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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혁명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통치 질서의 파탄을 맞았고, 그런 가운데 농민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조선 팔도의 농민들이 예외 없이 이런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산업의 거의 전부가 농업이던 때, 농업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호남지역의 농민들은 보다 극심한 수탈을 겪어야 했다. 어떻든 수탈과 궁핍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유리걸식(流離乞食:정처 없이 떠돌며 빌어먹는 일) 하는 소극적 형태로 또는 관에 소장을 올리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또는 물리력을 동원한 봉기의 형태로 저항하였다. 농민들의 무력 봉기를 민란.민요.농민봉기.농민항쟁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농민 저항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기본적인 생존권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무력 봉기는 19세기 내내 전개되었으며, 19세기의 후반인 철종과 고종 때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렇듯 농민들의 저항은 1세기가량이나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생계 여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뿐더러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1894년을 맞게 된다..

(1) 농민층의 양극화

18세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사회는 이앙법(移秧法)이라는 새로운 농사법의 발달로 커다란 경제적 변동에 직면하였다. 이앙법은 농지 이용도를 높이고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왔다. 이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업경영에도 뚜렷한 변화를 불러왔다. 농업노동력의 절감과 생산력의 증대라는 변화를 잘 활용한 지주나 농민들은 경영 규모를 확대해 갔다. 한편 생산력이 발전하는 가운데 상품화폐경제도 급속히 발달하여 농촌 경제는 장시(場市:시장)와 연결되었다. 농산물의 상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일고 있던 새로운 농업경영 즉 광작(廣作: 확대된 경작 형태)이나 상업적 농업(商業的 農業:시장을 상대로 한 농업)에는 일부 자작농이나 소작농이 참여하여 부를 축척하고 부농 또는 서민 지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소수 지주나 상인에게 토지와 부가 더욱 집중되고,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는 현상을 낳았다. 요컨대 조선 후기 농업 경제상의 변동 속에서 농민층은 소수의 부농과 지주, 그리고 다수의 빈농으로 양극 분화해 갔던 것이다. 이처럼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19세기 후반 농민층은 양극단으로 분화되었고, 이는 조선사회 전반을 크게 동요시켰다.

(2) 조세 수취제도의 모순과 문란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세금제도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이라는 삼정(三政) 체제로 확립되었다. 그런데 이 조세 수취 제도는 제도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었는데, 모순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얼마를 수탈했느냐는 것이라기보다 누가 냈느냐는 것이었다. 이 시기 세금은 평민층, 즉 직접생산자인 자.소작농에게 집중적으로 부과되고 있었다. 토지세를 말하는 전정(田政)의 경우, 토지 소유주인 지주가 아니라 직접생산자 즉 지주에게 세를 물고 토지를 빌어 농사짓는 소작인에게 집중 부과되었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된 군정(軍政)의 경우도 양반은 면제되었다. 환곡(還穀)의 경우 애초에는 춘궁기(春窮期:보릿고개)에 관곡(官穀:관아의 곡식)을 싸게 빌려주어 농민들이 굶주림을 면하도록 하는 빈민 구제책이었다. 그러나 그 이자를 국가 재정에 충당하면서부터는 국가 고리대의 성격을 띠었는데, 이 역시 일반 농민들에 부담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세금 거두는 일을 담당한 수령과 아전은 중앙 지배층과 결탁하여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수탈을 일삼아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처럼 삼정이라는 국가의 조세 수취 제도는, 그 잘못된 구조와 파행적인 운영으로 직접생산자인 농민층의 성장을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생계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3) 정치세력의 부패

19세기 초 순조 대에 이르러, 왕실과 연결된 소수의 몇몇 집안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기형적인 정치형태인 ‘세도(勢道)정치’가 헌종, 철종대로 이어졌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왕권의 회복을 도모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권력가들을 숙청함으로써 세도정치는 끝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10년 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민비의 집안인 여흥 민씨에 의해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들의 파행적인 정치 운영은 만성적인 국가 재정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중앙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지방관청의 재정으로 충당하였고, 재정이 줄어든 지방관청에서는 각종 잡세의 부과나 환곡, 고리대 등을 통하여 재정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봉건 권력에 의한 농민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 수탈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국가 재정의 위기를 농민 수탈의 강화를 통해 모면해 보려는 국가의 정책이 바로 삼정 문란을 야기했고, 그 가운데 세금의 부담은 자꾸만 빈농층에게 집중되어 갔던 것이다. 민씨 정권은 통제력의 이완으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통제할 수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탐관오리(貪官汚吏 :욕심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를 대량으로 양산하며 관리의 수탈을 조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부패구조의 최종적인 희생자가 일반 농민이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4) 열강의 경제적 침탈

