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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기 결정과 준비

일본군의 내정간섭에 맞선 각지 농민군의 공격적인 활동에 호흡을 같이 한 것은 김개남이었다. 7월 하순부터 임실에 머물며 집강소 체제에 협조하던 김개남은, 8월 19일 남원 교룡산성 등의 병기고를 헐어 군기를 장악하고 부호의 돈과 곡식을 거두어 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25일에 다시 남원에 들어왔다. 그는 동헌을 도회소로 삼는가 하면 체제를 정비하고 무장을 강화해 갔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라좌도 일대에서 7~8만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김개남이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전봉준은 집강소 체제를 유지하며 농민군의 역량을 보존하는 가운데, 중앙정국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편 것이다.

그러나 김개남은 전봉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또한 손화중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개남은 전봉준?손화중과 차이를 보이며, 재봉기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전격적인 재봉기 결정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대원군의 밀사파견과 밀지 전달이다. 대원군은 비록 일본군의 등에 업혀 정계에 복귀했으나, 그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며 삼남에서 의병을 불러오는 방안 등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의 권고 등으로 농민군에게 ‘해산하라’는 효유문을 내리는 때를 이용하여, 8월 25일경 전라도의 농민군 등에게 밀지를 비밀리에 내려 보냈다.

삼남 각처의 양반과 보부상뿐 아니라 농민군까지 다같이 창의(倡義)하여, 일본군을 치고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다. 밀지는 전라도의 일부 유림에게도 전달되었으나, 유림들은 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며 호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로써 대원군은 농민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원군의 밀지는 7일 남원의 김개남에게 전달되었고, 전봉준도 삼례로 나와 밀지를 전달받았다. 이후 전봉준은 손화중 등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본격적으로 재봉기 채비를 갖추어 갔다. 이처럼 전봉준이 재봉기를 결정지은 계기 역시 대원군과의 연합이 구체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9월 재봉기의 근본적인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내정간섭 심화였고, 제1의 일본군 축출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8일경 재봉기를 서둘러 확정짓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렇게 각지에서 무장한 농민군은 전봉준과 김개남 휘하로 모여들었다. 전라도의 농민군 10만 여명은 3월 봉기 때와 비슷하게 전봉준과 김개남의 세력으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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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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