민군은 고부고을의 단순한 민란이 아니라 집정에 도전하는 병란으로서의 성격과 규모를 띄게 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의미로 고창사람인 전봉준, 오시영, 정백현, 김흥섭 등이 핵심적으로 가담한 실증을 보면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왜곡이 얼마나 우심했는가를 웅변해주고 있다.

동학농민은 어떻게 양성되었는가!

갑오년 농민혁명사에 보면 1894. 1. 10 조병갑 고부군수를 몰아내고자 고부관아를 습격한 농민들이 1월 17일 말목장터로 진을 옮겼다가 다시 백산성으로 이동한 후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도들이 일으킨 민란으로 간주하여 닥치는대로 살상과 횡포가 극심해지자 전봉준은 김개남 등과 동학의 남접도소가 있는 무장으로 또다시 옮겨 이곳 손화중 대접주의 동참거병을 비로소 확약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고부가 아닌 무장에서 봉기할 뜻을 굳히고 수년전부터 공음면(동음치면)굴챙이 고랑에서 비밀리에 양성해놓은 수많은 농민군을 이곳 당산골(공음면 구수내)에 3월 16일부터 총동원하여 무장을 갖춘 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을 위해 창의한 포고문을 만천하에 발표한 제1차봉기지가 되었는데 과연 이때 모인 4천 농민군을 어떻게 양성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향토사 정리에 매우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60년대 초에 전봉준장군의 경호원이었던 김흥섭옹에게 직접 듣고 현장 확인한 바에 의하면 김흥섭은 무장면 신촌리 태생으로 손화중 대접주 예하의 김성칠 동학 접주의 아들로 손화중이 역적모의의 대업완수를 위해 전장군의 신변경호원으로 직접 천거된 사람이다.

김흥섭의 증언과 현지 고로들의 전언에 의하면 전장군이 손화중 접주에게 수년전 부패척결로 보국안민의 혁명을 모의할 때마다 손화중은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장차 큰 도모를 위해 농민군 양성을 우선 제의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손접주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거점으로 공음면 굴정동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패기가 짙은 공민왕조말에 천안전씨 문효공파 후손들이 이곳 공음면의 신대리와 용수리 일대에 낙향하여 약 6백여 년 동안 2백여 세대가 집성 세거해왔는데 특히 굴정동과 양성촌에는 자작일촌의 세를 누리고 있어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서쪽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굴챙이 고랑(구적산골짜기)에서 농한기를 이용 원근의 농민들을 집결시켜 솔폭사이로 뛰고 나르고 넘나들고 덮치고 뒹굴고 몸을 숨기는 동작에서부터 감추고 나르고 총칼 쓰는 법까지 연일 고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굴점동, 신대, 후동, 양성 등의 인근마을에 흩어져 자고 날이 새면 새벽부터 집중훈련에 몰두하였다.

굴정동 일가들은 훈련기간이 되면 이른 아침에 전식구들이 나서서 기름소금에 주먹밥을 지어 바작지게에 국물과 숭늉을 얹어서 굴챙이 고랑까지 두마장 거리를 지고가면 거의 술참때에 당도되어 아침겸 점심겸 어정쩡한 식사를 때우게 되고 운이 좋은 날이면 오후 술참거리가 날라 올 때도 있다는 것이다. 햇살이 어두워지면 각기 숙소에 돌아와 조금은 푸짐한 저녁을 먹곤 했는데 기나긴 훈련기간을 맞추어 내려면 굴정동 일가들은 여기에 매달려 다른 가정 사는 돌볼 엄두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장군이 밤에 굴정동에 이를 때면 어디서 어떻게 맞춰오는지는 모르겠으나 곡식을 실은 달구지가 꼭 한두대씩 뒤따라 들어오는데 그 출처는 아무도 모르고 물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아 아예 아무도 묻지를 아니한다는 것이다. 가히 역적모의라더니 전장군 일행은 숫채 야행길로만 드나들어 훈련받는 농민군들은 전장군의 거동에 대해서는 깜깜하게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은 잘다져진 동지의식이 넘쳐있어 오직 명령에 따를 뿐 다른 군소리하나 없이 조용하게 일사불란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때 전장군과 손화중의 동참거병의 확약이 이루어지지 않고 계획된 농민군 양성이 없었다면 무장땅의 제1차 봉기를 통한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은 자칫 고부민란의 불씨로만 머물고만 아슬아슬한 역사적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학농민봉기 때 희생된 고창사람들

