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고창 동학농민혁명의 가치 재발견

고창에서 동학농민혁명의 태몽을 꾸다

선운사 마애불

1890년대에 들어와 동학은 전라도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비롯한 대다수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이 무렵에 동학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이들은 1892년에서 1893년에 걸쳐 동학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사회 변혁을 위해 동학 조직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농민들의 간절한 꿈과 바램이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배꼽에서 나타났다.

미륵신앙은 미륵이 출현하여 현실의 모순과 괴로움을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구현하리라는 구원론적 신앙으로서, 특히 억압받고 있는 하층민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이 마애불이 조성된 후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불상의 배 부분에 표시된 사각형의 복장(腹藏)에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비기(秘記)가 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1820년에 『춘산채지가(春山採芝歌)』라는 예언서를 쓴 이서구(李書九)가 1787년 전라도 감찰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부임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미륵불이 있는 곳에서 서기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비기를 열어보고 싶은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복장 속에 있는 한 권의 책을 꺼내고 말았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갑자기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내려치는 바람에 부랴부랴 다시 복장에 넣고 봉하였는데, 비기의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억지로 열다(全羅監司 李書九 開坼)”라는 문구만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비기를 함부로 꺼내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숱한 전설만을 남긴 채 세월이 흘렀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나 동학교조신원운동이 무르익던 무렵, “미륵부처님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는데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말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이에 1892년(고종 29) 8월 어느 날, 동학 접주인 손화중의 접중(接中)에서, 민중을 구원할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륵의 비기가 반드시 필요하며 지금이 바로 비기를 열어볼 때임을 결의하였다. 이에 동학도 300여 명이 도솔암으로 올라가서, 청죽 수백 개와 새끼줄 수천 다발로 임시가교를 만들어 암벽에 올라간 뒤 비기를 꺼내었다. 실제 강경중, 오지영, 고영숙 등이 주목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그후 미륵의 비기에는 “이조 500년 후에 미륵석불의 복장을 여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 비기가 세상에 나오면 나라가 망할 것이요, 그러한 후에 다시 새롭게 흥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동학도가 천지개벽의 비결을 입수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무장ㆍ고창ㆍ영광ㆍ흥덕ㆍ고부ㆍ정읍ㆍ태인ㆍ전주 등 전북의 동쪽지역 일대에서 동학도의 수가 수만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미륵신앙과 동학이라는 사상적ㆍ실천적 물결의 합류는,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희구해온 혁명의 불씨에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던 것이다. 실제로 동학도들이 비기를 꺼내었는지 또는 그 내용이 어떠 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미륵불의 힘을 통해 모순에 찬 현실을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이루고자 한 당시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과 꿈은 2년 뒤 현실로 나타났다.

고창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하다

전봉준 생가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한 산모 역할을 한 것은 고창군 죽림리에서 1855년 12월 3일 태어난 전봉준이었다.

전봉준(1855∼1895)은 고창 당촌마을에서 13살 무렵까지 유소년 시절을 보낸 뒤 전주,원평,태인 등지를 거쳐 서른 살을 갓 넘긴 1886년 이전에 고부 조소마을에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약방을 열고 풍수도 보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동학에 들어간 시기는 38세이던 1892년경으로, 그 이유는 “수심(修心)하여 충효를 근본으로 삼아 보국안민”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종교적차원이 아닌, 사회 개혁의일환으로 동학에 들어간 것이다.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도들의 집회가 열렸을 때 전라감사에게 올리는 소장을 직접 작성하였으며, 다음해 3월 금구 원평에서 열린 동학집회를 주도하였다.
그 무렵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에 맞서, 1893년 11월과 12월에 걸쳐 고부 농민들이 조병갑에게 올릴 민장(民狀)을 손수 지어 주었다. 1893년 11월에 작성된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1894년 1월 10일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폭발한 고부 농민봉기를 직접 진두지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전봉준은 혁명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동학 조직과 농민세력을 결합하여 정부를 상대로 직접 물리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고창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분만하다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한 곳은 고부이지만, 그것을 분만한 곳은 고창 무장이었다. 고부 농민봉기에 실패한 전봉준은 3월 초순 고부와 인접한 무장으로 옮겨 은밀하게 거사를 준비한 뒤 3월 20일 창의문을 포고하였다. 이것은 정부를 상대로 한 선전포고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한 뒤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7일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그 뒤에도 수 차례 정부를 대표하는 전라감사 김학진과 수 차례 협상을 통해 동학농민군이 주도하는 집강소체제를 이끌어내는 등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이 같은 투쟁노선은 강경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8월 말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각지의 동학농민군들도 개별적으로 재봉기하자, 더 이상 시국을 관망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9월 10일경 전주 근처에 있는 삼례에 동학농민군 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뒤 본격적인 재기병 준비에 들어갔다. 그를 위해 군사물자를 준비하는 동시에 남북접 연합을 시도하여 북접 동학교단과의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출정 준비를 마친 뒤 9월 말경 직속부대 4천 명을 이끌고 북상을 시작하여 10월 12일 충청도 논산에 도착하였다. 직속부대도 1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곳에서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였다. 그런 다음 동학농민군 연합부대를 총지휘하여 11월 8일부터 11일에 걸쳐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크게 패하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11월 19일 전주성에서 4일간 머문 뒤, 11월 27일 태인전투를 끝으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장성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순창 피노리로 피신하였다. 이 때 옛 부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한신현(韓信賢)이 이끄는 민보군에 의해 12월 2일 밤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마침내 1895년 3월 29일(양력) 사형언도를 받고 3월 30일 사형집행 하였다.

공공저작물 자유이용 허락 표시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콘텐츠 담당자 정보

  • 담당자 : 장진혁
  • 전화번호 : 063-560-2462

최종수정일 : 2019-10-17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정도 만족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