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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동학농민군 전주 입성비

동학농민군 전주 입성비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무장(지금의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정읍 황토현과 장성 황룡강에서 전라감영군과 경군을 차례로 격파하고 장성→정읍→태인→원평→독배재→삼천동→효자동→용머리고개를 거쳐 1894년 4월 27일(음력) 조선 건국자의 본향이자 호남의 수부였던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무혈입성이었다.
농민군 전주성 점령·완산전투와 관련된 유일한 기념물이라 할 수 있는 전주입성 기념비가 완산칠봉 완산공원 내에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기념비는 1991년 8월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시민적 공감대 없이 세워져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기념비의 글은 전영래와 조병희가 지었으며 김윤길이 썼다. 동학농민군 전주성과 관련된 유일한 기념물인 이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완산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 스스로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전주입성 기념비 앞에 《동학전적지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돌비가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완산칠봉

완산칠봉

동학농민혁명 당시 4월 27일(음력)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이 5월 8일(음력)전주성에서 철수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 관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완산칠봉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격전지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농민군이 이 완산전투에서 희생되었으나, 지금까지도 농민군과 관군의 구체적인 전투양상은 밝혀지지 못한 상황이다. 앞으로 좀 더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상황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완산칠봉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중요한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용머리고개

용머리고개 도로

1894년 4월 26일(음력) 밤 삼천에서 하룻밤을 숙영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밖 서문과 남문에 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다음날 정오 무렵 용머리 고개 정산에 진을 친후 대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며 전주성으로 돌진하였다. 이미 전라감사 김문현은 성을 비우고 도망쳐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현재 용머리고개 주변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조차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전주성 서문지

전주성 서문지 비석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가장 먼저 진격해 들어온 곳이 서문이었다. 1907년(순종 원년)도시계획에 따라 신작로를 내면서 풍남문을 제외한 성곽과 성문이 모두 철거되었다.
서문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최초로 공략해 간 곳이 바로 서문이었으며,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해 있는 동안 농민군 외곽을 포위해 있던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도 바로 이 서문이었다.

전주객사(보물 제583호)

전주객사

전주객사는 풍남문과 마찬가지로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화재이다. 1975년 3월 31일 보물 제583호로 지정되었다.
중심건물 전면에는 ‘풍패지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풍패는 한나라 고조의 고향 지명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조선왕조를 개창한 전주 이씨의 본향이 전주이기 때문에 전주를 ‘풍패지향’이라고 불렀다.
객사가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련 사실이 있는지는 사료들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선화당에 동학농민군 전라좌우도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만큼 집강소시기에 이곳에도 농민군들이 수시로 드나들거나 행사가 치러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라감영 터

전라감영 터

전라감영은 전라도를 총 관할하는 행정기구로서 전라감사가 그 책임자였다. 1894년 당시에는 전라감영에서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 제주도까지 관할하였다. 이러한 전라감영을 동학농민군들이 점령하고 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에 농민군의 깃발을 꽂았던 것이다. 전라감영이 있던 장소는 2005년 6월까지 전라북도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화당은 전라감사 김학진의 집무실로 전라도 행정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봉준장군은 김학진과의 타협이후 이곳 선화당에 집무하면서 김학진과 함께 전라도 일대의 행정을 장악했다. 집강소를 역사상 최초의 민중권력기관이라고 본다면 선화당은 농민군의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산인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장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화당은 동학농민군의 집강소 통치와 관련하여 가장 상징적인 현장이다.

풍남문(보물 제 308호)

풍남문

풍남문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서문과 함께 진입했던 곳이다. 또한 성을 함락시킨 후 건너편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대포 등을 쏘며 공격하는 경군을 맞아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풍남문은 현재 보물 제 308 호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풍남문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실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곳을 통해 동학농민군들은 유혈충돌 없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1894년 당시 농민군이 이룬 최대 전승지로서의 전주가 갖는 의미와 입성이후 벌어지는 완산전투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로, 동학농민혁명을 통하여 전주가 갖는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유적지이다.

경기전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태종14년(1414)에 건립되었다. 1894년 4월 27일(음력)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문현, 전주판관 민영승 등은 경기전 이태조 영정과 조경묘(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의 위판을 봉안한 묘) 위패를 받들고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관군이 전주성 밖에 주둔하는 상황에서 관군이 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해 발사한 포가 경기전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문제와 관련하여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경기전 훼손의 책임을 두고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의지와 봉건적 규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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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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