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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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창지역에서 농민군 봉기가 이루어졌던 전통적 배경을 살펴보면,

고창지방은 산이 있고 강이 있어 비옥한 평야가 조성 된데다 금상첨화로 칠산어장이 있는 서해바다를 끼고 있어 천혜조건이 좋은 고장으로서, 고려시대에는 국가 유공자들에게 베풀던 사패지(賜牌地)의 명지(名地)가 되어 이른바 명문가의 후예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고창은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의식이 투철했던 고려 유민들이 모여 사는 고장으로 알려지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택받은 백성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사로(仕路)를 등진 채 전원생활을 즐기는 뜻있는 선비들의 요람으로 국란에 이르면 충의를 앞세워 목숨을 바치는 의절을 지켜 의향을 정립하였고, 농한기에는 학문을 닦으면서 예와 악을 즐기게 되어 판소리의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작인들을 즐겁게 고무 격려하는 마당놀이가 성행하여 풍물굿의 원조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민중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격조 높은 선비 고을인지라 그 밑의 서민층들도 상전들의 든든한 배경과 전통적인 우월의식이 더불어 팽배하게 배이게 되어 이른바 깡치 있는 민중의식이 여물어서 무장(茂長)은 일찍부터 아전자랑의 고을로 알려지게 되어 부임하는 수령들이 골치를 앓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인ㆍ천인들까지도 뼈대를 추리는 입장인데다 불의와 타협이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는 선비 기품의 영향을 받아 야당적 기질이 지금까지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18세기의 극도의 정치적 부패 상황에 좌시 묵과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이에 대처하는 민중의 싹이 터 오르게 되었다. 여기에다 꿈틀거리는 민중의식에 불을 붙이고 구슬을 꿰어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우순풍조를 맞게 되었다.

무장 고을에는 천안 전씨 문효공 신(信)의 손자 덕린(德隣, 고려 우왕 10(1384년),천안에서 출생)이 고려 유민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무장 장사산 남쪽 정동(井洞)에 낙향하여 20대를 세거하면서, 공음면 신대(新垈), 구정(九井)등에 100여 세대가 살았는데, 고창 당촌에서 13세 때까지 살다 떠난 전봉준이 가난하지만 뜻이 깊은 선비로 성장하여 그 뜻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민중의식이 투철한 무장 사람들의 기질을 찾아들게 된 것이다.

손화중 접주와 연계 되면서 전봉준이 찾은 곳은 비밀이 보장되고 숙식이 해결되는 1등 보호 은닉처인 구정동 문효(柏軒)공파 일가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동학교도와 젊은 일가 그리고 고창 당촌에 살 때 그의 아버지(全暢爀)가 훈장으로 있었던 서당촌 친구들을 중심으로 해서 모집할 수 있었던 의기 넘친 청장년들의 규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민중의식이 강한 사람을 모은 전봉준은 그의 활동 본거지인 구정마을 뒷산(九笛山)너머 골짜기에서 농한기에 은밀하게 농민혁명군을 양성할 수 있었던 여건 조성의 성숙된 배경이 있었음을 향토 사료와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엮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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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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