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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재 전투

부안현을 점령한 농민군은 4월 5일 부안 성황산으로 진을 옮긴 후 고부 천태산을 넘어 6일 고부 도교산(황토산)에 진을 쳤다. 태인에 있던 김개남 부대도 6일 도교산으로 진을 옮겨 전봉준·손화중 부대와 합류하였다. 전주 길목을 지키며 농민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관군도 추격을 시작하였다. 농민군이 남하하자 관군 역시 4월 6일에는 황토재 아래 진을 쳤다. 도교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3대로 나누어 세 봉우리에 불을 놓고 관군과 대치하였다. 7일 새벽 세 곳의 불 중에 가운데 봉화만 남고 양쪽의 불이 꺼지자 관군은 농민군이 잠든 것으로 판단하고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을 기다린 농민군은 양쪽에서 관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앞쪽에서 협공, 즉 삼면을 포위하여 관군을 대파하였다. 관군의 기습을 예상한 농민군은 협공의 계책으로 관군을 격퇴한 것이다. 반면 농민군이 관군을 먼저 공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누가 먼저 공격하였든, 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적절한 책략까지 쓰며 승리를 거둔 반면, 감영군은 큰 피해를 입고 참패하였음은 명백하다. 황토재전투에서의 승리는 농민군에게 큰 의미가 있다. 관군과의 첫 전투에서 거둔 큰 승리였고, 농민군은 이로써 기세를 올리며 전라도 일대로 세력을 넓혀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기 때문이다.

한편 전라감사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4월 2일에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조선시대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이를 평정하기 위해 임시로 보내던 신하)로 임명하여 병정을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하였다. 홍계훈이 이끄는 800여명의 경군은 인천에 도착하여 4일 함선을 타고 호남으로 출발, 6일 군산에 이르렀고 7일 전주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경군이 전주에 이른 시각은 이미 감영군이 패한 뒤여서 관군의 전력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하였다.

농민군의 남하

황토재 전투에서의 승리로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그런데 이들은 북상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는 길을 택했다. 관군을 격파한 후에도 남하한 것은 전주에 경군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선을 넓혀 세력을 확대하려는 농민군의 뜻도 담겨 있었다.

농민군은 7일 당일에 정읍, 고부 삼거리로 이동하였다. 8일에는 흥덕과 고창을 점령하고, 9일에는 무장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3일간을 머물며 전열을 정비한 다음에 12일 영광, 16일 함평을 차례로 점령하고 21일에는 장성 월평리에 도착했다. 이때 장성에는 고부에서부터 남하해 온 농민군 이외에 전라좌도 일대의 농민군도 집결하여 그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농민군은 이동 과정에서도 체계와 규율을 유지하며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였다. 이 같은 위세를 보이며 농민군은 점령한 군현 모두에서 감옥을 부수어 억울하게 갇힌 자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헐어 무장했다. 또한 관아의 세금장부를 압수하고 탐학한 아전들을 처형 또는 처벌하였다. 한편 홍계훈은 전라감사에게 영을 내려 향병을 동원하여 순창-담양-광주-나주에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한 뒤, 15일에 경병 본대를 거느리고 금구, 태인(18일)-정읍(19일)-고창(20일)-영광(21일)으로 남하하였다.

황룡전투

4월 23일 농민군과 경군 선발대는 장성 황룡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날 경군 선발대, 즉 대관 이학승이 이끄는 300여명이 월평리의 삼봉 아래에 모여 있던 농민군을 공격함으로써 싸움은 시작되었다. 경군의 포격으로 순식간에 50여명을 잃은 농민군이 후퇴하자 경군은 뒤쫓으며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삼봉에 오른 농민군은 곧바로 위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가했고, 경군은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결국 패주하였다.

황룡촌 전투는 장태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장태싸움이라고도 한다. 장태는 원래 닭을 키우는 데 쓰이는 닭구장태 만드는 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농민군들은 이 장태 안에다 짚을 넣어서 불을 붙인 뒤 수백 개를 경군 쪽으로 굴려 화력을 소모시키고 그 뒤에는 농민군들이 따라붙어 경군에 접근 공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경군은 영광 쪽으로 길을 따라 퇴각하면서 신촌리 뒷산 까치골 능선(현재 황룡면 신호리)에서 농민군과 마지막 접전을 벌였다. 이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경군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다. 황룡촌 전투에서 경군은 이학승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고, 농민군은 나라의 정예부대마저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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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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