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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전씨 세계(世系)와 족보

천안전씨 세계(世系)와 족보: 족보 또는 세보라 함은 어느 한 씨족의 구성원들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가계?기록을 계통적인 하나로 합쳐서 정리한 계보이다.
그러므로 족보는 으레 씨족원 공동의 발의와 족보에 수록될 명단 및 관련기사의 작성, 제출 그리고 편찬 간행의 경비 부담 등 공동의 노력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全氏는 중국 夏禹씨 후손이 東國으로 건너온데서 근본을 이루고 있는데 시조 섭(?)이 백제초기에 환성군(歡城君)에 봉군이 되면서 그 후손들이 천안을 관향으로 삼은데에서 비롯되어 천안의 망족(望族)으로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래에 적은 것을 보면 천안전씨의 세계(世系)는 족보의 기록 실전으로 오랫동안 그 대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환성군은 백제 다루왕때에 병상(兵相)공이 된 2세 호익(虎翼)에게 겨우 한 대를 전하고 그후로는 실계하여 전하지 못한 채 병상공으로부터 승상(丞相)공 종도(宗道)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몇 대가 되었는지 상고할 길이 없다.」 즉 다루왕 말년인 정축년(서기77년)으로부터 고려 태조 원년인 무인년(서기918)까지의 무려 842년의 세계가 실전 된 것이 몇 대 인줄을 알길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全氏는 천안의 토성으로서 세상에서 명문우족으로 칭하였는데 근대에 이르러 후손이 쇠약하여 입신양명의 뜻을 못이루고 번성하지 못함에 그 개탄함을 어찌 다 하리요, 하물며 선세의 족보를 지돈영(知敦寧).전자완(全自完)의 사위 현감 설갑손(?甲孫)의 집에서 유실되었으니 이로 인해 우리 후손들이 선세의 명호(名號)와 세대를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으니 더욱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에 불초후손이 간신히 계통을 찾아서 그 대강을 기록했으나 병상(兵相)공으로부터 승상(丞相)공 이전의 기록은 그 세계가 상세하지 못하니 한탄한들 어찌할까 가는 곳마다 동종(同宗)이 있지 않은 데가 없으니 다행히 뒷날에 만나서 물어보는 것이 가할 것이다.」

위정해(丁亥)보의 서문을 쓴 전세익(全世翼)은 또한 이렇게 적고 있다. 「이렇게 됨에 그 이후 족보를 편찬한 분들이 부득이 승상공(宗道)으로서 1세를 삼아 그 하계를 잇게 되었는데 그 동안에 여러 경상(卿相)들이 배출되어 봉군이 됨에 그 훈업과 명적이 사기에 기록되어 충건(忠建)공 무강(武康)공은 순직 보국하였고 충숙(忠肅)공은 청백으로 갈고 닦아 봉공을 다 하였으며 문효(文孝)공은 급류에 용퇴하여 세한송백(歲寒松柏)의 굳은 절개로서 심기를 다하였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영평(寧平)과 문충(文忠)공의 두 집 자손이 대대로 규조(圭組 : 관직과 같음)를 답습하여 면면히 이어져 끊이지 않으므로 충효와 절의가 승계되어 빛나고 밝았으며 강상(綱常)이 잘 지켜져 정문(旌門)의 성전이 찬란하였으니 이 어찌 전씨의 덕을 심어내리는 경사가 아니겠는가」

「전씨가 천안으로 관향을 삼은 것은 백제 건국공신인 시조 환성군을 원천으로 삼았기에 비롯된 것이다. 병상공이래 승상공에 이르는 중간의 대수가 실전되었어도 그 사이에 지(至)자를 써서 한줄 가운데에 계통을 연결하여 할수 있었다. 그 이후 승상공으로부터 지후(祗侯)공 인량(仁亮)에 이르도록 대대로 작위를 얻어 천안의 고호(古號)로 봉군을 받아 줄지어 사패지를 삼아 내려오니 전씨들은 천안을 돈향으로 줄곧 이어 온 것이다.」

