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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1855. 12. 3일 (양 1856.1.10)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장군이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번지 (고창현 산내면 죽 림리 당촌)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868년 전주로 이거 후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황새마을,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 궁동면 장내리 조소마을 등에 살았다. 1894년 고부민란과 무장기포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선도한 전봉준은 우리고장이 낳은 위대한 민주주의 밑거름이 된 인물이다.

1892. 8월

손화중포는 선운사 동불암의 마애석불에 들어있던 비결 책을 탈취하였다. 당시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그 나라가 망할 것이오. 망한 후에 다시 흥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여러 인물들과 사건, 그리고 일련의 설화까지 여러 형태로 결합되어 일어났다. 그중에 한 가지 동학농민혁명 초기에 일어났던 선운사 도솔암의 미륵비결 설화이다.

지금 고창군(당시 무장현) 아산면 선운사 동남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고, 그 암자 뒤에 50여 척 높이의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미륵상은 3천 년 전에 살았던 검단선사 진상이란 것으로 그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비결과 함께 벼락살을 동봉해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려고 손을 대면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그 벼락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지금(당시)부터 130년 전에 전라감사로 내려왔던 이서구가 그것을 꺼냈을 때 벼락이 쳤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전라감사로 도임한 이서구는 어느날 선화당에 앉아 조용히 천지의 망기(나타나 있는 기운을 보고 무슨 조짐을 알아냄)을 보고 있자니, 서남쪽에서 매우 상서로운 기운이 한줄기 뻗쳐올라가고 있는지라,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을 몰라 그쪽으로 달려가 보니, 그것이 선운사 미륵의 배꼽에서 뻗어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이 들었기에 이러는가, 그 배꼽을 쪼아보니, 그 속에서 책이 한권 나왔는데, 그 순간 뇌성벽력이 하늘을 찢는 바람에 혼비백산, 그 책을 도로 거기 넣어놓고 석회로 봉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 이서구가 본 것은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란 글자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세상 사람들은 그 비결을 꺼내보고 싶어도 벼락을 무서워 꺼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결탈취 사건

임진년 8월 사이의 일이다. 어느날 손화중의 집에서는 선운사 석불 비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을 내어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벽력이 또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좌중에 오하영이라고 하는 도인이 말하되, 그 비결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으면, 벽력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중대한 것을 봉해서 둘 때에는 벽락살이란 것을 넣어 택일하여 봉하면 후대인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열어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서구가 열어볼 때에 이미 벽력이 일어나 없어졌는지라 어떠한 벼락이 또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는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나니 여러분은 그것은 염려 말고 다만 열어볼 준비만을 하는 것이 좋다. 여는 책임은 내가 맡아 하겠다고 하였다. 좌중에서는 그 말이 가장 이치에 합당하다 하여, 청죽 수백 개와 새끼 수십 타래를 구하여 부계를 만들어 그 석불의 전면에 인치하고,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그 절 스님들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부터 수십 명의 스님들을 결박하여 두었는데, 그 일이 끝나자 스님들이 무장관청에 고발하였다. 전날 밤에 동학군들이 스님들을 결박하고 석불을 깨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백 명이 잡히었는데, 그중 괴수로 강경중, 오지영, 고영숙 세 사람이 지목되었다.

무장현감은 여러 날을 두고 취조하게 되었는데, 첫 문제가 비결 책을 바치라는 것이요, 손화중과 기타 주모자 두령들이 있는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갖은 악형을 다하면서 묻는다. 태장질이며, 곤장질이며, 형장 질이며, 주뢰질이며, 볼기가 다 헤지고 앞정강이가 부러졌다. 그러나 소위 비결이라는 것은 손화중이 가지고 가고 말았으며, 여러 두령들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여, 십 수 일 동안 형벌을 받다가 관이 취조한 것을 전라감사에게 보고하여, 강경중, 오지영, 고영숙 3인은 모두 강도 겸 역적죄로 몰려 사형에 언도되었고, 남은 백 여 명은 엄한 곤장을 맞은 후 풀려나왔다.

