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지휘체계

  • 총대장(總大將) : 전봉준
  • 총관령(總管領) : 김개남ㆍ손화중
  • 총참모(總參謀) : 김덕명ㆍ오시영
  • 영솔장(領率將) : 최경선
  • 비 서 : 송희옥ㆍ정백현

전봉준

전봉준 (1855. ~ 1895. 4. 24)
《전봉준의 고창 태생 설에 관한 연구 제하에 1989. 12. 9 세종문화회관 강당에서 발표문》에 의한 전봉준의 생존 시인 1862년에 발행된 천안 전 씨 대동보(壬戌譜) 기록을 보면 그의 아명은 철로(鐵爐) 그의 아버지는 기영(基永)이며 어머니는 언양 김 씨이며 또한 1886년에 나온 천안 전 씨 세보(丙戌譜)에는 그의 휘는 병호(炳鎬) 초명, 철로 자, 명좌(明佐) 그의 아버지는 기창(基昶)이다. 그 외에도 전봉준의 자는 명숙(明淑)으로 아버지 이름은 창혁(暢爀) 형호(亨鎬)로도 쓰이고 있다. 그는 철종 6년 12월 3일 고창 당촌 에서 태어났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민권(民權)운동으로 새 장을 연 갑오동학혁명의 농민봉기로 표출되었고, 그 진원지가 고창 무장(茂長) 땅이요. 그 거사의 횃불을 밝힌 전봉준이 고창 당촌(堂村) 태생인 것을 생각해보면 고창이 역사적으로 뜻 깊은 고장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김개남

김개남 [金開男, 1853~1894]
전봉준(全琫準) 다음가는 남접(南接)의 실력자로,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초기에 태인의 두령 김낙삼(金洛三)·김문행(金文行) 등 1,300여 명을 거느리고 백산(白山)에 집합,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좌도(全羅左道)를 통할, 전봉준을 능가할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때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타협, 동학도(東學徒)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확약받은 후 전주성(全州城)을 관군에게 내주고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일본 군대가 개입하자 다시 일어나 5∼6만의 병력으로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용헌(李龍憲)을 붙잡아 처단하고, 동학군정(東學軍政)을 실시하였다.
이해 10월 하순 전주 수비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공주회전(公州會戰)에 참가하여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였다. 그후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게 패배하였고, 다시 남하하여 금구(金溝)에서 또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패주하였는데, 12월 3일 태인에서 생포되어 효수(梟示)형에 처해졌다.

손화중

손화중 (孫華仲, 1861~1895)(자, 華仲 . 호, 楚山 . 이름, 正植)
정읍 과교동(科橋洞)에서 밀양손씨(密陽孫氏)의 후손으로 출생하여 어려서 이웃 음성리(陰城里)로 이거하였다. 가재가 넉넉하여 학문을 수학하였는데 비범한 재질이었다고 소개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처남(柳龍洙, 자,兌先 . 이름, 然道)과 함께 지리산 청학동(靑鶴洞)에 갔다가 당시 영남지방에 넘쳐나던 동학교에 심취되어 입도하게 되었다. 입교 2년 만에 귀향하여 포교에 전념 정읍, 부안 지방을 전전하다 활동영역을 무장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무장읍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가 동생 익중(益仲)의 중재로 익중과 갑계원의 막역지간이 된 정재찬(鄭在燦? 당시 원송면 산수리 거주)의 추천으로 진주정씨들의 집성촌인 성동면 괴치리(槐峙里)에 포교소를 차리고 거주하는 숙소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 뒤 동학의 남접도소를 차린 무장 신촌(접주로 훈장인 김성칠(金聖七)이 운영하는) 서당과의 연락관계로 포교소를 사천(沙川)을 거쳐 양실(良谷)로 옮겼다. 손화중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마애불상의 복장(腹藏)에서 검단선사(黔丹禪師) 비결록(秘訣錄)을 꺼냈다는 데서 숱한 일화속에 신비의 인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교단의 방침에 따라 녹두장군의 혁명론에 시기 상조론을 내세워 처음에는 불응하였다가 마침내는 호응하여 3월 20일 제1차 무장기포를 후원 성사시켜 고부처럼 단순했던 민란의 차원을 넘어서서 혁명적 성격을 띠는 정부상대 선전포고의 민중봉기가 되었기에 손화중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접도소의 총수로서 최고 대접주의 활동 영역 때문에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 될 수 있는 여건 성숙이 뒤 따랐던 것도 큰 몫이 되었다. 또한 그 해 6월 최경선(崔景善)의 나주성 싸움에도 손화중 포가 주력으로 가담한 것도 한몫이 되었을 것이다. 패전 후 11월 27일 광주로 후퇴하였다가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고부군 부안면의 안현리(鞍峴里)의 전주이씨 제실에 잠거하던 중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관군에 피체되어 1895년 3월 30일 전봉준, 최경선과 함께 교수형(絞首刑)의 참화를 당하니 향년 36이었다.

