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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해산 이후 농민군의 동향

5월 8일 전주성에서 나온 농민군은 둘로 나뉘어, 1대는 김제, 부안, 고부, 무장 방향으로, 1대는 금구, 태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봉준은 금구와 김제를 거쳐 10일 태인에 이르렀고, 손화중은 8,9일경 약 2,000여명을 거느리고 흥덕을 경과하여 무장방향으로 향했다. 전봉준은 태인에 머물다가 13일에 남쪽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행로를 같이 하던 김개남도 이 무렵 전봉준과 헤어졌다.

이후 전봉준과 김개남은 각각의 농민군을 이끌며 전라도 전역을 휩쓸었다. 그런 가운데 전주화약의 내용 즉 신변보장과 폐정개혁의 실행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농민군의 세력이 날로 증강되자 순변사 김학진은 6월 7일 적극적인 수습 방안의 하나로 집강안(執綱案)을 제시하였으나, 농민군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던 만큼 농민군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도 전역에서 농민군의 세력이 증대되어 갔고 일부 지역에서는 보다 강경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6월 21일에 벌어진 일본군의 궁궐(경복궁) 점령사건이었다. 일본군의 궁궐 점령사건이란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 즉 내정(內政)이 안정되었음을 들어 조선정부가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자, 억지로 내세운 명분마저 잃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라고 협박하던 끝에 비상수단으로써 궁궐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은 이 후에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갑오개혁 정권을 세우고 내정을 간섭하는 한편, 아산만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청, 일 전쟁을 도발하며 노골적으로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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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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