그날 저녁 옥졸이 들어오면서 죄수 3인의 결박한 것을 모두 벗기더니, 모두 의관을 갖추어 나가자고 한다. 그 전에 만일 들은 말이 없었다면 사형이나 집행하자는 일이 아닌가 하고 걱정될 것이나, 대략 기미를 알고 있었던 터라 그다지 놀랄 것은 없었다. 옥문 밖으로 썩 나서다 보니 수천 명의 사람들이 혹은 등불을 들고 혹은 횃불을 들고 관문대로에 좌우로 갈라서서 앞길을 인도한다.

오리정 밖에 나와 한 도인의 집에 자리를 정하고 앉게 되었는데, 우리 형님 두 분과 각 두령이며, 촌에 있는 도인들이며, 읍에 있는 도인들이 차례차례 나와 그 동안 고생한 일을 다 말한 후에,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물은즉, 형님은 말씀하되, 들은즉 무장현감 조경호가 무엇보다도 비결을 찾는다 하기로, 스님들과 의논하여 불경책 한 권을 붉은 보자기에 싸가지고, 수천 명이 떠들고 들어오며 예리하게 통지하여, 무장현감에게 사모관복을 입고 잘 맞아들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 고을 오리정에 당도하니, 무장읍에서는 장리 되는 몇 사람이 관에 아뢰 기를 동학군 수천 명이 고을을 함락하고 관리들을 죽인다고 말을 하였다 한다.
그 뒤로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접주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 동학의 현장을 문화재로 지정하자 중에서 (사) 우리땅 걷기 이사장 신정일

1894. 3. 20 (양 4.25)

고부민란을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키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전봉준은 부하 50여 명만 거느리고 무장으로 내려와 손화중을 설득하여 농민군을 모아 전면적인 봉기를 단행 하였다.

무장에서 동학농민군이 『무장창의포고문』을 발포하였다.

  • 오하기문 총서 1, 54쪽
  • 신용하 『갑오농민전쟁의 제1차 농민전쟁』, 『한국학보』29, 1985, 117-118쪽
    이때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약 4천여 명이었다.
  • 동학관련 판결 선고서 총서 18, 431쪽

동학농민군은 기포와 동시에 기포의 목표와 행동지침을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 1. 불살생(不殺生) 불살물(不殺物)
  • 2. 충효총전(忠孝叢全) 제세안민(濟世安民)
  • 3. 축멸양왜(逐滅洋倭) 징청성도(澄淸聖道)
  • 4. 구병입경(驅兵入京) 멸진권탐(滅盡權貪)
    사대명의를 발표하였다.

대한 계년사 총서 4, 363쪽 시사신보 총서 22, 292-293쪽, 295쪽 * 대한계년사에는 4대 명의가 3월 25일에 내걸린 것으로 나와 있으나, 장소에 대해 서는 언급이 없다. 또 내용의 전후관계를 살펴볼 때 이용태의 만행으로 전봉준이 5,6 만 명의 동학농민군을 불러 모아 봉기하였고 이때 4대 명의를 내걸었다고 하여 동학농민군이 처음에 일어날 때, 즉 무장 기포시에 '4대 명의'를 내건 것으로 말하고 있다. 「시사신보」에도 동학농민군이 거병 당시에 내건 것으로 되어 있다. (배항섭, 「제1차 동학농민전쟁시기 동학농민군의 진격로와 활동 양상」『동학연구』11, 2002).

무장의 부민들에게서 군량을 징수한 뒤 '보국안민창의'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고부로 향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진격로를 요약하면 무장(3.20) - 고창. 흥덕(3.21-22일) - 고부(3.23) - 태인(3.26) - 금구.원평(4.1) - 부안(4.4) - 고부(4.6) - 정읍. 흥덕. 고창(4.7) - 흥덕, 무장(4.8) - 영광.함평.장성(4.11-21일) - 금구.원평(4.25) - 전주 (4.27)의 순으로 확대되었다.

