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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9월초 전라도에서 농민군이 대대적으로 재봉기하고, 이어 충청도에서 농민군이 총봉기하였다. 이들 봉기를 앞뒤로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이 힘을 합쳐 북상 길에 올랐고, 이와 별도의 조직을 이룬 가운데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의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사실상 조선 전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봉기한 농민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반일(反日)항쟁을 전개하는 한편,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사회개혁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9월 재봉기 당시에는 조선 전역은 항일구국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의 물줄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경상도

경상도는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곳이다. 이후 관의 극심한 탄압으로 이 지역에서 동학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교도들은 지하에 숨어 비밀 조직을 유지하였고 1894년에는 그 세력을 표면에 드러내며 농민봉기에 나섰다. 경상감사 조병호에 따르면, 9월말 경까지 경상도에서는 71개 군현 가운데 무려 60여 군현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경상도 지역의 봉기는 지역과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경상도 북서부 지역과 지리산에 접한 남서부 일대이다. 먼저 경상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 일대 농민군은 비교적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 예천은 3월부터 수접주(首接主) 최맹순의 지휘하에 농민군이 활동을 시작했다. 얼마 뒤 최맹순은 7만여 명의 농민군을 모았으며 접이 설치된 지역이 48개소에 이르렀다. 예천의 농민군은 예천읍내를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을 수중에 장악하였다. 이때 예천읍내에는 양반과 향리층을 중심으로 민보군이 조직되어 있었고, 8월 28일 민보군의 기습으로 농민군은 크게 패전하였다. 상주에서는 김현영의 지휘를 받는 농민군이 여름부터 활동했다. 상주 일대의 농민군은 9월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리자, 읍내 점령에 나서서 9월 22일 상주와 선산(善山)관아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러나 28일에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상주와 선산읍에서 물러났다. 전라도 무주와 충청도 영동을 연결하는 교통로인 김산 일대의 농민군도 도집강 편보언의 지휘를 받으며 3월부터 활동하였다. 9월 25일 최시형의 기군령(起軍令)을 받고 총집결한 김산의 농민군은 김산을 장악하였지만. 대구감영의 남영군이 10월 5일 김산에 진주하면서 활동을 멈추었다. 경상도에서 농민군이 세력을 형성한 또 다른 지역은 지리산에 접한 남서부 일대이다. 이 일대는 순천, 광양 등 전라도지역 농민군과 깊은 관계에 있었는데, 특히 하동과 진주는 농민군이 세력을 크게 떨쳤던 곳이다. 하동의 농민군은 여름부터 이미 미약하게나마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광양 등지에서 활동하던 영호(嶺湖)대접주 김인배의 도움으로 7월에 하동에 도소를 설치했지만, 곧 민보군의 습격을 받고 광양을 밀려났다. 8월 29일 김인배는 휘하 농민군과 하동 농민군 수천명을 하동과 광양의 길목인 섬진 나루터로 이동시켰고, 하동의 민보군이 이에 맞섬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큰 승리를 거두어 하동부를 장악하였다. 이후 하동의 농민군은 김인배의 행로를 따라 진주로 옮겨갔다. 농민군의 하동에서의 승전은 사천, 곤양, 진주 등 인근 지역 농민군을 고무시켜 여러 지역에서 봉기가 이어졌다. 진주지역의 농민군은 손은석의 지휘를 받으며 4월말부터 활동했는데, 이들은 곧바로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이후 활동을 멈추고 있다가 9월 들어 김인배가 하동을 공략하자 이에 호응하여 재봉기에 나섰다. 9월 8일 농민군 진주대회를 마친 이들은 10일에 또 방문을 내어 다같이 항일투쟁에 나서자고 호소하였다. 이 대회는 진주의 농민군과 하동에서 김인배가 이끌고 온 전라도 농민군이 힘을 합쳐 연 것이며, 이때 진주읍내에는 충경(忠慶)대도소가 설치되었다. 남해에서는 9월 11일 농민군이 봉기하였고 사천에서는 13일 약 800여명이 봉기하여 관청을 불태우고 무기를 빼앗았다. 15일에는 1,500~1,600여명의 밀양 농민군이 관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본 병참부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15일에는 곤양 농민군이, 16일에는 고성 농민군이 읍내를 점거하였다. 이렇게 봉기한 군현의 농민군은 진주성으로 향했다. 17일 하동의 농민군 수천 명이 진주성에 들어온 데 이어 18일에는 김인배가 이끄는 전라도 농민군 천여 명이 다시 진주성에 들어와 진주성에는 4,000~5,000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9월말까지 진주 인근 등을 오가며 활동을 벌였다. 이들 경상도 남서부지역의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와 10월 10일부터 진주 일대에서 두 차례의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였다. 이어 진주 수곡면에 다시 집결한 농민군은 14일 일본군과 고승산성에서 필사적인 항전을 전개했지만, 200여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하동으로 와서 10월 22일 일본군, 관군과 접전하다가 패전하였고, 김인배도 광양을 돌아갔다. 그러나 이 같은 과정에서 농민군의 공격을 대구-안산 사이에 있는 일본군 전선이 모두 파괴되기도 하였다.

