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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남원

교룡산성(농민군 주둔지)

교룡산성

전북 남원시 산곡동 16-1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고지도자 중 한 사람인 김개남이 농민군을 이끌고 주둔하였던 곳이다. 남원성에서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던 김개남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 사이에 관민상화가 이루어진 직후인 7월 15일에 전봉준과 함께 남원에 모여 이른바 ‘남원대회’를 개최한 후 모였던 농민군을 각지로 돌려보낸 후 임실 상여암으로 들어갔다. 그 후 8월 25일 남원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김개남이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 전라좌도를 비롯한 여러 고을의 농민군을 불러 모아 남원으로 들어갔으며, 임실에서 남원까지 80리를 연이은 농민군 숫자가 무렵 7만 명에 이르렀다. 남원읍내는 농민군들로 가득 찾으며 이들은 부중과 교룡산성에 두 곳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김개남은 남원관아를 차지하고 전라좌도 도회소를 설치한 후 군제를 오영으로 편제하여 재기포를 준비하였다.

은적암(隱迹庵)터

은적암 터

남원시 산곡동 선국사 뒤편
은적암은 남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에 딸려있던 작은 암자이다. 이 암자의 위치는 선국사 뒤편에 자생하고 있는 대나무 숲을 지나 오른쪽으로 산길을 따라 7부 능선까지 오르면 제법 넓은 개활지가 보이는데, 현재에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최제우는 1861년 11월부터 1862년 3월까지 이곳에 숨어 지내며 동학의 주요 경전 중의 하나인 『논학문』과 가사로 된 『도수사』,『권학가』 등을 저술하였다.

남원관아터(남원집강소)

구 남원군청 전경

남원시 하정동 구)남원군청자리
김개남은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과 함께하다 태인에서 갈라졌다. 그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순창,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낙안, 순천, 곡성을 거쳐 6월 25일 남원에 들어왔다. 남원부사 윤병관이 남원성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남원은 동학농민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7월 6일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 아래, 전주에서 회합하였다.
김학진은 군현단위의 집강소 활동을 공인하였고,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을 전봉준에게 내주었다. 그는 전라도 각 고을에 글을 내려 보내 농민군 집강소 활동을 적극 도와주라는 지시도 내렸다. 본격적인 집강소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남원대회는 1894년 7월 15일 거행되었다.
이 대회는 전봉준 세력과 김개남 세력이 힘을 합하여,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경복궁침탈, 청일전쟁 발발 등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대내적으로는 폐정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각 지역의 집강소가 지역적, 개별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통일성이 부족했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었다.
김개남의 주도 아래 있던 남원집강소는 강경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천민부대를 운영하여 신분타파에 노력하였으며, 남원의 부호(富豪)를 징치하는 등 사회개혁에 진력하였다.

방아치 전투지

방아치 전투지

남원시 산동면 부절리 고남산 방아치
남원 동학농민군과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는 남원 산동면 부절리에서 운봉면 장교리로 이어지는 고남산의 방아치에서, 1894년 9월 17일 한밤중에 발생하였다. 이 무렵은 김개남이 남원에 재입성한 뒤, 인근에서 각종 군수물자를 징발하는 등 본격적인 2차 농민봉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었으며, 아울러 농민군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시기이었다.
박봉양은 동학농민군의 침입소식을 접하고, 운봉의 민보군 100여명, 함양의 지원병과 수성군까지 함께하여 수비에 나섰다. 민보군은 방아치 남쪽 장교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특히 장교산성의 성돌을 운반하여 산 아래로 굴려내려 보내며 동학농민군을 압박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영향권을 운봉 쪽으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었다.

관음치 전투지

관음치 전투지

남원시 산동면 부절리 고남산 관음치
김개남이 2차 농민봉기 이후 10월 14일 전주를 향해 이동하자, 남원에는 10월 25일 임실, 장수, 담양 등지의 동학농민군이 남원으로 집결하기 전까지 힘의 공백 상태에 있었다. 남원에 재집결한 동학농민군은 경상도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운봉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장수를 점령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한 뒤, 11월 13일 산동면 부절리로 이동하였다.
11월 14일 관음치를 사이에 두고, 남원 동학농민군과 운봉의 민보군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14일 새벽부터 시작되어 15일 오전까지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2천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함으로써, 남원에서의 동학농민군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남원성 전투

남원성

번암의 원촌전투에서 승리한 박봉양의 4천여 민보군은 11월 28일 남원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남원성의 동, 서, 북문에 병사를 매복시킨 뒤, 남문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동학농민군 8백여 명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수성(守城)에 실패하고, 북문을 통해 도주하였다.
이처럼 남원 동학농민군 세력은 남원성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사실상 해산되어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농민군은 민보군의 소탕전을 피해 숨어 지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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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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