1894. 3. 27 (양력 5.2)

전봉준이 무장에 도소를 설치하고 동학농민혁명의 봉기를 밝혀주는 관군의 보고서 수록에 의하면 3월 27일 접수된 무장현감 조명호의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달 3월 16일에는 농민군 수천 명이 무장 동음치면 당산(공음면 구수)에 집결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10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3월 16일부터 3월 18일에 걸쳐 사방에서 몰려와 1,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가운데 수백 명이 법성포 진량면 황현리 대나무 밭에서 죽창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민가에서 조총과 괭이, 호미. 낫. 가래 따위를 탈취해갔다. 이어 이들은 그 동안 동학에 반대하고 탄압 하였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구타하였다. 이웃마을 석교촌에 사는 미곡상 안덕필의 집을 습격하여 다른 사람이 맡겨놓은 백미 60석을 빼앗고 그 집을 파괴하였다. 또한 같은 마을 송경수의 집 역시 파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접한 각 면이 시끄러워지고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의 소행이 참으로 해괴하나 양민과 어울려 있으므로 강력한 수단으로 금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 이속과 고을의 덕망가를 보내어 이치를 다져 가며 타이르고 한편으로는 공문을 보내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그 무리들 당장의 기세가 장차 수천 명에 이르니 관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말로는 일간 다른 지역으로 옮기겠다하고, 또 그 도당이 보내온 서면에도 역시 불일간 이 고을을 떠나겠다하오나 매우 수상한 무리들인지라 그 참뜻을 알 길이 없는고로 다시 이속으로 하여금 은밀히 염탐한 즉 대오를 짜기도 하고 다시 흩어지기도 하며 차차 장비를 정리하는 기색도 보이나 어느 곳을 향할지는 탐지하기 어렵다. 알아낸 바가 이와 같으므로 우선 확인된 정보를 위와 같이 보고한다.』

1894. 3. 21 (양 4.26)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이 20일과 21일에 걸쳐 고창으로 이동, 21일은 고창에서 숙영하였다.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포한 다음 적어도 그 가운데 일부는 곧바로 고창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줄포에 있던 일본인 파계생이 쓴 「고부 민요일기」에 따르면 흥덕의 장사꾼들의 말에 의거하여 3월 20일 수만 명의 동학 농민군이 무장의 굴치를 넘어 덕흥리를 지나갔으며, 다음 날은 고창에 모였다가 점차 서진하여 일부는 정읍으로 일부는 고부로 들어가고 일부는 사포를 지나 줄포로 왔다 고 하였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동학농민군이 흥덕에 들어 간 것은 3월 22일이었고, 고창 쪽에서 이동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20일과 21일에 걸쳐 고창으로 이동한 다음 고창에서 하루를 숙영하고 22일 흥덕으로 이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에 들어올 때 동학농민군들은 '구폐교정절목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해산하였으나, 잡으려고만 하니 무슨 마음에서인가? 장차 전주로 가서 감영과 안핵사에게 그 이유를 묻고자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창에 머물던 동학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3월 21일부터 정읍,고부 방향으로, 일부는 사포를 지나 줄포 방향으로 갔다.

1894. 3. 22 (양. 4.27)

고창에서 숙영한 동학농민군이 흥덕으로 향하여 이날 정오 무렵 동학농민군은 말을 타거나 걸어서 깃발을 들고 나팔을 불며, 북을 두드리고 총을 쏘아대며 흥덕 사후포로 들어갔다.

