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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강소의 설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을 접한 순변사 김학진은 민족적 위기를 명분으로 삼아 농민군 지도부에 회담을 제의하였고, 김학진과 전봉준은 7월 6일 전주에서 회담을 가졌다. 전주회담에서 전봉준과 김학진은 정부와 농민군이 협력하여 전라도내의 안정과 치안질서를 바로잡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서 각 군현에 집강소(執綱所)를 전면적으로 설치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회담을 마친 전봉준은 김학진과의 합의에 따라 전주성안에 전라좌우도 대도소를 설치하고, 각 군현 단위로 집강을 두도록 하였다.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가 전면적으로 설치 운영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농민군의 최고지도자 전봉준은 기존질서와의 타협을 실행에 옮긴 것인데, 이것은 관과의 타협으로 농민군의 세력을 보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데 뜻을 둔 것이었다.

전봉준은 이어 남원으로 내려갔다. 그 이유는 남원을 점령한 채 관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시종 강경한 투쟁을 벌이던 김개남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7월 보름 경 전봉준과 김개남은 남원대회를 열었다. 이때 남원에는 수만 명이 모였고, 김개남 역시 남원대회 직후, 그간 보여 온 강경한 행동을 중단하고 임실 산중에 은둔함으로써, 일단 소극적인 입장에서나마 회담의 결과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전라도는 전주 감영을 중심으로 한 행정체제와 전주대도소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의 집강소체제가 양립하였다. 이 틀은 7월초에서 8월 하순까지 유지되었다. 이 체제 내에서 농민군은 전주대도소를 기반으로 정국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갔다. 이 같은 집강소의 설치 운영은 전라도에 국한된 것이었고 또한 일시적인데 그쳤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집강소는 농민들이 자신의 힘과 의지로 지방 단위에서나마 행정력을 장악하고 이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집강소를 통한 농민의 권력 참여는,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다고 할지라도, 한국 근대사의 새 장을 연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집강소의 운영은 농민혁명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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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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