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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보은

보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산16번지 일원
패주하던 손병희와 동학농민군은 북접의 본거지였던 보은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관군의 보복으로 폐허가 된 보은을 지나 북실마을의 야산일대에 주둔하게 된다. 그러나 북실에 주둔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상주 소모영 유격병대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고 만다. 일본군과 유격병은 패주하는 농민군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며 북실 골짜기 안에 남아 추위 속에서 달아날 기력도 없는 농민군들은 토벌군에 의해 집단 살육 당했다.
일본군의 전과보고와 상주 소모사 정의묵의 [소모일기]에는 "전투 중 죽어 넘어진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북실전투에서의 농민군 희생자수를 은폐하고 있다. [토비대략]에 근거하면 야간전투에서 사살된 자는 393명이며, 마구잡이로 학살당한 농민군은 2,200명이라 했다. 북실전투의 패배로 손병희는 보은을 떠나 충주로 피신했으며, 12월 24일 마침내 해산령을 내린다.
2,600여명의 농민군이 불과 8시간 만에 떼죽음을 당한 북실전투(1894년 12월 17~18일)현장을 기념하고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고자 전투 지역으로 추정된 지역 인근에 기념공원을 건립하였다.

북실전투지

죽창을 들고 있는 동상의 뒷모습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종곡리 북실
패주하던 손병희와 동학농민군은 북접의 본거지였던 보은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관군의 보복으로 폐허가 된 보은을 지나 북실마을의 야산일대에 주둔하게 된다. 그러나 북실에 주둔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상주 소모영 유격병대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고 만다. 일본군과 유격병은 패주하는 농민군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며 북실 골짜기 안에 남아 추위 속에서 달아날 기력도 없는 농민군들은 토벌군에 의해 집단 살육 당했다.
일본군의 전과보고와 상주 소모사 정의묵의 [소모일기]에는 "전투 중 죽어 넘어진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북실전투에서의 농민군 희생자수를 은폐하고 있다. [토비대략]에 근거하면 야간전투에서 사살된 자는 393명이며, 마구잡이로 학살당한 농민군은 2,200명이라 했다. 북실전투의 패배로 손병희는 보은을 떠나 충주로 피신했으며, 12월 24일 마침내 해산령을 내린다.

다라니골 농민군 집단매장지

다라니골 농민군 집단매장지

충북 보은군 성족리
1894년 북실전투에서 희생된 2천 6백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성족리 앞산골짜기에 집단 매장되었다. 동학농민군이 1893년에 쌓았을 것으로 보이는 성터의 석축 일부와 그릇 조각도 많이 발견되었다. 이 매장지는 1894년 12월 17일 밤 상주 소모영 소속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보은읍 성족리까지 밀리다 비참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위령탑

동학농민혁명위령탑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내에 위치.
동학농민혁명 위령탑은 120년 전 보은 종곡리 망나니골에서 산화해간 2천 여 동학농민군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2007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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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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