1894. 3. 23 (양. 4. 28)

흥덕에서 하루를 머문 동학농민군은 이날 부안 줄포로 향하였고, 오전 10시경 머리에 황색 두건을 쓴 십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미리 줄포에 들어와 점심 3천 5백상을 준비 하도록 요구하였으며, 점심때쯤 줄포 사정으로 동학농민군 수천여 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오후 6시쯤 고부로 향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청홍백황색의 깃발을 상하로 흔들고 좌우로 받치거나 혹은 급하게 혹은 느리게 흔들며 부대를 지휘하였다. 동학농민군의 무기로는 죽창, 활, 화살, 창이 있었고 은 구제의 화승총이었다. 동학농민군을 이끄는 도장은 아직 정졸에도 이르지 못하는 장부라는 소문이 돌았고, 동학농민군은 고부로 출발하기에 앞서 폐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격문을 사방에 부착하였으며, 그 요체는 '이 태조의 혁신정치로 돌아가면 그친다.' 는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의 깃발에는 '인의예지신'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혹은 순천, 광주 등의 지역명이 쓰여 있었다. - 저녁 8시경에는 기병 20여 명을 포함하여 총창 등으로 무장한 3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고부에 들어왔다. 이들은 향교와 관아 건물에 분산하여 주둔해 있으면서 저녁은 읍내의 민가에 나누어 해결하였다.

1894. 3. 26 - 3. 29 (양. 5.1 - 5. 3)

백산의 동학농민군은 3월 26일 저녁에서 3월 29일 오후 2시 사이에 이른바 '백산대회'를 통해 진용을 새로 갖추었다. 백산대회를 통해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 정백현을 선정하였다. 백산대회 당시 대장기에는 보국안민이라고 크게 써넣었고, 두 번째로 격문을 써서 사방에 전하였다. 백산에 설진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태인현으로 서찰 한통을 보내 포수와 창수 각1백명을 거느리고 북과 나팔, 징과 바라를 일제히 울리며 기다릴 것을 요구하였으며, 서찰 말미에는 “제중의소”라고 서명하였다. 이날 저녁 6-7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태인읍으로 들어가 곧장 동헌과 내아를 공격하 여 군기를 탈취하고 관정에 공형들을 결박하여 둔 채 하루를 머물렀다가 다음 날 금 구를 향해 출발하였다.

1894. 4. 6 (영. 5. 10)

부안에 있던 동학농민군은 4월 6일 아침 8시경부터 부안을 빠져나오기 시작하여 고부의 도교산으로 향하였고, 감영에서는 병정과 별초군 보부상을 도교산으로 파견하였으며, 동학농민군과 이들은 황토산에서 맞닥뜨려 오후 4시경부터 접전이 시작되었다. 태인에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들도 4월 6일 밤 8시경에는 고부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였으며, 다음날인 4월 7일 새벽 4시경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감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894. 4. 7 (양. 5.11)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군과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오후 2시경 정읍의 연지원과 모천변에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은 이날 8시경 읍내로 들어가 정읍관아를 공격하여 옥문을 파괴하고 수감되어 있던 동학교도 6명을 풀어주었으며 무기고를 파괴하여 기계와 창검 등의 무기를 탈취한 다음 공형과 이속, 도사령의 가산을 파괴하고 보부상의 주접 처 3집을 불태웠다. 이들은 저녁을 먹은 다음 밤 10시경 고부 삼거리로 가서 숙영 하였다.

1894. 4. 8 (양. 5.12)

오전 10시경에 동학농민군은 고부군 신점 쪽에서 흥덕으로 진격하여 민가에 요구하여 점심을 제공받아 먹은 다음 ??모군을 한 것이 무엇 때문인가. 반드시 실상을 조사할 것이다.??라고 하며 군기고를 부수고 환약과 창검, 조총 등을 탈취한 후 오후 2시경에 고창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경에는 정읍 방향으로부터 각기 20여 명과 40여 명으로 구성된 동학농민 군이 차례로 흥덕 이동면 율현 대로와 일남면 구산 앞 대로를 거쳐 곧장 고창으로 향해 갔다. 밤 8시경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흥덕 으로부터 고창에 들어와 곧장 관아를 공격하여 옥문을 부수고 체포되어 있던 동학농민군 7명을 석방하고 대정현감을 지낸 읍내 은수룡의 집(고창읍성 화장실 옆 향군회관터)을 공격하여 가산을 파괴 하고 방화하였으며, 이어 성안으로 들어와 군기고를 탈취하고 호적 등 장적을 거두어 조사하였고, 동헌 및 각 공사를 파괴하고 현감이 가진 인부를 탈취하려 하자 현감 김사준은 도주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날 밤 고창에서 숙영하였다.