「환성군 섭(攝)으로부터 병상공 호익에 이르는 불과 2세 후에 족보가 실전되어 계파가 상세하지 못하고 승상공 종도에 와서 비로소 그 대수가 나타났으니 열조의 절의가 빛나고 공훈의 업적과 아울러 정문의 번성함은 삼한 거족으로서의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병상공 이래 승상공 사이에 실전된 대수는 12세가 된다.」

이상의 열거한 내용들을 검토해보면 천안전씨는 백제국의 시조 온조왕을 도와 개국공신에 오른 시조 섭이 국가유공자로서 환성군에 봉군이 된 이후 BC18년 ~ AD76년에 이르는 약 90년간을 섭과 호익 두 부자간에 크게 활약한 이후 어떤 연유에서인지 AD77년부터 고려태조 원년간의 842년동안 족보의 실전으로 대를 잇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허송세월하였는데 그 이후 족보 편수자들이 부득이하게 정승반열에 이른 승상공(宗道)을 1세로 내세워 그 뒤의 세계를 잇게 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로부터는 천안부원군 충건공(樂), 익찬공신 무강공(洪述), 문하시중 평장사 충숙공(忠佑), 천성군 문정공(世柱), 합문지후공으로 좌상에 오른 인량(人亮), 병부상서로 영평군이 된 문충공(昇), 보문각 제학에서 진현관 대제학 상장군에 오른 파조 문효공(信)등 쟁쟁한 세대가 이어지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천안전씨 족보는 초판본인 성화보(成化譜; 1470)를 위시해 1989년에 발행된 기사보(己巳譜 : 16권 광주 호남인쇄소 출간)에 이르기까지 28회의 족보발행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그밖에도 대사헌을 지낸 구한말의 충신 송병선(宋秉璿)이 서문을 써준 병술보(丙戌譜 : 6권 1886)와 계사보(癸巳譜 : 1권 1953 전주발행)등이 더 간행되었다. 그러나 천안전씨 대동보소에서 공식적으로 공인된 세보의 편수 내력을 보면 아래와 같다.

天安全氏 世譜編修內譯
天安全氏 世譜編修內譯
回 數 卷 數 譜 名 發行年度 修譜場所 發行人
一回 逸傳 丁亥譜 1587 公州新阮寺 世翼
二回 己酉譜 1609 天安豊歲院 有道
三回 單卷 甲寅譜 1674 公州甲寺 克享
四回 三卷 甲申譜 1704 鎭安金塘寺 一會
五回 五卷 戊子譜 1768 錦山身安寺 在泰
六回 九卷 庚申譜 1800 天安儉溪書院 始祿
七回 十二卷 辛卯譜 1831 天安儉溪書院 泗性
八回 十八卷 壬戌譜 1862 錦山廣業齋 ?容
九回 十六卷 甲寅譜 1914 天安儉溪書院 達弘
十回 十三卷 辛未譜 1931 天安邑 載敏
十一回 十卷 丁酉譜 1957 天安儉溪書院 海龍
十一回 五卷 丁酉譜 1957 전주인쇄소 基洪
十七卷 戊申譜 1968 大田譜典社 中權
十三回 七卷 丙寅譜 1986 大田譜典社 甲植
十四回 己巳譜 1989 광주 호남인쇄소 雲鍾

2003년 정읍에서 우윤씨가 발표한 「전봉준 장군 출생지 정립」에서「병술보」는 전봉준의 가계와 출생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본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한 착오로 밝히고 싶다. 왜냐하면 전봉준의 기록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족보는 「병술보」이전의「임술보」(1862)가 또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60년대 이후 전남-북을 누비고 다닐 때 전봉준 장군이 살아 있을 때 간행된 족보 갑자보(1864 : 서울발행)와 을축보(1865 : 함평발행) 계사보(1893 : 영암발행)등을 찾으러 심혈을 다하였으나, 찾아가 보면 녹두장군이 역적으로 몰렸었기 때문에 소장하는 것 자체가 불안하여 모두들 불태워 버렸다는 대답뿐이었다.

