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올해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지 120주년이다.

지금까지 발표된 전봉준의 태생설은 그 설이 너무도 구구하고 진원지로 알려졌던 정읍지역만 해도 무려 다섯곳이나 알려지고 있어 혼설일로이나 그동안 비중 있게 알려진 태생설 몇 가지를 놓고 그 진상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 첫째, 전주 구미리(龜尾里 : 완주,봉동면) 태생으로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 계봉리(감곡면 황새얼)로 이주하였다는 설6)
  • 둘째,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 지금곡(지금실)태생설7)
  • 셋째, 현 정읍군 이평면 조소리 태생이라는 설8)
  • 넷째, 고부군 궁동면 시목리(감냉기)태생설9)
  • 다섯째, 고부군 남면 진장 문하 차복리 부근설10)
  • 여섯째,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죽림리 당촌부락)에서 출생하여 소년기에 고부로 이거하였다는 설11)등이다.
  • 전주 태생설은 장봉선의〈정읍군지〉전봉준 실기 내용에 보면 전봉준은 전주 에서 태어나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나 근거가 희박 하고 김의환의〈전봉준 전기〉에는 뒷날 전주사람들이 그를 숭모하여 꾸며 낸 말이라고 한다.
  •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태생설은 자료에 의하면 전봉준이 18세(1872)에 이거하여 근20년 우거한 것으로 추산되며 마지막 이거한 사실 이외에는 분명치 못하고, 또한 신복룡교수의 새로운 주장에 의하면, 그 마지막 이거했다는 동곡리 지금실이 아니라 지금실과는 2km쯤 떨어져 있는 동곡리 원동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 정읍군 이평면 조소리 태생설은 전봉준이 살던 집이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1974년 해체보수공사를 할 때 1876(무인)년 2월 26일자의 상량문이 나타나게 되어 정읍사람들이 그렇게도 생가라고 우기던 이 집을 전봉준이 23살 때 지은 것이 확실해져 그동안 숱하게 미화되었던 이야기들을 일축해 버렸고 문화재 명칭도 생가에서 구거로 격하되고 말았다. 또한 1895년 2월 9일 일본 영사의 문초에 대한 전봉준의 대답을 기록한 재 판 기록인《전봉준 공초》중 일차 공초에 보면“너는 태인에서 살았는데 고부에 서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汝居生泰仁地 何故起亂古阜乎)”에 대해, “태인에서 살았지만 고부로 이사한지 몇 년 된다(居生泰仁移萬古阜 爲數年 矣)”고하였다. “그렇다면 고부에는 너의 집이 있는가(然則古阜有任(汝)宇乎”라고 묻자 “난리에 불에 타고 말았다(入於燒灰中矣)”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에 의하면 지금까지 문화재로 지정된 그 자체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과연 전봉준이 세가를 이루고 살던 구거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는 대목이 너무도 중첩되고 있는 실정이다. ‘數日賊李斗璜所追 窮 海南界地 盡無可走 斗璜與李圭泰及倭人合 舊擊大破之斬三萬六千余級.’ 이것은 전남 강진 땅에서 동학군 참패, 참살상을 예시한 것이다. 물론 과장 을 예상할 수는 있겠으나 한 고을에서의 참살이 36,000이라니 얼마나 혹독 한 보복인가. 이 처참한 보복 속에서 전봉준의 구거가 침해 없이 오늘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세상을 들쑤셔 놓은 동학 비적의 괴수집을 관가나 토호의 민병들이 과연 온 전하게 놔두었을까? 일본인 사학자 국지겸양(菊池謙讓) 일행도 1940년대 초에 정읍,고부 일대를 샅샅이 밟으며 동학란과 전봉준의 유적 사회를 찾아 다녔지만 전봉준의 태 생에 관한 구명 자료를 얻지 못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대로 보아 동학 혁명 당시의 가담자들이 능히 생존해 있을 때인 일제시대에 일본인 전문가 가 나서서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면 이상의 정읍 쪽 기록의 허구성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8.15 광복 이후에 슬그머 니 생가가 나타나고 일가가 나타나서 양손(養孫)이 정해지면서 역사의 테를 매놓은 것이다.
  • 덕천면 시목리 태생설은 그 신빙성을 신복룡 교수가 그의 저서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에서 언급하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정읍에서 알려진 문 장가로 동학혁명 때 활약하여 전봉준과 친숙한 사이였다는 옹택규(1852 ~ 1928)의 손자인 옹경원(1912년생, 정주시 광교리 172의 2)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옹경원이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분명히 시목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고, 그이 어렸을 때 ‘전봉준의 집에 차려진 서당에서 글 공부를 한 사실’을 들고 있는데,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신빙을 해야 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사정이다. 또 신교수도 그 후 「한때 거처한 곳으로 보고 출생지는 아니었다고 수정해 놓고 있다. 12)
  • 고부 진장문하 차복리 부근설은 {우윤의 전봉준 장군 출생지 정립}에서 내놓은 새로운 주장으로서 전봉준이 3살 때인 1857. 5. 16에 조부가 향년 68세에 타계하여 그 묘지가 고부 남부면 진장문하(鎭長門下) 차복리(次福里) 앞 갑묘용간(甲卯龍艮) 좌(坐) 유(酉) 파지(破地)이므로 고부에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리고 조부(碩豊)가 죽은 직후에 근친인 종형제 간들이 일제히 고창 당촌 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그의 기록을 이용해 보면

