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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족보에 의한 추적

동학농민혁명의 사건처리가 역모행위로 귀결이 됨에 역적의 흔적을 없애는 일이 당시의 시류였기에 생활주변의 정화작업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 아무래도 족보자료에 의존 할 수밖에 별뾰쪽한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가 1963년 9월 1일 고창문화원을 개설하고 신임 인사차 「고창 기로사」를 방문하였을 때 동재(東齋)원로들의 주문과제 1호가「동학 난리를 겪은 우리들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해서 녹두장군이 고부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느냐 문화원장이면 잘못된 역사를 우선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원로들에게서 당촌 출신이라는 심증을 얻었고 농민군들의 숱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이를 우선 과제로 정립하고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봉준 장군이 당촌 태생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 조사에 착수하였다.

먼저 고창 군내에 살고 있는 천안전씨들의 세거 상황을 알아보았다. 문효(백헌)공파 후손들이 공음면 신대리, 용수리 상하면 정동 대산면 덕천리 등지에, 삼제공파 손은 신림면 벽송리 일대에, 대제학파는 고창읍 도산리 아산면 하갑리에, 도평군파는 심원면 월산리 무장면 무장리 성내면 부덕에, 판결사공파는 아산면 구암리 등에 산거해 오고 있다.

맨 먼저 착수한 것은 고창 신림면 벽송리에 자작일촌으로 세거하고 있는 천안전씨 삼제공(三宰公)의 족보 입수 였다. 촌가에서 사람들을 만나 보기란 농번기보다 농한기인 정월달의 한가한 때를 골라야 만나기가 수월하므로 자료 조사 활동도 여간 제약이 많았다. 정초에 심방을 해 보았더니 색안경을 쓰고 외면하는 것이었다. 「왜 남의 집 족보를 캐묻느냐」 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만나기를 꺼려하는 눈치가 역력해 보였고 몇 해 동안은 이와 같은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아는 분이 있어서 적당히 구슬려 보았더니 깜짝 놀랄만한 정보를 일러 주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 방문할 때마다 옛날의 족보를 보여 달라고 했지만 한결같이 일제강점기의 것과 8.15 해방 이후의 마분지로 인쇄된 근래 족보들뿐이었는데 「벽송리 전씨의 문장인 전귀몽(全貴夢)씨가 근래 족보를 나누어주고 옛날 족보는 잘못된 것이 있다 하면서 모조리 거두어 갔는데 어느 날 분서해 버려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귀몽씨를 정읍에서 만나 다그쳐 물었더니 「정읍군에서 기별이와 녹두장군의 족보를 요구한 다기에 족보는 없고 해서 때마침 [계사보](1953년도 발행)를 만드는 중인데다 역적으로 몰려 이미 후사가 절손된 처지라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 우리 삼제공파로 끼여 붙였다」는 어쩔 수 없는 실정의 토로를 들을 수 있었다. 삼제공파 족보를 조사해 보았더니 전봉준은 삼제공(三厚)의 4세손이며 흥덕파조인 현감공(鐵石)의 5세손 철명(哲命)공의 차자인 극효(克孝)의 아들(性和)의 절손된 곳에 끼어 넣어 5대를 가공인명으로 채우고 그 아래에 전봉준 부자를 맞추어 넣고 녹두장군의 양손까지 정읍 북면 남산리에 사는 흥덕파 후손으로 끼어 넣고 있었다.

뒷날 익산 용안에서 세거하는 삼제공파 후손들이 적당한 거래를 요구해 오기까지 하였으며 1982년도에 「전봉준장군 숭모회」에서 사무국장이 찾아와 내용 규명 요구가 있어 그 진상확인을 위해 사무국장(全炳龍)과 함께 수소문 끝에 인천에 살고 있는 전귀몽씨 댁을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이승을 등진 몇 해 뒤였다. 미망인으로부터 문제의 계사보를 귀몽씨가 직접 필사한 원본을 인수할 수 있었다. 여하튼 필자가 의심한 내용이 적중되기도 하였지만 3km 남짓의 당촌(堂村)전씨는 몰락을 하고 8대째 세거 해온 벽송리(碧松里) 전씨는 동학 난리에 까닥도 안했다는데 당촌의 문효공파 후손이 삼제공파로 대명천지에 둔갑한 것이 이상하여 끝까지 추적해 낸 결실이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판단을 세웠다. 전씨들의 세거 집성촌보다는 묻혀 사는 전씨들을 중점 추적키로 하였다. 조사경험을 통해 집성촌들은 동학농민군 난리에 모두 혐의를 벗어 무사한 입장인고로 오히려 숨어사는 한 두집의 전씨 연고자들이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촌 앞마을 덕정리(德井里)에 세거해 오는 조진환(曺鎭煥)씨의 증언과 인근 고로들의 이야기 속에서 덕정마을에서 평생을 고입살이 하던 윤삼(潤三, 본명 전장수(全長壽; 1885~1941)의 아들 전동근(全東根)이가 신림 농암촌(籠岩村)에서 2대째 고입살이를 하고 있는데 덕정에서부터 조상대의 족보를 숨겨 가지고 다닌다는 제보를 얻었다.