갑오년의 동학농민봉기는 단순히 조세를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백성을 못살게 들볶았던 조병갑 고부군수의 학정만을 의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근본원인은 한국전통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19세기 후반기 동양의 국제정세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한국사회는 과거 몇 백 년 동안을 지배해 온 유교적인 양반지배 체제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이 되었던 조선왕조의 말기적 현상을 들어낸 시기였던 것이며, 여기에 편승된 양반들의 횡포와 관리들의 부정부패 정부의 무능 등으로 인해 내부의 모순이 극에 달하였고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이었던 이른바 강화도 조약 이래로 빚어진 새로운 국제 사태의 추이 등이 또 하나의 배경을 조성함으로써 계속된 민족수난사의 발단이 되기도 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 농민봉기자 중에는 이와 같은 말세의식의 탈피를 위해「정감록」같은 비결을 믿는 자들도 부지기수여서「세상이 어찌되기를 바라는 민중의식」과 「암흑사회가 거치는 밝은 세상의 희구의식」등이 때마침 대두된 동학의 궁을지도(弓乙之道)에 부합되고 있어 불평이 가득한 전'현직의 문무 관리들과 지방관리와 진사'무과 급제자'승려'보부상의 반수들까지도 동학 농민군과 결탁 자들이 우후죽순 하여 정변을 희구하는 불만감이 가득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세상이 한번 뒤집히길 바라는 의식의 팽배 속에서 도하선이 되고만 고부민란은 그 테두리를 벗어나 마침내 1894. 3. 20. 고창 무장 땅에서 집권층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써 광범위한 병란으로 확산되었고 창의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고부민란 이외에도 은덕, 고창, 부안, 금구, 태인 등 호남각처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었는데 과연 동학 농민봉기 때 우리 고창지역의 가담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볼 때 동학농민혁명군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시행되고 있는 이 마당에 오는 9월 5일 유족등록신청마감을 앞두고 군민들의 의구심 해소를 위해 그 역사 자료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1894년 정월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3월 20일 무장땅 구수 내에서 창의포고를 한 제1차 봉기 때 손화중 포의 고창 두령 오하영, 오시영, 임천서, 임형노 등의 영솔 하에 1,500명 무장 두령 송경한, 강경중 등의 영솔 하에 1,300명 흥덕 두령 고영숙의 영솔 하에 700명 등 도합 3,500명이 가담하였고, 3월 하순 백산봉기의 8천군이 집결하였을 때에도 고창지역의 참여자는 그대로 이어졌었다.

4월 6일 밤 황토현 전적을 승리로 이끌고 이튿날 정읍을 거쳐 4월 8일 오전에 흥덕을 거쳐 고창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8,000군의 동학농민군은 1,000명이 가세 9,000군으로 늘어났고 무장에서 3일을 유진한 후 4월 12일 영광으로 진군하던 농민군은 무장농민 태반이 뒤를 따라가 영광에서 새로운 편제를 마쳤다고 하니 그 수가 얼마이겠는가! 그 후 함평을 거쳐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장태작전으로 관군을 대파하고 정읍, 태인, 원평, 금구를 거쳐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가 완산 7봉의 용머리 고개를 중심으로 한 산마루 전투에서 우리 고창 출신 농민군들은 엄청난 수가 희생을 당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5월 7일 홍계훈이 이끈 경군은 전주화약을 내걸고 강화를 이룬 후 상경하였고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립 민간서정을 수행하게 하여 폐정개혁에 착수하였다. 9월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개화정권과 연계하여 탐욕을 일삼게 되자 동학농민군은 9월 18일 재봉기를 단행하였다. 삼례 역에 대도소를 차린 전봉준장군은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농민군의 동원령을 내렸다. 9월 2차 봉기 때 전라도 전역에서 동원된 인원은 11만 5천군이었는데 이때 고창의 임천서, 임형노 수령 등이 인솔한 5천군과 무장의 송경찬, 송문수, 강경중 수령 등이 인솔한 7천군 흥덕의 고영숙 수령이 인솔한 2천군 도합 14,000군 그리고 고창의 오하영, 오시영 수령 등이 영광에서 인솔한 8,000군이 더해졌다.