「《[병술보]에는 병호(丙鎬;봉준》윗대의 장지를 적고 있는데 이에 따라 거주한 곳을 추정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해서 묻힌 곳과 사는곳이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당 터라면 거리를 불문하고 장지로 삼았던 시대였던 만큼 양자사이의 관련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명당터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또 집안이 차츰 기울어지고 있는 무렵이라면 사는 곳 부근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전봉준의 조부가 고부군 남부면 진장문 아래 차복리 앞에 묻힌 것으로 보아 전봉준의 가족은 진장과 차복리 부근(사발 통문을 모의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로 들어가는 입석리의 진선 마을은 비롯한 부근 마을에 해당)에 살았다는 본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전봉준은 조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다.」13)

「아무튼 전봉준 집안은 조부가 돌아가자 어떤 이유에선지 전창혁의 종형제들이 고부를 떠나 (일부는 석풍의 죽음 전일수도 있음) 고창 덕정면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 전창혁 또한 아장아장 걷던 전봉준을 데리고 고창 당촌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14)

따라서 전봉준이 유년기일 때 고부를 떠나 당촌으로 옮겨 살았기에 유소년기의 흔적을 고부보다 당연히 고창 당촌에 더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마을 촌로들의 증언도 고창쪽이 훨씬 풍부하고 생생하다. 결국 두서너 살 때부터 살았던 고창 당촌이 고향과 출생지로 여겨졌을 것이고 전봉준도 이를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 그런 만큼 당촌은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유소년기를 보내며 친구들과 사귀고, 꿈을 키웠던 곳으로 전봉준의 생애에서 빠트릴 수 없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전봉준은 고부진장과 차복리 부근의 마을에서 출생하여 유년기에 고창 당촌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하고 당촌도 한 가정을 꾸릴 나이에는 떠나야 했다. 그 후 이곳저곳으로 옮겨 산 것이 확인되는데, 이런 까닭으로 출생지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내용을 놓고 검토해 보면 우윤씨의 추정을 통한 조심스런 주장은 1886년에 발행된 [병술보]만의 검토로는 매우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 때는 전봉준의 집안이 이미 고창파를 마감하고, 고부로 이거한 이 후가 되어 고부파로서 새로운 출발이 시도되고 있던 31세의 무르익은 때라서 조부의 묘소가 진장문하 차복리 앞에 써 있다는 이 사살만으로도 우윤씨가 전개해온 과정으로 볼 때 그럴싸한 추정론이 나올 수 있겠지만 필자기 앞 장에서도 이미 지적하였듯이 전봉준 장군이 살아 있을 때 발행된 족보는 우윤씨가 지적한대로 [병술보]가 유일본이 아니라 그 보다 24년전인 [임술보]가 있었던 것은 우윤씨가 발표한 [천안전씨 족보 편찬 일람표]에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음을 명심해 두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만의 하나 [임술보]의 기록을 우윤씨가 검토조차 외면하였다면 이는 상식 밖의 일로서 큰 실수가 되었거나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이밖에도 정읍쪽의 출생과 이거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상기박사는〈동학과 동학란〉의 초판본에서는 양교리 태생설을 내놓았다가 1975년의 재판본에서 이평면 조소리 출생설로 바뀌었는데 이는 1950년대에 정읍유지들의 모임체에서 중앙에서 교과서에 등재하기 위해 조회가 왔을 때 중론으로 모아진 조소리설을 따랐었노라고 뒷날 찾아간 필자에게 김박사가 실토한 내용이다. 장봉선은「전봉준실기」에서 감곡면 계룡리(감산면 계봉리)에서 이평면(궁동면)양교리(양간다리)로 이거하였다고 했다. 또 최현식은 「전봉준이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전주 구미리로 이거했다고 적어놓고 있다.」15)

