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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확산과 억압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안으로는 통치질서의 파탄으로 농민대중의 삶이 피폐되고, 밖으로는 서양의 침략 위협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현실에서 농민대중들이 의지할 만한 곳마저 마땅치 않을 때 새로운 종교가 창도되었다. 1860년 경주에 사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유교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양 열강의 정신적 배경인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유.불.선(儒.佛.仙) 3교의 장점을 융합하여’ 만든 동학(東學)이 그것이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인간평등사상과 새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였는데, 그 요지는 신분에 관계없이 그 누구나 동학에 입도하여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 시천주(侍天主)를 이룰 수 있고, 그와 같이 사람들이 천운(天運)에 순종하고 천도(天道)에 합치하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조화롭고 정의로운 새 세상, 즉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동학은 이와 함께 질병의 치료와 길흉에 대한 예언 등 현실구복적인 요소를 포함하였고, 척왜양(斥倭洋:일본과 서양을 배척함)의 민족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동학은 당시 농민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의식과 염원을 그대로 수용하여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동학은 창도되자마자 농민대중의 환영을 받으며 순식간에 경상도 일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동학을 체제를 위협하는 학문으로 지목한 조선정부가 1863년 12월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어두운 곳에서 무리를 모으고 평세에 난을 꿈꾸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고 그의 제자들 다수를 유배 보냄으로써 동학은 불법시 되어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최제우가 처형된 후 동학교단의 지도자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가면서 동학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에 힘입어 동학은 1860년대 말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재건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이 1871년 영해 이필제 병란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면서 동학은 또 한차례의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강원도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 최시형은 이곳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祭儀:제사의 의식)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등 동학교단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1880년대 초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으로 중앙의 정치상황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정부가 동학과 동학교도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펼 수 없는 틈을 타고 동학은 충청도로 활발히 전파되었다. 전라도의 경우는 1880년대 중반에 익산 등지에 동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80년대 후반 들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80년대 중엽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이 일대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 토호(土豪:지방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는 호족)들은 정부의 동학 금지령을 빙자하여 교도들의 재산을 다투어 수탈하였다.

이런 수탈에 대해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교도들은 체포되면 속전(贖錢: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 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달아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조직화되었고, 탄압과 수탈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가혹해지는 상황에 이르자, 동학교단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변모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라고 불리는 동학공인(公認)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 공인을 위한 공주, 삼례집회

동학교단의 첫번째 집회운동은 서인주(徐認周), 서병학(徐炳鶴) 등의 주도하에 1892년 10월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열렸다. 이 달 20일경 공주에 모인 1,000여명의 동학교도들은 충청감사에게 소지(所志:관청에 올리는 소장.청원서.진정서)를 올려, ‘지방관들의 학정을 그치게 하고 임금께 최제우의 신원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감사 조병식은 ‘동학은 정학이 아니라 사학이다. 동학을 금한 것은 조정의 일이므로 감영에 호소할 일이 아니다’는 답을 내려 동학 공인을 임금에게 올려 달라는 요구는 거부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각 지방에 공문을 내려 ‘동학을 금단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비록 신원의 염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는 단지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지방관들로부터 공공연히 수탈 당해야 했던 동학교도, 동학교단으로서는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과에 고무된 동학교단은 전라감영에도 소지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동학교단은 10월 27일 전라도 삼례역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동학간부에게 경통(敬通:동학교단내의 공문)을 보내어 교도들을 거느리고 삼례역에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11월 1일에는 전라도 대부분 지역과 그밖에 수원 등 각지에서 온 동학교도 수 천명이 삼례역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2일에 전라감사에게 소지문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이때 소지문을 제출한 이가 전봉준이었다는 점이다. 즉 삼례집회부터는 뒷날 농민혁명을 주도하는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지문의 취지는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중지’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라감사는 해산하라는 답서를 내려보냈을 뿐이었다. 다만 충청감사처럼, 전라감사 역시 각 읍에 공문을 내려 ‘동학금지를 핑계로 한 관속배의 (동학교도에 대한) 재물 수탈을 일체 금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는 동학포교의 불법성을 재확인시키면서 교도들에 대한 수탈을 엄히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동학지도부는 공식해산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동학교인 일부는 복합상소와 같은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요구하였던 것 같다. 이런 강경한 움직임은 동학 집회운동의 성격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써, 이를 이끈 것은 바로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었다.

