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록화-동학농민군의 무장객사 휴식과 재정비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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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무장객사 휴식과 재정비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정읍-고창을 지나 무장으로 들어갔다.
이때 농민군 수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나있었다.
그 당시, 고창과 흥덕의 관아 건물이 불타고 온갖 공문서들이 소각 되었지만
무장관아는 극적으로 화를 면했다. 여기에는 무장출신 농민군의 만류와 함께
농민군에 대거 동조한 그곳 서리들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무장 현감 조명호가 난이 일어났던 초기에 창의기를 제작하는 등
농민군과 연합했다는 죄목으로 파면당한 기록이 남아 있고,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상당수의 무장 관속배가 모여 ‘우리는 모두 동학에 입도했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더욱이 손화중포의 핵심근거지에서
부패한 정부의 상징이었던 관아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혁명이 당시 핍박받는 농민들과 서리들까지를 포괄하는
민중혁명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