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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정읍

사발통문 작성지

동학혁명모의장소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이두형 家)
1892년 4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했던 조병갑은 온갖 수탈과 학정을 자행하였다. 이에 전봉준 등 20명은 1893년 11월 당시 송두호의 집에 모여,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이 회합에서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죽이며,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며,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에게 탐학한 벼슬아치를 응징하며,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 사발통문은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조직적 봉기를 계획하고 행동목표를 밝힌 문서라는 의미를 갖는다.

동학혁명 모의탑

동학혁명 모의탑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마을입구 왼쪽 언덕에 사발통문 거사계획 참여자 후손들이 1969년에 건립하였다.

무명농민군 위령탑

무명농민군 위령탑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대뫼녹두회관 앞
무명농민군 위령탑은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1994년 건립하였다.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안에 5m크기의 주탑과 이를 둘러싼 1~2m크기의 보조탑 32개가 있다. 보조탑은 각각 무명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과 무기로 사용되었던 농기구 등을 새겨놓았다.

고부관아터

고부관아 터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현 고부초등학교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봉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개 면을 관장하는 군에서 일개 면소재지로 몰락하였다.

군자정 (전북유형문화재 133호)

군자정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65
자정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악명 높았던 고부군수 조병갑 등이 고부군민에게 탐학을 일삼는 한편 풍류와 사치를 일삼았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주재소, 일본인 소학교, 활터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에는 개인소유로 되었다.

말목장터와 감나무

말목장터와 감나무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말목장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명이 고부로 가기 전에 모였던 곳으로 제1차 백산기포를 할 때까지 장두청을 두고 진을 설치했던 장소이다. 또한 이곳에는 180년 정도 된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 아래에서 말목장터에 모여든 농민들에게 전봉준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농민 수탈의 실정을 알리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전한다. 이 감나무는 현재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서 보관중이다.

만석보유지비

만석보 유지비

정읍시 이평면 하승리
배들평 농민은 정읍천 아래에 보(예동보)를 막아 물을 댔다. 이 보는 가뭄이 들어도 풍년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만석보라 하였다. 그러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롭게 보를 쌓았다. 이 때문에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이 피해를 입었다. 예동마을 뿐만 아니라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징수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두말, 나쁜 논에는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은 봉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만석보는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虐政 : 가혹한정치)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산봉기지

백산봉기지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한 뒤, 백산으로 이동하였다. 백산은 해발 47m에 불과하지만, 부안, 김제, 고부, 태인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배들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김개남, 손화중, 영솔장 최경선, 총참모 김덕명, 오시영, 비서 송희옥, 정백현 등으로 진영을 확대개편하고 연합부대를 구성하는 한편,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고 농민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황토현 전투지

황토현 전투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은 해발 35m의 낮은 구릉으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승산과 사시봉이 솟아있다.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백산에서 군대를 확대개편 한 뒤, 전주성을 향하여 태인, 금구방향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전라감영에서는 무남영의 군사와 보부상군을 보냈다. 농민군은 부안, 태인 등에서 분산해 무남영군을 유인하였다.
전주감영군은 태인, 백산을 거쳐 진격해왔다. 농민군과 전주감영군은 4월 6일 밤 황토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전주감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이것은 농민군이 관군과 접전을 벌여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동학농민군은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을 차례로 점령, 전라도 일대를 석권하였다.

전봉준 고택

전봉준 고택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전봉준이 살았던 곳이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한약방과 서당을 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전봉준 피체지

전봉준 피체지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리마을
전봉준은 태인 성황산 전투에서 패한 뒤,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였다. 그는 부하 몇 명을 이끌고,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성에서 하루를 유숙하였다. 12월 2일 그의 옛 부하였던 김경천이 살고 있던 피노리로 숨어들었으나, 김경천의 밀고로 이곳에서 체포되었다. 순창, 나주,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5차례의 심문을 받은 후, 손화중, 최경선과 함께 처형당했다.

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정읍시 쌍암동 392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읍시에서 세운 조형물이다. 1894년을 의미하는 18.94m의 주탑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3거두를 상징하는 금색 금속띠, 그리고 둥근 보조탑 4개의 조형물이 조성되었다.

김개남 묘역

김개남 묘역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
김개남은 백산대회에서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군 총관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황토현 전투, 황룡촌 전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남원에서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를 아우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폐정개혁에 나섰다.
2차 농민봉기 때에는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11월 10일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김개남은 군대를 해산한 뒤, 매부 서영기가 살고 있던 종성리 너디마을에 은신하고 있었다. 이웃마을에 살고 있던 임병찬이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신고하여, 12월 1일 새벽에 체포당하고 말았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12월 3일 전주에서 임의로 처형하였는데, 이때 김개남의 나이 42세이었다.

손화중 묘역

손화중 묘역

정읍시 상평동 음성리 음성마을
1996년 후손에 의해 조성된 묘역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 제단,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묘소 앞 좌우에는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손화중은 무장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동학을 포교하였다. 그는 전라도 서남부 지방일대에서 가장 큰 동학교세를 확보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백산에서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으로 추대되어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승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2차 농민봉기 때에는 일본군이 남해안 쪽으로 상륙해 올 것을 대비하여 나주와 광주지역을 지켰다. 그 뒤 각지의 농민군이 패배하자, 휘하의 농민군을 해산하고 숨어 지냈다. 그러나 1894년 12월 11일 체포되어, 전봉준, 최경선과 함께 다음 해 3월 30일 처형되었다.

최경선 묘역

최경선 묘역

정읍시 칠보면 축현리 산 73-4
최경선은 김덕명과 더불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태인의 김덕명 포에 속한 태인 주산리 접주로 사발통문 모의와 고부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차 농민봉기에는 영솔장 직책을 맡아 황토현과 황룡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최경선 묘역집강소 통치기에는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활동지역이 배분되었다. 최경선은 나주, 광주일대에서 후방 업무를 맡아봤다. 그는 집강소 통치기에 나주점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나주성을 지켰던 목사 민종렬과 영장 이원우의 활약에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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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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