※ 이때 고창에 들어간 동학농민군은 은대정 집뿐만 아니라 부내에 방화하여 내쫓긴 수가 1만 8천여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창현에서 동학농민군 7명이 체포되었다.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충청병사 이용복에게 감결을 보내 충청도는 동학 도당의 소굴이라 하면서 철저히 그 정황을 탐지하여 감결이 도착한 후 3일 안에 전주부로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다.

군함이 무사히 도착하였다. 동학농민군 백여 명을 포로로 잡아 진영에 가두었다. 고부 도교 전투에서 전주 감영군 7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동학농민군이 회덕의 백사장에 있다고 하여 충청도 감영으로부터 회덕에 포군을 동원하여 보냈다. 중국 군함의 함장 이화가 전주에 이르러 적정을 정탐한 뒤에 형세를 보아 육지에 내리기로 서로 약속 하였다. 회덕의 동학농민군이 관아에 돌입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진잠으로 향하자 금영 에서, 군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홍계훈이 53주에 감결을 보내 동학농민군을 잡아들이고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지시 하였다.

1894. 4. 9 (양. 5. 13)

고창에서 하루 밤을 머문 동학농민군은 12시쯤 고창을 떠나 무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4시경 무장으로 들어갔다. 이때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체포되어 있던 동학농민군 40여 명을 풀어주었고, 동헌과 공사를 파괴하였으며, 군기고를 파괴하여 화약 등 무기를 탈취하였다. 또한 성내외의 인가를 불태웠다. 이어 도망간 이서들을 수배하는 한편, 아전과 군교 10여 명을 죽였고 주변을 둘러싸는 성을 만드는 한편 무장 관아에서 10리쯤 떨어진 호산봉에 설진하여 3일을 머물렀 다. 초토사 홍계훈의 추격에 대비하여 진을 치고 기다렸으나 경군들이 미리알고 진로를 바꾸어 장성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4월 12일 농민군을 둘로 나누어 선발진은 법성포로 진격하고 주력부대는 영광으로 들어가 전곡과 마필을 징발하고 군량을 확보하고 4일 동안 머문 뒤 관군의 진로를 위회하기 위해 17일에는 함평 무안으로 남하했다가 나주로 좌회하여 평정한 후 4월 23일 입수된 첩보를 쫓아 장성 황룡천 접전을 통해 경군을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정읍, 태인, 원평, 금구를 거처 4월 27일 전주에 입성하였다.
무장현에서는 3월 20일 동학농민군이 무장을 떠나간 이후 4월 9일 체포한 29명을 포함하여 4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체포되어 있다가, 4월 9일 다시 무장을 점거한 동학농민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894. 4. 10 (양. 5. 14)

무장의 동학농민군이 관아에 난입하여 이교 가운데 체포되어 피살된 자가 10여 명에 이르고 각 촌락과 도로변에 체포되어 피살된 자가 수십 명이었다. 또한 군기와 집물 화약 등을 남김없이 탈취해갔으며, 각종 문부와 문적들을 불태웠다.

1894. 4. 11 (양. 5. 15)

무장에서 9명의 동학농민군이 체포되었다.