강원도

강원도의 농민봉기 역시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충청도 제천?청주 등지의 농민군과 연계해서 활동한 강원도 남부지역 농민군의 활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홍천 대접주 차기석이 홍천 지역의 농민군을 이끌고 벌인 내륙지역의 활동이다. 강원도의 경우, 3월 봉기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농민군의 조직적 봉기는 9월초에 나타난다. 9월초 충청도 제천?청주의 농민군과 강원도의 영월?평창지역 농민군이 연계하여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들은 평창에 집결하여 인근의 정선 농민군들과 합세, 수천의 대군을 이룬 뒤 9월 4일 강릉대도호부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점령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9월 7일 민보군의 습격을 받아 20~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으로 물러났다. 강릉부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농민군은 평창?영월?정선 등 대관령 서부지역을 장악한 채 계속 강릉을 위협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11월 4일 평창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그 패전으로 강원도 남부지역의 농민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홍천지역에서는 대접주 차기석이 이끄는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홍천의 농민군은 남하하여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에 합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9월 최시형에 기포령에 따라 이들은 남하를 시도했으나 강원도 지역 민보군과 관군의 방비에 막혀 결국 홍천으로 돌아왔다. 10월 11일 홍천군 내촌면에 집결한 이들은 이날 관곡 창고가 있던 동창일대를 공략한 후 강릉으로 진군해 갔다. 이 홍천의 농민군은 10월 21일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과 홍천 장야촌에서 마주쳐서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로 퇴각했다. 이들은 여기서 22일에 또다시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800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패전했다. 봉평 내면까지 퇴각한 농민군은 11월 11~14일까지 일본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와 맞서 싸우다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강원도 지역에서의 마지막 항쟁이었다.

경기도

경기도 지역 농민군의 활동 역시 9월 재봉기가 시작되는 9월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타났는데, 그나마 세력과 활동이 매우 미약한 편이었다. 9월 초순 어느 곳에서 봉기한 농민군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들이 죽산과 안성을 침범하였다. 용인 직곡과 금량 등지에서도 농민군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21일 이두황의 기습을 받아 20여명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9월 25일에는 농민군 수천 명이 음죽(陰竹) 관아를 포위 점령하고 군기를 빼앗아 갔다. 27일에는 이천의 농민군이 일본 병참소의 공격을 받아 30명이 체포되고, 지도자급 10명이 처형당했다. 29일에는 안성, 이천의 농민군 수만 명이 충청도 진천을 점령하여 관사와 관속을 결박하고 무기고를 헐어 군기를 빼앗았다. 29일 안성 등지 농민군의 충청도 진천 공격은, 용인, 죽산, 안성, 음죽, 이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경기도 지역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피해 충청도 지역으로 남하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경기지역에서 농민군의 조직적인 봉기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이 지역 농민군은 충청도 농민군과 합류해 진천, 충주, 음성, 괴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경기도 지역 농민군이 경기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충청도 쪽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곳이 서울의 인접지역이어서 초기부터 일본군과 관군의 강력한 진압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황해도

황해도 역시 9월 재봉기가 시작된 이후 본격적인 봉기가 이루어졌다. 황해도에서는 9월 들어 서해연안의 여러 군현에서 농민군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10월 6일 농민군 수만 명이 감영인 해주의 취야장터에 모여 폐정(弊政)을 적어 제출한 뒤 일단 해산했다. 그러나 이들은 임종현의 지휘 아래 다시 모여 해주 감영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관청을 부수고 포를 쏘고 군기를 탈취하고 문서를 불사르고 판관 등을 결박 구타했다. 한편 해주를 점령한 농민군 이외에도 황해도 지역 곳곳에서 농민군이 활동했다. 재령의 농민군 2,000여명은 10월 26일 쌀을 사들이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28일에는 일본인 2명을 죽였다. 이들은 11월 1일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다 15명의 희생자를 내고 흩어졌다. 10월 27일에는 풍천의 농민군 수천 명이 봉기하여 풍천부를 점령하였고, 11월 4일에는 평산일대의 농민군이 일본군을 공격한 뒤 평산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평산?김천일대의 농민군은 곧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에게 쫓겼다. 해주 감영에서 물러났던 농민군은 황해도 곳곳의 관아를 잇따라 점령했다. 11월 11일에는 500~600명의 농민군이 강령현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13일에는 신천의 농민군이 일본군과 접전했다. 황해도 일대의 농민군은 13일 송화현, 문화현, 평산부, 조니진, 오우진, 용매진을 점령하였고, 14일에는 장연부, 신천군, 장수산성, 수양산성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15일에는 옹진 수영을 공격하고, 17일에는 연안부를 공격했다. 또한 19일 은율현과 21일 백천군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황해도 각지에서 기세를 올리던 농민군은 다시 해주 감영 공격을 대대적으로 준비했다. 그리하여 11월 20일 취야장터에 수천 명이 모였고 24일에는 수만의 농민군이 총집결하였다. 이들 농민군은 11월 27일 해주감영을 총공격하였다. 이때의 농민군은 재령, 신천, 문화, 장연, 옹진, 강령 등지에서 집결한 3만여 명에 이르는 연합부대였다.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에는 당시 동학접주이던 백범 김구도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농민군은 격전 끝에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다. 해주 전투에서 패배한 황해도지역 농민군은 이후 이듬해 1월까지도 산발적인 항쟁을 벌였으나 곧 기세가 꺾였다. 황해도는 경기 이북에서 농민군 활동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다. 감영이 농민군 수중에 들어간 사례는 동학농민혁명 전체 과정에서 전라도를 제외하고 황해도가 유일하다. 2개월 여의 항쟁으로 끝났지만 황해도 지역 농민군의 위세는 삼남지방에 못지 않았다. 이처럼 대단한 세력을 형성했음에도 황해도지역 농민군은 인근 지역과 연계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한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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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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