병술보의 입수로 자신을 얻은 필자는 녹두장군이 고창태생이었다는 방증자료 수집에 열을 올려 보았으나 첩첩산중이었다. 역적의 범주에 해당되는 자료이므로 왜놈들의 감시가 더욱 두려워 깨끗이 인멸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임술보의 입수는 1980년이었다. 전주향교를 찾아 관내에 천안 전씨들의 세거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완주군 봉동면 낙평리(洛平里)에 사는 전태연(全泰淵)씨 집을 찾아 그 집에 소장되고 있는 십여질의 천안전씨 족보를 보게 되어 그속에서 기대했던 「임술보」와 「신미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임술보]는 18권중 1권과 16권이 빠지고 16권이 모두 있어서 기대를 걸고 [병술보]에 수록된 녹두장군의 계보를 상계에서 더듬어 내려가는데 전봉준의 7대조까지 확인되고 그 아래는 16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데 마침 빠진 책이 바로 16권이었다. 사연을 알아본즉 전태연씨의 대답이 일제치하 대동아전쟁기에 수시로 밀어닥치는 가택수색이 두려워 1권과 16권책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맥빠진 필자가 안타까웠던지 전씨는 그의 조부께서 임술보를 금산 광업재에서 간행할 때 수찬으로 참여한 일이 있어 들은 얘기라며 서울 장서각에 한질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정보를 띄어 주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가 장서각,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을 샅샅이 뒤진 끝에 국립도서관의 족보장서실에서 문제의 16권을 열람할 수가 있어서 채장(菜帳)에 실린 고창(高敞)파派(連山公曾孫 松菴公 諱 五常孫 彦國派)의 기록을 낱낱이 확인할 수가 있었다.

[신미보]에는 전봉준의 가계는 [임술보]의 내력과 같이 문효공의 5세손 연산공(連山公 : 敏)파 이나 소파명칭만 고창 아닌 고부(古阜)로 바뀐 것이 다를 뿐이다.

필자가 조사해온 임술보와 병술보 그리고 신미보의 계대(系代)표를 작성 비교하기로 한다.

※ 이 계대표의 [임술보]와 [병술보]는 시조 2세 그리고 계대를 잇지 않은 12세의 계보와 계대가 이어진 종도에서 봉준까지의 24세계가 형성되어 있고, [신미보]에는 시조 이후 전봉준까지의 53세계가 형성되고 있다.

임술보와 병술보 신미보의 계대(系代)표를 작성 비교
임술보와 병술보 신미보의 계대 비교 표
壬戌譜(1862) 丙戌譜(1886) 辛未譜(1931)
시조 2세 1
虎 翼 虎 翼 虎 翼 2
3
舜 成 舜 成 孝 誠 4
汝 均 汝 均 舜 恭 5
雲 喬 雲 喬 萬 里 6
元 根 元 根 7
元 浩 8
方 春 方 春 9
敬 智 敬 智 鉤 監 10
而 敏 而 敏 晋 德 11
12
億 句 億 句 13
天 奇 天 奇 百 金 14
1세 宗 道 宗 道 昌 瑜 15
2세 16
3세 洪 述 洪 述 17
4세 忠 佑 忠 佑 18
5세 世 柱 世 柱 19
6세 仁 亮 仁 亮 20
7세
8세
就 洪 21
加 里 22
9세 成 安 成 安 23
10세 德 芳 德 芳 得 恭 24
11세 太 堯 25
12세 宗 道 26
13세 季 欽 季 欽 克 貴 27
14세 28
15세 五 常 五 常 29
16세 立 中 30
17세 彦 國 彦 國 孝 淑 31
18세 厚 徵 厚 徵 洪 述 32
19세 萬 紀 萬 紀 忠 佑 33
20세 相 圭 相 圭 世 柱 34
21세 道 臣 道 臣 仁 亮 35
22세 碩 豊 碩 豊 36
23세 基 永 基 昶 37
24세 鐵 爐 炳 鎬 成 安 38
德 芳 39
40
41
季 欽 42
43
五 常 44
45
彦 國 46
厚 徵 47
萬 紀 48
相 圭 49
道 臣 50
碩 豊 51
基 昶 52
琫 準 53