광화문 복합상소와 괘서사건

동학교단은 동학 공인운동에 대한 교도들의 요구가 잇따르고, 동학공인을 지방감영에 호소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정부에 복합상소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동학교단은 삼례집회 직후, 복합상소운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각지에 알린 다음, 12월 6일 복합상소에 대비한 도소를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2월 중순께 정부에 소장을 올려, 동학이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하다고 하면서 정부의 공평한 조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상소에 정부의 대답이 없자, 동학교단은 서울로 올라가 복합상소를 하게 된다. 복합상소는 2월 11일부터 시작됐다. 박광호를 중심으로 한 참여자 40여명은 3일 동안 상소문을 받들고 광화문 앞에 나아가 엎드려 호소하였다. 동학의 공인을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상소절차가 잘못되었다며 상소 접수조차 거부하였고, 고종은 14일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면 원하는 바를 따라 해주겠다’는 내용의 구전(口傳: 말로 전함)을 내렸다. 이는 사실상 해산명령과도 같은 통고였다. 이처럼 교단은 궁궐 앞 복합상소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후 오히려 “이단을 내세워 야료를 부리는 자들은 선비로 대우할 수 없으며 국법에 따라 죽임을 내릴 것이다”는 전교(傳敎:임금이 내리는 명령)와 함께 상소 주동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뒤따랐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1892년 10월부터 벌여 온 신원운동은 복합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함으로써 일단 원점에 서게 된 셈이다.

한편 복합상소가 진행되는 기간과 그 직후에 서울의 외국 공사관과 교회당에 서양인과 일본인을 강력하게 배척하는 괘서(掛書)들이 나붙었다. 2월 14일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의 학당에 붙은 괘서를 시작으로 한달 여 동안 잇따라 발생한 괘서사건은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서울에서 발생한 외국인 위협 괘서는 4건으로, 미국인 선교사 집에 2건, 프랑스, 일본 공사관에 각 1건의 괘서가 붙었다. 이 괘서들은 서양의 기독교 침투와 일본의 세력확장에 강한 증오심을 담고 있었다. 괘서가 모두 익명으로 된데다 당시 배외(排外)감정이 조선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괘서의 내용만으로는 이 배외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누구인지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복합상소가 전개될 때, 삼례에 모여 있던 이들이 전라감사에게 ‘동학을 사도(邪道)로 칭하지 말고 외국 선교사와 상인을 모두 나라 밖으로 쫓을 것이며 탐학한 지방관리를 제거하라’고 요구한데 이어, 그 일부가 상경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괘서사건은 동학교단의 온건하고 합법적인 상소운동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들, 즉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 동학교단의 혁신적 지도자들이 주도했음이 확실하다.

보은, 금구집회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교단의 중심세력은 동학도소가 있는 보은과 청산 등지로 내려갔다. 최시형은 곧바로 팔도의 모든 교인들은 보은 장내리로 모이라고 지시했고, 1893년 3월 11일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지에서 수만 명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라는 외세배격의 정치적 기치가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고 집회 군중을 해산시킬 선무사(宣撫使)로 어윤중을 보내어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면서 고종의 칙유문(勅諭文 : 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글)을 발표하자, 집회 주동자 일부가 이에 동조하여 무력하게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은 집회를 통하여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정치적 방향의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보은집회와 동시에 금구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금구집회에는 수천 명이 모였는데, 이들 역시 보은에 모인 군중이 해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흩어졌다. 금구에 모인 군중들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직접적인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금구의 집회군중은 척왜양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보은집회 지도부의 미온적인 노선에 적극 공감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아직은 그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금구집회는 보은집회보다 한층 정치적 지향이 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것은 삼례집회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은 채 서울의 괘서사건을 조종했던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었다. 요컨대 동학의 집회운동 과정에서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 서서히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들은 강력한 정치적 지향으로 무장한 가운데 집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차원의 활동을 향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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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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