1894. 4. 11 전라감영의 보고 (취어)

지금 흥덕의 겸관이 보고한 것을 보니 저 무리가 다시 그저께 읍안에 곧바로 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였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고창으로 곧바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고창 아전의 문서 내용을 들어 보니 “그저께 술시(오후 7-9시)에 동도 수천 명이 흥 덕에서부터 본 읍에 곧바로 들어왔고, 옥을 부수어 갇혀있던 동학무리 7명을 석방해 내보냈으며, 곧 동부로 향하여 은대정(고창출신으로 제주의 대정현감을 지낸 은수룡 을 말함)의 집을 부수고 재산을 빼앗아 불을 질렀으며, 무기를 탈취하고 각종 공문서를 수색하고 도장을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본래의 수령은 어렵게 피하여 어제 무장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고 합니다. 휴가를 얻어 부임하지않은 도내에 있는 수령을 재촉하여 내려 보낼 일입니다.

1894. 4. 11 오후 5-7시 전라감영의 전보(취어)

지금 무장에서 초 10일 보고한 것을 보니 해당수령이 부임할 때에 유향소에서 올린글에 “감영의 지시에 군사를 모집하여 출동시켜 동도44명을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초9일 사시에 동도 1만여 명이 혹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각각 총과 창을 휴대하여 동 헌과 각관청에 곧바로 들어가 한결같이 모두 허물고 깨뜨렸으며 붙잡혀 갇힌 동학무 리를 풀어주고 읍 안의 민가에 불을 질렀는데 본관의 수령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들 무리가 간 방향이 어느 곳인지 불같이 빨리 보고하도록 지시문을 보냈는데, 저 무리를 붙잡아 가둔 곳을 매번 이와 같이 독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흉 악한 마음을 알아보니, 더욱 분하고 한탄스러움이 극에 달합니다.

1894. 4. 13 (양. 5. 17)

13일과 14일 양일 밤에 혹은 6-70명, 혹은 4-50명이 각자 총과 창검을 들고 부안, 흥덕, 고부, 정읍 등지로 흩어져 가는 것이 관군 측이 보낸 탐리에 의해 목격되었으나, 무슨 이유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894. 4. 16 (양. 5. 20)

동학농민군은 무장에서 봉기한 이후 최초로 자신들이 봉기한 목적이 '탐관오리로 하여금 허물을 고쳐 스스로 혁신하게 하는 이로가 국태공으로 하여금 감국하게 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부자간의 천륜과 군신 간의 대의를 온전히 하여 난신적자를 없애는 데 있음'을 밝히는 통문을 창의소의 명의로 전주에 있던 초토사 홍계훈의 완영유진소 앞으로 보냈다.

1894. 4. 20 (양. 5. 24)

홍계훈이 공사청에, 정읍으로부터 행군하여 오시 경에 흥덕을 거쳐 다시 고창에 도착 하였고 내일 영광으로 향하여 곧바로 함평에 들어갈 계획을 보고하였다.

1894. 4. 21 (양. 5. 25)

함평 무안 일대에서 5일 간이나 주둔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경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평을 떠나 4월 21일 오전 8시경에 장성 월평리에 도착한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아침을 먹고 삼봉 아래 있는 황룡촌에 진을 쳤다. 초토사 일생이 고창으로부터 장성에 들어와 점심을 먹고 영광으로 떠났다. 홍계훈이 전주로부터 행군하여 고창에 이르렀고 동학농민군이 모인 곳으로 향할 계획 을 보고하였다.

1894. 4. 22 (양. 5. 26)

홍계훈이 고창 현감에게 전령을 보내 이춘경이 몰래 동학농민군과 통하여 기밀을 전하였고, 서재성, 이동술은 동학농민군으로 우리의 기밀을 보냈다. 3명을 격식을 갖추어 옥에 가두라고 지시하였다.

1894. 5. 8 (양. 6. 11)

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일부는 김제, 부안, 고부, 무장 등지로 향하여 가고 일부는 금구, 태인 등지로 향하여 갔으며, 지녔던 창과 칼 등 병기의 일부는 혹 태인현에 반납하고 일부는 혹 지나는 각 점에 맡겨 두었다. 동학농민군은 4로 나누어 남향하였는데, 2천명 가량이 흥덕을 경유하여 무장지방으로 갔다.