위에 제시한 세가지 족보의 계보를 분석해 보면서 새로 제기된 주장에 대응하고자 한다.

우윤씨가 발표한〈전봉준장군 출생지 정립〉중〔병술보〕에 대한 검토에서 몇가지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는데,

  • 첫번째〔병술보〕와〔신미보〕가 시조이후 병호에 이르기까지 세대수가 다르다 는 점.
  • 두번째〔병술보〕와〔신미보〕에서 종도(宗道)의 세대수가 각각 다르고 가계의 흐름이 다르다는 점. 〔병술보〕의 순성(舜成)은 확인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인 점.
  • 세 번째〔병술보〕에는 〔신미보〕에 없는 덕신(德臣)이 상규(相圭)의 차자로 끼어들고 있는 점.
  • 네 번째〔병술보〕에는 〔신미보〕에 없는 석운(碩雲) 도신(道臣)의 장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
    이로 인해〔병술보〕는 상규의 후손들만이 갖는 절박한 동기에서 만들어진 위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라는 것이다.

앞에 적은 선대의 예시에서도 밝혀 놓았지만 천안전씨 족보의 속성상 2세인 병상공 호익 이후 승상공 종도에 이르는 842년간의 계대 실전으로 족보가 단절되고 있음은 그 후손들이 이미 자인하고 있으며 그 사이의 계대수가 12세인 것으로 밝혀 놓고 있다. 그러나 더 좀 상세히 유추해 보면 842년간의 세월은 보학상의 개념으로 봐도 1세를 30년으로 잡을 때 28세쯤으로 어림할 수 있듯이〔신미보〕의 세대인 23세(槃~太堯)로는 종잡히지 않는 셈이 되고 있다.

〔병술보〕와 〔임술보〕는 세대간의 계대기록면에서 그 사이를 똑같이 12세로 메꾸고 있고 종도를 1세로 기산하여 24세를 누려온 셈이 되고 있어 〔병술보〕가 〔임술보〕의 기록을 절대 존중하고 답습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비해〔신미보〕는 기존의 다른 구보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대체적으로 구보의 연원을 존중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족보간행에 있어 독단의 창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족보간행에 있어 간행경비를 조달하는 수법으로 문중회의나 편찬위원회에서 확실한 의결을 거쳐 어느 절손된 세계에 은근히 끼어주는 사례는 더러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막대한 교섭 자금이 마련되어야 함으로 가난한 집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성사되더라도 새로 입도된 사람은 새로운 집안행세를 얼마동안은 할 수도 없는 처지여서 만에 하나 위보가 사실이라면 전씨 문중에서 인정도 안 해주겠지만 전봉준 집안도 당분간은 감히 양심상 전씨 문중에 주도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도 명약 관하한 일이 아니겠는가.

항차 가난한 전창혁의 가세 정도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수 없는 처지인 것을 감안하면 위보일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순성(舜成)이 가상의 인물이거나 덕신(德臣)이 상규(相圭)의 아들로 끼어들고 석운(碩雲)이 도신의 장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 등은 이것이 조작이라면〔임술보〕와〔병술보〕의 기재사항이 똑같은 점으로 보아〔임술보〕보다 그 훨씬 이전의 구보 간행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또한 신미보의 간행연대로 보아 상규의 아들이 도신뿐이며 도신의 아들 또한 석풍뿐으로 기재하고 있다지만 필자가 알기로는 상규의 증조되는 언국(彦國)이 무후 절손되고 있는 것은 〔신미보〕(1931)에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 사실은 무엇으로 답해 낼 수 있겠는가 묻고 싶다.

