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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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장군이 고창태생이라는 통설 정립을 위해 몸 바쳐온지 반평생, 1963년 하반기에서부터 1980년대 하반기까지 무려 4반세기가 넘는 세월이었다.

당초엔 고증자료조차 태무한 처지에서 오직 불굴의 의지와 집념을 불태우면서 고로들의 순수한 증언을 토대로 심증적 상황만을 믿고 의지한 채, 백방으로 뛰어다닌 보람이 있어 그동안 삼재공파의 조작된 술수를 혁파해 내고 천신만고 끝에 발굴한 “병술보와 “임술보“는 전봉준이 살아있을 때 만들어진 귀중한 자료로서 그의 행보 규정에 큰 몫을 보태주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병술보를 두고 위보일 가능성이 짙기만 하다는 등,고창파를 위해 의도적인 조작이라는 등, 고창파들이 주도하여 만든 그들만을 위한 족보라는 등의 벼라별 난도질이 기세등등하고 있는데 족보가 뭐 별것인가.

어느 문중치고 다 제손으로 꼴마리까기인 것을. 어느 족보치고 벼슬 없는 선영을 보았는가. 묵으면 묵을수록 벽짝처럼 두둑해 지는 것이 상례가 아닌가! 임술보가 있고 병술보가 공존하는 마당에 전봉준이 고부 진장문과 차복리 부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며, 또한 이곳에서 유년기를 살다가 고창 당촌으로 이사간 것처럼 니마음대로식은 이제 지양해 주었으면 한다. 역사적 양식에 따라 당당하고 확실하게 해야지 미적지근하게 아마 그랬을 것이다라는 식의, 자신의 명망을 팔아먹는 식의 모호한 설정은 제발 그만하였으면 하는 솔직한 바램이다.

천안전씨의 고창파들도 그들은 갑오년 난리에 역적으로 몰려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을, 달보고 짖는 개처럼 주인공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옛날인데 족보만 나무란다면 무얼 하자는 것인가! 들여다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전인수격의 주관적인 견해나 해석일 뿐이고 추정으로 끝맺음을 이끌어내고 있던데 아무렴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줄 믿는다.
아무리 병술보의 전봉준 조부 묘 타령을 해도 임술보가 존재하는 한 언감생심 당촌을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가 뭐라해도 고창 당촌은 동학농민혁명을 영도했던 전봉준의 태생지요, 민권운동사의 성지이다.
사대와 봉건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절실한 시대적 요청속에서 반만년 역사 이래 최초의 민권운동으로 일어난 새 역사의 장을 열고 그 주역의 요람이 된 당촌마을은 근대시민사회의 여명을 알리고 불멸의 민권혁명가를 탄생시킨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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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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