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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고부민란(古阜民亂)

고부는 동진강, 정읍천, 팔왕천, 초강천, 고부천 등이 그 관할 지역 안으로 흘러, 고부평야, 팔왕평야, 배들평야, 백산평야, 수금평야, 화호평야 등이 형성되어 비옥한 농토와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천혜의 낙토로서, 군내 제일의 곡창지대가 되어 전통적으로 지배층의 수탈 행위가 극심한 곳이었다. 더욱이 개항 이후에는 대일 쌀 수출항인 줄포항까지 있어 쌀 수출과 관련하여 지주제가 강화되고 농민들의 몰락이 가속화된 지역이었다.

1893년 11월 고부 배들梨坪 농민들의 보세감면 원성으로 익산군수로 밀려났던 조병갑은 그 배경이 든든해서 임지에 부임도 않고 오히려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고부 전 군수 조병갑은 많은 포흠을 청산하고자 때마침 세를 받아들이려는 참인데 다른 고을로 옮기게 되면 착오가 생길 것 같다'는 노골적인 비호 장계를 올리는 철저한 유임 공작의 성공으로, 1894년 1월 9일 이조에서 특별히 그대로 유임시켜 고부군수로 다시 오게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고부 농민들은 1월 10일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 3장두를 중심으로 수천 명이 교통의 요지인 말목장터(현 이평면 소재)에 걸군으로 위장해 10여개 마을의 풍물패를 앞세워 집결하였다.

군중들을 선동한 전봉준은 원에 사무친 군중들을 골라서 두 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진격하였다. 군수 조병갑은 급보를 전해 듣고 이미 몸을 피하고 없었다. 관아를 습격한 농민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재무장한 후 옥사를 헐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세미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질이 나쁜 아전들을 처벌하고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원성의 만신보를 헐어냈다. 한편으로는 백산성을 수축하도록 조치한 후 1월 17에는 말목장터로 진을 옮겼다가 1월 25일경에는 백산성으로 다시 진을 옮겼다.

조정에서는 2월 15일에야 보고를 받고 조병갑을 잡아다 죄를 물어 다스렸다. 그리고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내 사태를 수습케 하였다. 박원명의 간청으로 폐정을 시정케 하고, 군중들은 모두 해산했으나 이용태는 역졸 8백명을 거느리고 3월 20일 도착, 민란을 동학도들의 소행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가옥을 태우며 가족들을 살상하는 횡포를 서슴지 않아 농민들의 원한은 극에 달하였다.

오래 전부터 여러 형태로 맥을 이어왔던 고부 민란 사는 봉건제 해체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인내의 한계를 초월한 수탈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봉기하였지만 조병갑 개인에 대한 분풀이로 끝을 낸 국지적인 농민항쟁의 보편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의 본거지를 백산성으로 옮긴 사실이나 인근 읍의 인물들이 함께 참가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부 민란은 이미 단순한 민란일 수가 없는 농민혁명의 서막이요 시작으로 보는 시각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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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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