이런 경우 우윤씨가 의문점으로 제시할 첫 번째~네번째의 사안은 모두가 허구가 될 뿐이므로 답변할 가치조차 상실하게 되었음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이런 질문을 하려거든 대한민국 족보이면사를 먼저 터득한 연후에 토론의 광장에 임해야지 족보 간행의 ABC도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대화가 되겠는가.

여하튼 우윤씨가 제기한 의문점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되묻고 싶을 뿐이다. 족보 제작의 비리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이미 오랜 세월 동안에 저질러진 소위 양반 장사하던 가난한 문중들의 비상수법의 결과라고 치부하면 될 것으로 생각된다.

1953년 피란 시절 전주에서 만들어진 삼제공파 세보에 이미 절손된 난에 녹두장군 윗대로 5대를 가공인물들로 채우고 조작해낸 줄도 모르고 수십년동안 문효공파 아닌 삼제공파 후손으로 교수, 학생,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북새통을 떨어온 것을 1980년대에 와서 필자가 밝혀낸 역사 왜곡임을 우윤씨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예로부터 족보는 참고사항이지 결코 증빙사항이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 있는 어느 성씨문중 족보에도 이와 같은 옥의 티를 고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줄 믿는다. 대부분 그런 단면의 속성이 내재되고 있음을 짐작하면서도 묵과해주는 것이 오히려 예의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각설하고 임술보를 통한 전봉준의 가계를 보면 그 상계의 세계가 천양군(天陽君 : 仁亮)에서 둘째아들 문충공(文忠公 : 昇)파로 분파되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문충공의 6세손 연산공(連山公 : 敏)파로 갈라서고 다시 연산공의 증손 송암공(松菴公 : 五常)파로 세파되었다가 송암공의 손자(彦國)파로 갈라서서 고창파를 이룬다.

그러나 전봉준이 13세 되던 해 봄에 고부로 이거(1867)한 이후로 만든 〔병술보〕(1886)의 기록을 보면 고창파인 송암공손파의 기록은 고부파로 바뀌어 지는데 여기에서 짚고 넘어 갈 일은 우윤씨의 추정사항이다.

「전봉준 집안은 조부가 돌아가자 어떤 이유에선지 전창혁의 종형제들이 고창 덕정면으로 이주하고 전창혁 또한 유년기인 전봉준을 데리고 당촌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고,

「옮겨 살았기에 당촌지역이 고부보다 전봉준의 유년기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우윤씨는 단정지었는데 필자의 견해는 전봉준이 태어나서 성장한곳이기에 고창 당촌지역에 유년기의 흔적이 많을 수밖에 없고 고부에는 유년기에 살지 않았기에 유년기의 흔적이 전무한 것이 오히려 당연한 순리이며 사실 규명 일터인데 아무리 전문가라고 확인 자료도 없이 이렇게 단정하고 추정할 수 있는 일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상규의 후손들만이 갖는 절박한 동기에서 만들어진 위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단정하였는데 이와 같은 결론을 얻기 위해 〔임술보〕에 실려있는 고창파의 기록을 상규의 후손들이 고부파로 둔갑시킬 하등의 이유와 필요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조작하지 않아도 고부로 이사 가면 저절로 족보 할 때 고부파로 기재되는 것이 순리 아닌가?

