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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상,서울을 향하여

마침내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1894년 9월 다시 봉기의 횃불을 들었다. 전라도 삼례(參禮)를 재기포지로 삼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해산 이후 4개월 여만에 재무장한 것이다. 재봉기의 분위기는 무르익었으나 전봉준은 곧바로 북상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재봉기, 즉 북상은 10월 12일경에야 이루어졌다. 북상이 늦어진 이유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움직이기가 어려웠고 새 곡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 농민군의 합류를 기다린 것도 큰 요인이었다. 전봉준으로서는 북상의 진격로에 있는 최시형 휘하의 충청도 동학교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시형은 동학교인에 대한 관군과 민보군(민간 주도의 반농민군)의 가혹한 침탈이 계속되고 자신의 휘하에서도 봉기 요청이 빗발치듯 이어지자, 마침내 봉기를 요청하는 손병희 등에게 명을 내렸다.

최시형의 명이 떨어지자 충청도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던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충청도도 사실상 전지역이 농민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봉기한 농민군 모두가 최시형이 있는 보은으로 모인 것은 아니다. 상당수 지역의 농민군은 보은에 집결하지 않고 해당지역에서 세력을 이룬 가운데 해당 관아를 점령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이들은 인근 지역의 농민군과 힘을 합쳐 주변지역을 공격함으로써 북상하는 주력 농민군을 측면 지원하였다.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이 대대적을 봉기하여 집결하자, 최시형은 10월 11일경에 이 사실을 전봉준에게 알렸다. 이에 전봉준은 4,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를 출발하여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하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도 보은을 출발하여 15일경에는 논산에 합류하였다. 거의 같은 때인 14일 김개남은 8,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16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한편 삼례에 올라와 있던 최경선은 전봉준과 상의한 후에 광주, 나주로 가서 손화중과 함께 일본군의 해로를 통한 협공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10월 16일까지는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이 총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전봉준, 손병희는 북상하고, 김개남은 북상군의 거점지인 전주에 남아 다른 날에 대비하며, 손화중과 최경선은 후방을 수비하는 총력전의 형태를 갖추었다. 10월 중순에는 실질적으로 무력 봉기할 수 있는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는 본격적인 북상이 시작되었다.

한편 개화파 정권은 9월 9일 이두황을 장위영 영관,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으로 임명하여 경기도와 충청도로 내려보냈다. 이어 21일 농민군 진압을 도맡을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하고 도순문사(都巡撫使)에 신정희, 선봉장에 이규태를 임명하여 농민군을 진압토록 하였다. 10월 11일 서울을 출발한 이규태는 남하 도중에 일본군 1대와 합류하였다. 그는 휘하의 군대를 미리 공주 일대로 진군시킨데 이어 자신은 24일 공주에 도착, 이후 공주전투에서 관군을 지휘하였다. 이와 별도로 이두황은 장위영병을 지휘하며 경기,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과 잇따라 접전을 벌이며 남진하였다. 일본도 9월9일 농민군 진압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8일 일본군대를 보내어 농민군 진압을 돕겠다고 나섰고 21일 조선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10월 9일에는 농민군 진압을 전담할 일본군 1개 대대병력이 인천에 도착했다. 이 일본군 1개 대대는 15일 각각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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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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