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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과 봉기계획

전라도 고부군은 드넓은 평야와 해안까지 끼고 있어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물산(物産)이 풍부하기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에 1892년 4월 28일 조병갑(趙秉甲)이 군수로 부임한 이래,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그의 수탈 방법은 원래 있던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를 허물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 보를 만든 다음 그 농민들에게서 수세(水稅)를 거두었고, 예전에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며 고부 농민들로부터 돈을 빼앗았으며, 돈 가진 자들을 불효(不孝), 불목(不睦:사이가 서로 좋지 않음), 음행(淫行), 잡기(雜技:여러 가지 노름) 등 갖가지 죄목으로 엮어 가둔 후 속전을 받고서야 풀어 주는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1893년 11월 고부의 농민들은 불법적 수탈을 벗어나기 위해, 전봉준을 추대하여 관에 제출할 소장을 써 달라 하고 대표 40인이 조병갑을 찾아가 수세를 줄여 달라고 진정하였다. 그러나 감면을 진정한 군민들은 도리어 붙잡혀 처벌을 당하는 곤욕을 치뤘다. 이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의 송두호(宋斗浩)의 집에서 은밀한 계획을 모의하였다. 전봉준 등 20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추진한 이른바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이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리 리집강 좌하(各里 里執鋼 座下) 우(右)와 같이 격문(檄文)을 사방에 전하니 여론이 물끓듯하였다. 매일같이 난망(亂亡)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어 있겠나’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들은 선후책(善後策)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가(宋斗浩家)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구름같이 모여 차례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貪吏)를 엄하게 징벌할 것.
  •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이는 매우 강력한 무력봉기 계획이었는데, 이 통문에는 특별히 주목할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전의 민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군수살해, 전주감영 점령과 서울 진격’이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즉 전봉준 등은 고부농민봉기 계획단계에서부터 기존의 농민봉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확대된 봉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봉기 계획은 인근 지역 농민들의 동참이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전봉준은 인근 무장현(茂長懸) 손화중을 주목하였다. 손화중은 전봉준과 이미 삼례집회 단계에서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전라도에서 최대의 동학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손화중의 세력 형성과정과 규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을 보자. ‘1892년 8월의 일이다. 전라도 무장현 선운사 도솔암 남쪽 수십 보쯤 되는 곳에 50여 척이나 되는 층암절벽이 있고, 그 절벽 바위 전면에는 큰 불상 하나가 새겨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석불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검단선사의 진상(眞像:참 모습)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들어 있다고 하며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다된다(몰락한다)는 말이 자자하였다. ……(손화중 휘하의 동학교인들이)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이처럼 ‘손화중 포(包)에서 무장 선운사 석불 속에 있는 비결이라는 것을 꺼낸 이후, 무장.고창.영광.장성.흥덕.고부.부안.정읍 등 여러 고을 사람들이 이민(吏民:지방 아전과 백성)을 물론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손화중의 세력 확대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농민혁명 직전의 사회 분위기 즉 새 세상이 열렸으면 하는 농민들의 기대와 무장일대의 강경한 분위기 등을 느낄 수 있다. 전봉준으로서는 이런 손화중의 동참을 이끌어 내야 했고, 이를 위해 12월 비밀리에 무장으로 내려가 손화중을 만났다. 하지만 ‘무장회동’에서 전봉준은 손화중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제1차 응징 대상인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나자, 통문의 서명자 집단의 거사계획은 당분간 보류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고부농민봉기의 전개와 해산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난 군수 조병갑은 전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 고부 관아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취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전봉준은 사발통문의 거사 의지를 누르고 전주감영에 다시 수세감면을 비롯한 폐정을 호소했으나 김문현은 이들을 몰아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었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임명된 하루 뒤 드디어 고부군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즉 고부의 농민 5백여 명이 1월 9일 예동(禮洞) 마을에 모여들었고, 10일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그날로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창고를 열고 양곡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새로 쌓은 만석보(萬石洑)를 헐어 버리고 탐학(貪虐:탐욕이 많고 포학함)한 향리를 처벌한데 이어 조병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관아에서 나온 농민들은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사발통문의 3개 결의내용이 실행된 것이다.

농민군은 1월 25일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다. 백산은 비록 해발 47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고부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고, 부안, 김제, 정읍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삼한 이래로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말목장터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 쉽고 교통도 편리하지만 반면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지형이 불리했기 때문이다. 농민군은 집결과 감시에 유리한 백산을 근거지로 하여 2월 23일 고부군을 재차 점령하는 등 봉기를 한 달여간 이어갔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이 백산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 조정에서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나문정죄(拿問定罪:죄인을 잡아다 신문하고 죄를 판단하여 결정함)하고 전라감사 김문현은 월봉삼등(越俸三等:3등급의 봉급을 줄이는 징계)하라는 왕명을 내리고 다시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에 새로 임명하는 한편 장흥부사 이용태를 사건조사 및 수습 책임자 격인 안핵사에 임명했다. 2월말쯤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군의 세력에 눌려 그들의 해산을 위해 타협하는 방책을 택했다. 박원명의 설득에 농민군의 기본세력이 해산하기 시작한 데 이어 그 동안 눈치만 살피며 고부에 들어오지 않은 안핵사 이용태가 박원명의 수습책을 오히려 모두 뒤엎고 봉기 참가자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봉기 참가자를 색출, 갖은 횡포와 잔인무도한 탄압으로 봉기에 참여한 사람을 살육했다. 마침내 농민군은 3월 13일 완전 해산하게 되었고 전봉준 등 지도부는 무장의 손화중 包로 피신, 두 달여 동안에 걸친 봉기의 횃불은 내려졌다. 그러나 그 혁명정신과 의지는 보다 새로운 투쟁의 불씨를 당겼으니 이른바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들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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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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