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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정개혁안

완산전투 과정에서 홍계훈은 전라도내 각 군현에서 군사을 징발하고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는 등 강공책을 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주성에 효유문을 보내어 농민군의 해산을 재촉하는 양면책을 썼다. 반면 완산전투의 결과, 농민군은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관군은 속속 증원되는데 비해 농민군은 오히려 고립되어 외부로부터 지원이 끊어지고 싸움에도 패하였으며 식량도 떨어져 갔던 것이다. 또 내부의 동요마저 일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4일 ‘너희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겠다’는 홍계훈의 글이 전달되었다.

이에 전봉준은 홍계훈에게 소지문과 함께 27개의 폐정(弊政: 폐단이 많은 나쁜 정치)개혁 조목을 적어 임금에게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한 셈이다. 이때 농민군이 요구한 내용 가운데 14개 조항이 전봉준의 판결문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 1. 전운소(轉運所)를 혁파할 것.
  • 2. 국결(國結)을 더하지 말 것.
  • 3. 보부상의 작폐를 금할 것.
  • 4. 도내 환전(還錢)은 구 감사가 거두어 갔으니 민간에 다시 징수하지 말 것.
  • 5. 대동미를 상납하는 기간에 각 포구 잠상(潛商)의 미곡 무역을 금할 것.
  • 6. 동포전(洞布錢)은 매호(每戶) 봄 가을로 2냥씩 정할 것.
  • 7. 탐관오리를 모두 파면시켜 내쫓을 것.
  • 8. 위로 임금을 가리고 관직을 팔아 국권을 조롱하는 자들을 모두 축출할 것.
  • 9. 수령은 자기의 관할지역 안에 입장(入葬)할 수 없으며 또 논을 거래하지 말 것.
  • 10. 전세(田稅)는 전례를 따를 것.
  • 11. 연호 잡역(烟戶 雜役)을 줄여 없앨 것.
  • 12. 포구의 어염세(漁鹽稅)는 혁파할 것.
  • 13. 보세(湺稅)와 궁답(宮沓)은 시행하지 말 것.
  • 14. 각 고을에 수령이 내려와 백성의 산지(山地)에 늑표(勒標)하거나 투장(偸葬)하지 말 것.
    나머지 13개 조항은 판결문에 기록되지 않아 그 내용을 단정할 수 없지만 이전에 농민군이 올린 각종 요구안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복원하고 있다.
  • 15. 균전어사(均田御史)를 혁파할 것
  • 16. 각읍 시정(市井) 각 물건에 분전수세(分錢收稅)하는 것과 도고명색(都賈名色)을 혁파할 것
  • 17. 백지(白地)징세와 사전(私田) 진결(陳結)을 거두지 말 것
  • 18. 대원군을 국정에 간여토록 함으로써 민심을 바라는 바대로 할 것
  • 19. 진고(賑庫)를 혁파할 것
  • 20. 전보국(電報局)이 민간에 대해 폐해가 크니 혁파할 것
  • 21. 각읍 관아에서 필요한 물종(物種)은 시가(時價)에 따라 사서 쓰도록 할 것
  • 22. 각읍의 아전을 돈으로 임명하지 말고 쓸 만한 사람을 택할 것
  • 23. 각읍 이속들이 천금(千金)을 축냈으면 그 자를 처형하고 친족에게 징수치 말 것
  • 24. 오래된 사채를 수령이 끼고 억지로 거두는 것을 모두 금단할 것
  • 25. 동학교도를 무고히 살육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동학과 관련되어 갇힌 이는 모두 신원할 것
  • 26.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에게 주는 료미(料米)는 과거의 예에 따라 삭감할 것
  • 27. 각국 상인들이 포구에서 장사하고 있으니 도성(都城) 시장에는 출입을 금하고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행상하는 일을 금하도록 할 것

농민군이 요구한 내용은 농민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봉기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 절절히 담겨 있는 이 27개조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크게 보아

①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의 처벌과 제거
② 삼정의 개선과 부당한 세급징수의 원천적 철폐
③ 대원군의 국정 참여
④ 외국상인의 불법 활동 금지

등으로 집약된다. 즉 농민군은 당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총체적 철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농민군이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해체하기를 요구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농민군은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신분제의 철폐 요구를 명문화(明文化)하지 못했다. 또한 이와 밀접하게 결부된 지주와 소작간 토지문제의 해결(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이 토지경작권 또는 소유권을 갖게 하는 것)을 요구하지 못했다.

전주화약(全州和約)

농민군의 요구에 대해 홍계훈은 5일에 ‘여러 가지(폐정개혁) 조목을 들었으나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들어줄 수 없다 하고, ‘무기를 반납하고 성문을 열고 해산하라’는 답변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목숨을 구하려거든 성문을 열고 나가라. 결코 쫓아가 잡지 않을 것이며 또 각 고을에 알려 해치지 않도록 하겠다.’이라는 방문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농민군이 6일 홍계훈에게 전령을 보내 신변보장을 요구하자, 홍계훈은 신변보장을 약속하였다. 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신변보장을 철수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홍계훈이 신병보장을 약속함으로써, 양측은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와 정부측의 농민군 신변보장에 있어서는 타협을 본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은 곧바로 철수하지는 않았다. 철수의 조건으로 제시한 폐정개혁에 대한 문제를 홍계훈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농민군은 7일과 8일 소지를 올린 후 전주성의 동, 북문을 열고 나왔다. 이때 홍계훈과 농민군 사이에 신변보장 뿐 아니라 폐정개혁 상주(上奏: 임금에게 말씀을 아룀)에 관한 약속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기 전에 폐정개혁안에 대한 상주약속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양측은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홍계훈은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고 폐정개혁안을 임금께 올린다’는 조건으로 타협을 맺었던 것이다.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양측이 타협하여 화약을 맺은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농민군의 입장에서 보면

  • 첫째, 완산전투의 패배로 인한 전력상실과 사기 저하, 그리고 고립에 따른 전세의 불리,
  • 둘째, 폐정개혁에 대한 기대,
  • 셋째, 보리수확과 이앙 준비에 바쁜 농번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을 고려하면, 화약을 맺은 배경은 무엇보다도 청, 일군대의 조선 진주라는 상황변화였다. 청.일군대의 개입은 농민군도 원하지 않던 일이었고, 정부 역시 일본군의 개입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청.일 군대를 조선에서 철병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기 위해서 무력진압이 아니라도 최대한 빨리 농민군을 철수시키고 전주성을 회복해야 했다. 전주화약은 양자의 이와 같은 입장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농민군이 철수하자 홍계훈은 8일 행정질서를 정돈하였다. 또 한편으로 그는 ‘전주성을 수복했고 순변사가 거느린 평양영의 병정도 전주에 곧 들어올 것이니, 청국 군대가 전진하는 것에 대해 다시 처분해 달라’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농민봉기가 수습되었음을 알린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가 농민군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주성에서 물러난 후로도 농민군은 여전히 전라도 각지에 모여 있었다. 경군이 홍계훈, 이원회와 함께 서울로 돌아간 것도 농민군을 완전히 진압했다고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일본 군대가 가까이 있는 서울의 상황이 더욱 급박하였기 때문이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경군이 전주성을 수복한 후 귀경하였지만, 그것은 청.일군대를 철수시키고자 한데서 온 변화였을 뿐이다. 농민혁명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외세의 간섭으로 국면이 전환된 가운데, 전라도에서는 관과 농민군 사이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는 소극적인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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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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