최현식은 또한 태인 감산면에서 지금실로 18세때쯤 이주해온 것으로 종래의 설을 수정하고 있다.16)

고창읍 죽림리 당촌 태생설은 다른곳의 주장과는 달리 우선 기록면에서 확실한 것을 엿볼수가 있다. 오지영이 지은《동학사 p168》에서 ‘전봉준은 전라도 고창현 덕정면(본래 오동면인데, 면사무소가 덕정리에 있어 일명 덕정면이라고도 불리웠음) 당촌 태생으로, 세대 사림가 사람으로 자라서 고부 양교리와 전주 구미리며 태인동 구천 등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유랑생활을 하였다’17)고 기록하고 있다. 인근의 고로들 증언도 갑오년 난리 때 이 곳에서 농민군 두목들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안다고 하였고, 1960년대에 고창 기로사에 출입하는 고로들은 전원일치로 당촌 출신임을 강조한바 있다. 정읍에서 갑오동학명사를 쓴 최혁식도 당촌 태생설을 정설로 받아드리고 있다.18)

※ 전봉준의 출생지나 주소가 분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전봉준의 아버지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여러 곳을 이사 다녔는데 특히〈비기〉를 믿어 천하의 명당을 찾아 한때나마 자리잡고 살기를 좋아했던 것으로 모든 기록들이 귀결해 주고 있다.

※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선대 묘소지에서도 음택 명당지를 찾아다닌 흔적을 엿볼 수 있다. 5대조(태인 고현면), 고조(남원 북면), 증조(순창 하치동), 조고(임실 강진면), 백부(임실 강진면), 종형(고창 덕정면), 제(고창 덕정면), 당숙(정읍 서이면), 재종제(정읍 서이면), 재종(고창 덕정면), 당질(고창 덕정면).

※ 오지영은 본래 고창 출신이었는데 익산으로 이거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는 고창과 전봉준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고 또한 기록할 수 있는 분이다. 그가 지은《동학사》에 새로 밝혀진 초고본의 서문을 보면 1924년에 완성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정세 때문에 뒷날 출간(1940)되었지만 동학혁명에 직접 가담자가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생생하게 써낸 유일한 책이다. 그는 자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양호도찰로서 전라,충청 양 도 사이에서 접(동학의 전도인.수도인 사이에 이루어진 연원을 기반으로 한 조직으로서 지역 조직이 아님)과 접 사이의 일과 도인과 도인 사이의 일을 총찰하다가 공주 싸움에 패한 후 익산,전주 사이의 군을 다 해산하고 서해안으로 피신하여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와 잠시동안 양주 묘숙암에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던 중 마침내 천도교 교역자가 됨.’19) 또한 ‘동학혁명이 반봉건적 운동에서 반침략적 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한 동학군의 2차 구월기포때 오지영은 익산에서 오경도,고제정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고 돼 있다.20)

선비의식이 투철한 오지영의 가계는 항상 의를 숭상하는 고창인의 기질이 이어오고 있어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났던 백산봉기때 고창현에서 1,5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나선 주모자 오하영,오시영도 또한 그의 집안이었다고 한다.

6) 張奉善「全琫準 實記」「井邑郡誌」(1936) p381 金義煥「全琫準 ?記」(서울 正音社 1974) p41
7)崔玄植「甲午東學革命史」(정읍 : 향토문화사, 1983) p230
8) 金庠其「東學과 東學亂」(서울 : 大成?版杜 1947) p78
9) 申福龍「全琫準의 生涯와 思想」(서울 養英閣 1982) p36
10)우윤 앞의 글 p19
11)1 吳知泳「東學史」(서울 民?社1975) p168
12)申福龍「全琫準評傳」(지식산업사 1996) pp56~57
13)우윤, 앞의 글 p18. 여기에서 우윤은 추론적인 의미로 전봉준의 태생지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 고부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4)우윤, 앞의 글 p19. 여기에서도 우윤은 전봉준이 유년기에 고부에서 고창 당촌으로 이거한 것으로 임의 주장을 하고 있다.
15)崔玄植,「甲午東學革命史」(정읍 향토문화사 1983) p230
16)崔玄植, 앞의 책 pp230~231
17)吳知泳,「東學史」(서울 : 영창서관 1973) p161
18)崔玄植, 앞의 책 pp230~231
19)吳知泳. 앞의 책 p178
20)「天道敎百年史」(천도교 1981)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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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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