이와같이 1,2차의 동학농민봉기에 가담한 고창지역 농민군의 숫자는 약 19,500명을 헤아리게 되어 그 절반만 잡아도 약1만 명에 가까운 농민군들의 생사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시신도 거두지 못한 채 지금까지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그 후손인 우리들의 가슴이 한없이 미어지는 것만 같다. 하루속히 1차 봉기지인 공음면 구수내골에 이들 농민군들의 영령을 위로해 드리고 군민들의 정성을 모아 제사라도 모실 수 있는 사당이라도 꼭 세워져야 하겠다.

무장포고문

茂長縣布告民間 (무장현포고민간)

  • 人之於世最貴者以其人倫也君臣父子人倫之大者 인지어세최귀자이기인륜야군신부자인륜지대자
  • 君仁臣直父慈子孝然後乃成家國能逮無彊之 군인신직부자자효연후내성가국능체무강지
  • 福今我 聖上仁孝慈愛神明聖睿賢良正直之臣 복금아성상인효자애신명성예현량정직지신
  • 翼贊佐明則堯舜之化文景之治可指日而希矣 익찬좌명칙요순지화문경지치가지일이희의
  • 今之爲臣不思報國徒竊祿位掩蔽?明阿意諂容 금지위신불사보국도절록위엄폐총명아의첨용
  • 忠諫之士謂之妖言正直之人謂之匪徒內無輔國之才外 충간지사위지요언정직지인위지비도내무보국지재외
  • 多瘧民之官人民之心日益渝變入無樂生之業出無 다학민지관인민지심일익투변입무악생지업출무
  • 保軀之策虐政日肆怨聲相續君臣之義父子之倫上 보구지책학정일사원성상속군신지의부자지륜상
  • 下之分遂壞而無遺矣 管子曰四維不張國乃滅亡方 하지분수괴이무유의 관자왈사유불장국내멸망방
  • 今之勢有甚於古者矣自公卿以下至方伯守令不念國家 금지세유심어고자의자공경이하지방백수령불념국가
  • 之危殆徒竊肥己潤家之計銓選之門視作生貨之路應 지위태도절비기윤가지계전선지문시작생화지로응
  • 試之場擧成交易之市許多貨賂不納王庫反充私藏 시지장거성교역지시허다화뢰불납왕고반충사장
  • 國有積累之債不念圖報驕侈淫昵無所畏忌八路 국유적루지채불념도보교치음닐무소외기팔로
  • 魚肉萬民塗炭守宰之貪虐良有以也奈之何民不 어육만민도탄수재지탐학량유이야내지하민불
  • 窮且困也民爲國本本削則國殘不念輔國安民之方策 궁차곤야민위국본본삭칙국잔불념보국안민지방책
  • 外設鄕第惟謀獨全之方徒竊祿位豈可理哉吾徒 외설향제유모독전지방도절록위기가리재오도
  • 雖草野遺民食君土服君衣不可坐視國家之危亡八 수초야유민식군토복군의불가좌시국가지위망팔
  • 路同心億兆詢議今擧義旗以輔國安民爲死生之誓今日之光景 로동심억조순의금거의기이보국안민위사생지서금일지광경
  • 雖屬驚駭切勿恐動各安其業共祝昇平日月咸 수속경해절물공동각안기업공축승평일월함
  • 休聖化千萬幸甚 휴성화천만행심

무장포고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과 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시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륭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을 날을 꼽아 기다려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런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린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이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 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예전보다 더욱 심하다.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이하, 아래로는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거의 자기 몸을 살찌우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을 몰두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문을 재물 모으는 길로 만들고 과거보는 장소를 사고 파는 장터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허다한 재물이나 뇌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운 창고를 채운다. 나라에는 부채가 쌓여 있는데도 갚으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탕과 안일로 나날을 지새워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는 어육이 되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실로 수령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으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임금의 토지를 갈아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위 내용은 고창군에서 의뢰한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 포고문 원문과 번역문 요청 의뢰에 따라 재)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동학농민혁명연구소에서 정리,감수한 내용결과 이 내용을 공용문으로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에 활용하는 포고문입니다.

[원문]
* 감 수 : 이이화
『梧下記聞』과 『隨錄』 비교하여 내용 正誤 절충

[번역문]
* 포고문 : 무장에서 발표한 최초의 선전포고문
* 번 역 : 이이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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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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