1876년 조선은 일본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하여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문호를 개방하였다. 개항이후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였는데, 조선의 수출품은 주로 농수산물과 귀금속이었다. 수입품은 일본산 면포와 생필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대외 무역구조는 곧바로 조선의 농업, 수공업 기반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수출입의 절대량을 차지하던 일본은, 값싼 식량의 필요에 의해 조선의 쌀을 수입하였다. 다량의 쌀 유출은 쌀이 모자라던 조선에 심각한 쌀 부족 현상을 불러왔고 이는 쌀값 앙등(昻騰)으로 이어졌다. 쌀값의 앙등은 소수 지주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의미했으나 임금노동자들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결국 지주들이 막대한 토지를 집적해 가는 반대편에서 영세한 자.소작농들은 생활기반인 집과 토지마저 상실하고 몰락해 갔다. 수공업(手工業: 간단한 도구와 손을 사용하여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공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값싼 외국산 면포(綿布:무명)는 가내수공업 단계에 있던 조선의 면포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했고, 그 결과 조선의 면포산업은 몰락단계에 놓였다. 값싼 생필품의 수입 역시 조선의 수공업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상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1887년부터 외국상인들 특히 청.일 상인들이 조선에서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영세한 조선 상인의 활동 기반을 위협하였다. 결국 아무런 대안과 준비 없는 문호개방 속에서 농촌의 양극 분화는 심화되었고 영세한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외국자본의 손아귀에 놓이는 결과에 처하였다.

농민혁명 주체세력 형성

(1) 19세기의 농민봉기, 그 한계와 의미

19세기 사회.경제상은 한결같이 농민 대중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이에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봉기가 집중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때였다. 철종 13년(1862) 한 해에만 37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술민란’이라고 한다. 임술민란을 지역별로 보면, 경상도 16개 지역, 전라도 9개 지역, 충청도 9개 지역, 경기도.황해도.함경도 각각 1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정부의 농민봉기를 근본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모색된 방안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이고 삼정이정절목(節目)의 반포였다. 이정청의 설치 직후에 정부의 의도대로 봉기는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삼정을 부분적으로만 개선하겠다는 데 그쳤고, 반포된 지 석 달도 못되어 시행이 중지되고 말았다. 결국 삼정의 폐단은 계속되었고 1년 뒤인 고종1년(1864)부터 농민봉기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고종 25년(1888)부터는 전국적으로 만연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종대의 농민봉기는 전국에서 60여 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다. 철종대의 봉기가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한데 비해 고종대의 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고종대에는 일반 봉기와 달리 수령을 살해하고 왕조에 반기를 드는 병란(兵亂)적 성격의 봉기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1871년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서 일어난 영해민란 또는 영해 이필제(李弼濟) 병란이 그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봉기를 통해 삼정의 폐단과 수세 담당자인 지방관리의 부정행위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였다. 즉 농민들의 요구는 국가의 조세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시기 농민들은 지주와의 문제나 신분관계의 문제는 주목하지 못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더불어 19세기 농민봉기는 봉기 상호간에 연계를 맺지 못하고 개별적이었으며, 지도부가 농민층에 뿌리 박지 못함으로써 봉기가 지속적.조직적이지 못했고 자연발생적 경향을 보였다. 이런 한계로 농민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9세기 백여 차례에 걸친 농민봉기는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또한 농민봉기의 실패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는 지도자가 성장하는 계기를 주었다. 결국 19세기 농민봉기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을 꽃피워 내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2) 농민혁명 주체세력의 성장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농민대중은 일찍부터 봉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지닌 한계였다. 거의 대부분의 농민봉기는 한 개 군현(郡縣:옛 지방 제도)을 단위로 일어나서 그 지역을 넘어서지 못했고, 내용도 삼정의 폐단과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조세 따위를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백성들을 못살게 들볶음)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농민봉기의 그런 한계를 규모와 내용 등 모든 면에서 훌쩍 뛰어넘는 대규모 농민항쟁이었다. 그러면 갑오동학농민혁명이 19세기 농민봉기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한 주체적 동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당시 농민대중의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서 온 것이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동학(東學)’을 주목하자. 1860년에 창도된 동학은 대중 지향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농민대중과 탄탄하게 결합하며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고, 1890년대 초에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였다. 이런 동학의 조직망은 1894년 농민항쟁의 조직적 토대가 되었고, 이로서 농민혁명은 19세기 농민봉기가 보여 온 지역 분산적인 한계를 순식간에 극복하였다. 둘째,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化仲).김개남(金開南)을 비롯한 전라도 동학교단의 변혁 지향적 인물들의 활동이다. 이들은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욕구를 농민대중과 공유하는 한편, 사회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동학을 종교사상의 자리에 안주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 변혁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 이를 통해 비로소 1894년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필요충분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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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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