그 해답은〔신미보〕를 간행할 당시에는 상규의 후손들인 고창파 사람들은 역적으로 몰린 이후인지라 거의 다 희생되어 말할 사람조차 없는 상황에 처해 있고 주역이었던 전봉준의 부자지간은 이미 고부로 이거한 이후인고로 족보편수자들이 임의대로 주거지를 쫓아 고창파를 고부파로 고쳐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정읍으로 이사하지 않고 당촌에 살았던 고창파들은 인근에 사는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30여명의 기마병 수비대에 포위되어 당촌마을사람 전원과 가금 가축들까지도 일시에 몰살을 당한 이후인지라「사자는 말이 없는 법」신미보는 편수자들 의도대로 기재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니겠는가

또〔신미보〕와 〔정유보〕에 없는 석운(碩雲)마저 끌어 들여 도신(道臣)의 장자로 삼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상규대에서 절손이 되었는데 도신과 덕신을 끌어들여 새로운 가계를 만들었다고 하는 등 철두철미한 전문가께서 이런 우문이 웬말인가 묻고 싶다.

왜냐하면〔병술보〕와〔임술보〕는 1887년 이전에 만들어진 족보이고〔신미보〕와 〔정유보〕는 1930년 이후에 만들어진 족보인데 의문의 기준을 여기에 맞추어 놓고 그이전 족보의 기록을 나무란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 되겠는가를 되묻지 않을수가 없게 된 것이다.

○ 전봉준의 가계를 정리하는데는 희미한 상계쪽보다는〔임술보〕에서 1세로 들어나고 있는 승상 종도(宗道)이래에서 파조인 문효공(信)이후를 밝히는 쪽이 훨씬 근접성이 더할 것 같아 그런 추세로 정리하고자 한다. 다만 1세(宗道)이래로 파조인 8세 문효공에 이르는 동안 려조사회에서 명문가도를 달려온 남다르게 대단한 가문이었음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천안부원군으로 충건공인 2세(樂), 영산군(寧山君)으로 무강공인 3세(洪述), 청백으로 환계군(歡溪君)이오 충숙공인 4세(忠佑), 천성군(天城君)으로 문정공인 5세(世柱), 천양군(天陽君)으로 좌상을 지낸 무절공인 6세(仁亮), 영평군(寧平君)으로 병부상서를 지낸 문충공인 7세(昇)등 봉군(封君)되고 시호 받은 이가 무려 여섯분이나 되고 봄에 능히 짐작이 된다.

○ 파조인 문효공(信 : 1276 ~1339)은 자, 이립(而立) 호, 백헌(栢軒) 시호, 문효로 충숙왕조의 학자였다. 충열왕27년에 문과급제하여 충열, 충선, 충숙, 충혜 4조에 외직으로 안동, 김해 함안, 수원, 경주, 복주등의 부사(府事)를 지내고 내직으로는 사헌부 장령, 보문각 제학, 진현관, 대제학 상호군을 거쳐 봉익동지밀직사사(奉翊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정2품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가 충숙왕 복위1년(1332)에 사퇴하고 8년 동안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고 64세에 세상을 떴다. 충숙왕조의 문학자 최해(崔瀣)가 쓴 문효공의 묘지명에서도 전신(全信)은 병부 상서를 지낸 승(昇)의 아들로 성품이 엄격하고 근면하였으며 집이 어려웠으나 산업에 뜻을 두는 것보다 직무에 성실하였고 당대의 현사(賢士)인 백이정(白? 正) 김제안(金齊顔) 이제현(李齊賢)등과 교의가 두터웠으며 그의 사적은 동문선 명현록 고려사 36?38권과 동국여지승람의 천안군 우거편, 수원도호부 명환편 등에 실려 있다고 써 놓았다. 그리고 숙종4년(1678)맹동에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판서인 강백년(姜栢年)은 천 안전씨〔갑인보〕서문을 쓰면서 문효공은 일찍이 빛나는 환로에 드날리었다가 용퇴하여 오랫동안을 한가로이 지내면서 자호를 백헌(柏軒)이라 하여 세한후조 (歲寒後凋:추운 연후에야 송백의 후조를 안다)의 뜻을 붙여 놓았더니 위대하게도 그 후손들이 오랫동안 송백을 전하여 대대로 사족(士族)이 되었다고 썼다.