1894. 5. 8 (양. 6. 11)

초토사 홍계훈은 드디어 동학농민군 측의 폐정개혁 요구를 국왕에게 보고하기로 약속 하였다. 이에 따라 오전에 전주성의 동학농민군은 초토사에게 “귀화하는 오늘 그엄한 명령으로 신원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그 원한을 호소하자 그민원이 폐하에게까지 알려져 이 세상 영원하도록 그 덕망을 칭송하게 된 것은 오직 각하의 처분에 있었으므로, 즉시 문을 나서서 명백히 밝혀주시기를 기다리고 병기는 하교에 의하여 모두 거두어 올리겠습니다.”라는 글을 보내고 전주성에서 빠져나갔다. 이때 동학농민군 대다수는 병기를 반납하겠다고 초토사 홍계훈에게 약속한 것과 달리 병기를 가지고 나왔다.

*“초토사는 곧 격문을 성중에 투입하여 봉준 등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어 그 목적을 달성하게 하겠으니 속히 도당들을 해산하라는 뜻을 유달 하였다. 그러나 봉준 등은 곧 전운소 혁파사 등 27개조를 내여 가지고 상주하기를 청하였더니 초토사가 즉시 승낙한 고로”라는 「판결문」의 내용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일부는 김제, 부안, 고부, 무장 등지로 향하여 가고 일부는 금구, 태인 등지로 향하여 갔으며, 지녔던 창과 칼 등 병기의 일부는 혹 태인 현에 반납하고 일부는 혹 지나는 각 점에 맡겨 두었다. 동학농민군은 4로로 나누어 남향하였는데, 2천 명가량이 흥덕을 경유하여 무장으로 갔다. 무장으로 간 동학농민군들이 민가를 토색하고, 전주 구미동의 부자집도 습격하였다.

1894. 5. 11 (양. 6. 14)

동학농민군은 5백여 명이 고부 흥덕리에서 유숙하고 11일 묘시경 60여 명은 고창 으로, 나머지는 모두 무장으로 향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은 지나가는 연로에서 식상을 분장하고 짚신을 토색하였다.

1894. 6. 29(양. 7. 31)

무장 동학농민군 5-6백 명은 일본병이 장차 이를 것이라 하면서 성중 난입, 무기를 탈취하였다.

1894. 12. 11(양. 1. 6)

고창으로 잠입한 손화중이 10여일 후인 12월 11일 고창 부안면 수강산 산당에 피신해 있다가 사민 이봉우등에게 체포되어 고창현에 갇혀 있다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1895. 3. 29(양. 4. 23)

오후 3시, 전봉준 등 21명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에 대한 최종 판결이 있었다. 이때 전봉준, 성두한, 최경선, 손화중, 김덕명 등에게 『대전회통』형전의 「군복기마작변 관문자 부대시참율」에 의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 사형선고를 받고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일본신문 시사신보에 의해 30일 새벽 2시 교형으로 집행된 사실이 밝혀졌다.

* 갑오정권은 근대적 사법제도에 의해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실제 근대적 사법제도는 이미 3월 25일부로 공포되어 있었고, 이제 4월 1일부로 시행될 것이었다. 1895년 3월 25일 법률 1호로 반포된 '재판소구성법'과 같은 날 칙령 50 호로 반포된 '재판소처무규정통칙'에 의하면, 민사형사사건 모두 적어도 2심의 재판과 소송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시행일인 4월 1일을 이틀 앞둔 3월 29일에 개설된 법무아문 권설 재판소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판결이 시급하게 선고된 것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형법이 제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봉건적인 형법인 『대전회통』형전의 규정을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들은 근대적 재판제도의 시행과정에서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장받지 못했다.

전봉준이 사형선고를 받고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과 함께 사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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