김덕명

김덕명(金德明, 1845∼1895)
동학의 금구대접주(金溝大接主)로 본관은 언양(彦陽), 초명은 준상(峻相), 호는 용계(龍溪), 덕명은 자(字)이다.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1891년(고종 28)에 동학접주가 되었고, 이듬해에 전라북도 삼례(參禮)에서 벌어진 동학교도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 보은(報恩) 장내리(帳內里) 집회에 참가하여 금구포(金溝包)라는 포명(包名)과 대접주가 되었다. 1892년 삼례집회부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금구 원평은 이른바 김덕명포의 관할지역으로 호남지방 동학의 주요 포교지임과 동시에 금구집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1894년 백산에서 총참모의 직책을 맡았으며. 전봉준이 공주(公州) 전투에서 패해 원평 구미란에서 일전을 벌일 때 함께 동학군을 재편성하여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돼 전봉준 등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그의 나이 51세로 농민군 지도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최경선

최경선(崔景善, 1859∼1895)
동학농민운동의 농민군 지도자로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 이름의 한자를 敬善·慶善 등으로 쓰기도 한다. 1893년(고종 30) 1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으며, 1894년 2월의 고부봉기시에도 앞장섰다. 3월봉기 때 백산(白山)에서 조직된 농민군의 영솔장(領率將) 직책을 맡아 5월 31일 전주(全州) 입성 때까지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그 해 6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된 뒤 전봉준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집강소(執綱所) 설치를 감독하고, 7월 3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집강소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8월 13일 전봉준이 나주부사 민종렬(閔鍾烈)과 담판하여 집강소 설치를 관철하자 이를 담당하였다.
이후 삼례 9월 재봉기시 태인(泰仁)에서 농민군 7000여 명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12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牛金峙)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뒤, 지금의 전라남도 동복면(同福面) 등지에서 농민군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 95년 3월 서울에서 전봉준 등과 함께 37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오시영 (吳時泳, 미상~1894)
그의 본관은 해주(海州) 고창(高敞)으로 혼기되고 있어 확실한 근거는 애매하나 고창지역에서는 고창오씨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태생은 무장 덕림(德林)리로 알려지고 있으나 성장하여 고창읍 향교동(鄕校洞)으로 이거해와 고창사람으로 「동학사」의 저자 오지영(吳知泳)과 친족 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893년 동학교단에서 충청도 보은집회(報恩集會)를 열었을 때부터 임형로(林亨老)와 함께 고창지역의 접주로 활약하였다. 갑오년 3월 무장기포에 1500여명을 9월 농민전쟁 때에는 농민군 8천여 명을 이끌고 영광에서 봉기하였다. 패전이후 이현숙(李鉉淑)의 민보군에 피체되어 관군에게 이첩되었었다.

정백현 (鄭伯賢, 1869~1920)(자, 伯賢 . 호, 藥峰 . 법호, 眞菴)
고종 6년 무장 와공면 상례(上禮) 마을에서 진주정씨 정만원(鄭萬源)의 독자로 태어났다. 8살 때 족숙 죽사(竹史) 정학원(鄭學源) 문하에서 수학하여 선비의 길을 열었다. 1893년 25세에 손화중 접주와의 연계로 동학 농민혁명 모의에 가담이 되어 핵심세력과 내통이 이루어졌으며 녹두장군과도 굴정동(屈井洞)의 천안전씨 세거지에서 의기가 투합되어 손접주의 천거로 전봉준의 수행 비서직을 맡았다. 이듬해 백산 봉기때 동도창의대장소(東徒倡義大將所)의 창의 조직에서 그는 송희옥(宋喜玉)과 함께 동도대장의 공식 비서로 발탁되어 창의문, 격문 등 각종 대외문서의 작성과 통문(通文)의 수발과 회신을 챙기는 등 중요 전략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전장군을 밀착 수행하여 보좌역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전장군의 밀령에 의해 그는 서울로 입경 친지들로부터 급변하는 시국대처에 적응할 정보 수집을 은밀히 수행 하면서 동학도의 행적을 숨겼고 변성명하여 신분을 철저히 위장하였다. 문장이 탁월하여 판서를 지낸 신헌구(申軒求), 참판을 지낸 이근용(李根鎔) 등과 두터운 교분을 나눔으로서 당시 세도가의 자제들과 교류를 터 그들의 비호를 받아 은신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교분이 두터워진 이은용(李垠鎔)의 아버지 이희하(李凞夏)가 무장군수로 발령되어 별 탈 없이 고향으로 내려올 수 있게 되어 1903년에 아산면 오정동(梧亭洞)으로 이거한 후 향년 52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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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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