○. 9세(成安)은 석탄 이존오의 문인으로 충숙왕조에 사의서(司儀署)의 승(承)으 로 있다가 수원부사로 있을때에 객사 운금루(雲錦樓)를 지었는데 목은 이색(李穡) 이 기문을 지어 치적을 칭찬하였다. 또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중 수 기문에서도 그의 공직상을 찬적하였으며 그의 기록은 목민심서와 고려사에도 상세히 실려있다. 세아들을 두었는데 첫째(德新)는 사헌부 장령이요, 둘째(德芳)는 문과로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내고 셋째(德隣)는 청사목사를 지낸 뒤 1414(태 종14)년에 뜻한바 있어 천안에서 고창 무장고을 장사산(長沙山)남녘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여생을 마치니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무장땅에서 700년 가까운 세월을 200여 세대가 세거지를 삼고 살아오고 있다.

※ 여기에서 언급해 둘 사항은 그때 천안에서 무장땅에 낙향 은거한 덕방의 아우(德隣)후손들이 뒷날 갑오년 농민전쟁이 일어날 때 그 혁명을 주도한 전봉준 장군을 크게 도와 창의포고문을 선포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식거사가 된 무장땅의 1차봉기가 무난히 이루어지도록 그 뒷역할을 감당해 낸 사람들임을 밝혀둔다.

○. 10세(德芳)은 위에 적은 대로 문과급제 인물로서 전봉준 가계를 이어낸다.

○. 11세(謹)은 만년에 진도군수를 지냈다. 그의 묘갈명은 참판 민병승(閔丙承)이 썼다.

○. 12세(敏)근의 넷째 아들로 성균생원에 올라 통정대보로 연산(連山)현감을 지냈다.

○. 13세(季欽)은 문과급제하여 정6품 승훈랑(承訓郞)으로 공주 판관이 되었다.

○. 14세(禧)는 무관으로 종7품인 사정(司正)을 지냈다.

○. 15세(五常)은 사정 희(禧)의 둘째아들로 그의 호는 송암(松菴)이다. 세조때 종6품 선무랑(宣武郞)으로 서북지방에 오랑케가 침범함에 그가 창의하여 갈성효충으로 난리를 소탕함에 2등공신이 되었다. 말년에 온양 배병산(排屛山)아래 퇴거하여 자제를 가르쳤다.

○. 16세(誠) 음직으로 정5품 통덕랑을 지냈다.

○. 17세(彦國) 연산공(敏)의 증손 송암공(五常)의 손(彦國)으로 이른바 고창파의 어른이다.

○. 18세(厚徵) 묘는 태인 고현면 호암 자좌.
배 - 全州崔氏(묘, 태인 고현면 덕치묘좌)

○. 19세(萬紀) 묘 - 남원 북면 신치 병좌.
배 - 옥천조씨(묘, 쌍조)

○. 20세(相圭) 묘 - 순창 하치동 조동 후록 임좌
배 - 번남박씨(묘, 쌍조)

○. 21세(道臣) 자 百源, 1750년생
묘 - 임실 강진면 龍동 간좌
배 - 김해김씨 (묘 동원 上下兆)

○. 21세(德臣) 자 奇源
묘 - 정읍 압곡 유좌

○. 22세(碩雲) 자 君甫 , 무신생
묘 - 임실 강진면 율치 동록 임좌
배 - 밀양박씨

○. 22세(碩豊) 자 允甫 경술생
묘 - 고창 맥모등 계좌
배 - 인동장씨 정사생

○. 23세(基永) 字 - 仁瑞, 丁亥生
언양김씨 신사생

○. 24세(鐵爐) 을묘생, 12월 3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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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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