※ 전동근의 아버지 전장수(자 潤三, 1885~1941)는 덕정리에서 고입살이를 시작하던 10세 때부터 집 주인이 ‘김윤삼’으로 변성명시켜 평생을 호적도 없이 ‘윤삼’이란 이름을 갖고 살았다 하며 당촌에 살던 전봉준의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멸족을 당할 때 어린 ‘윤삼’이는 덕정리 서당에 왔다가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등 너머 죽림리에 꾸어 왔던 양식을 갚으러 간 사이에 화를 면해, 온 집안이 몰살당하고 세간은 물론 가옥과 심지어는 가축까지도 모두 죽여 불질러 버렸다는데, 다행이 살아 남아 불타는 집 속에서 족보(6卷6冊, 文獻1冊, 共7冊)를 건져냈다는 것이다.

※ 그 후 ‘윤삼’을 만난 어머니(晋州 姜氏)는 덕정리에 사는 이규채(李圭彩-成均?博士)댁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윤삼’이와 한 마을에서 숨어살게 되었다. 두 모자의 형편을 알고 마을 사람들이 숨겨 주어 아무 탈 없이 잘 지낼 수가 있었다. ‘윤삼’이는 1931년 그의 아들(동근)이가 여덟 살이 되면서 신림면 농암촌으로 옮겨 고입살이를 했다. 아들 동근이도 자라서는 2대째 머슴살이를 하며 숨어살면서도 아버지가 물려준 족보를 ‘고추꾸러미’ 속에 싸서 칙간 모퉁이에 감추어 오면서 지금껏 소중히 간수해 오다가 필자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소문한 보람으로 신림면 농암촌의 「전양산」(全良山; 1902년생)을 찾게 되었다. 그는 전봉준의 방손임을 시인하고 자기보다는 전장군과 더 가까운 일가가 있다며 소개해 준 사람이 「윤삼」의 아들 「동근」이었다. 부안읍에 산다는 「전동근」을 만나게 된 필자는 그 숨겨 다닌 족보가 전장군이 살아 있을 때인 1886년에 간행된 「병술보」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족보의 서문은 조선말기의 문인이요 순국지사인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시호 문충공)이 쓰고 있는데 이 족보에 의하면 전동근은 전봉준의 종증조(德臣)의 7세손으로 전봉준과 11촌간임을 알 수 있었고 전양산은 9촌간 그리고 동근과 양산은 8촌간으로 동근은 양산의 종조인 기환(基煥)의 현손이었다.

족보명칭은 「천안전씨세보(병술보)」로서 전봉준의 가계를 정리해 보면 기본은 5세 천성군(天珹君; 世柱)의 장자 6세 천양군(天陽君 仁亮)파에서 차자인 7세 문충공(文忠公; 昇)파로 이어져 그의 5세손 12세 연산공(連山公; 敏)파로 다시 이어지고 15세 연산공의 증손(五常)인 송암공파로 또 이어지면서 그의 손자인 17세 언국(彦國)에서부터 송암공손파로 세분이되어 고부파로 기재가 되어 있고 송암공 7세손파로 22세인 석운(碩雲) 석풍(碩豊)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필자가 [병술보]를 찾아냄으로써 그 당시까지 전봉준 일가의 가계가 삼재공파의 후손이라고 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작극은 이제 일장춘몽으로 살아지게 되고 전장군은 이제 떳떳한 제사밥을 들게 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 되겠는가. 이후 근 20년 동안을 제보가 들어오거나 의도적으로 찾아 나서서 전남북을 두루 섭렵하여 천안전씨들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면 어김없이 인근의 노인당과 집성촌을 찾아 동학농민혁명을 짚어 갔다.

다음에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임술보]에 대한 입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기적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임술보]는 1980년 가을이었으니까 올해로 24년 전의 일이었다. 완주봉동에 사는 전태연의 결정적인 제보를 얻어 가까스로 찾아본 [임술보]의 기록은 그 동안의 초조와 긴장감을 일시에 해소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를 감격의 늪에 흠씬 젖어 놓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찾아 놓은 [병술보]의 기재사항이 별 다른 하자 없이 잘 전개되었는데 유독 전봉준의 가계를 고부파로 (송암공손파)로 적혀 있었기에 그동안 당촌 태생설을 주장은 하면서도 약간은 깨름한 일면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술보]는 철종 13년(1862)에 간행된 16권 한질의 「천안전씨 세보」이다. 이 족보의 서문은 이듬해(1863) 늦은 봄 발행을 앞둔 최종단계에서 당시 대사헌(大司憲)이었던 송내희(宋來凞)의 글을 받았는데 그는 은진송씨로 자는 자칠(子七) 호는 금곡(錦谷)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다. 전봉준의 가계를 약기해 보면 5세 천성군(世柱)의 장자인 6세(仁亮)의 제2자 7세 문충공(昇)파로 분파가 된 이후 그의 5세손 12세 연산공(敏)파로 세분되었다가 그의 증손 15세 송암공(五常)파로 이어졌는데 그의 손자 17세 언국(彦國)파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고창파(高敞派)로 등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임술보]의 등재사항이 확인됨으로써 [병술보]에 고부파로 기재된 내용은 이제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술보]에 송암공의 손자인 언국이 고창파의 어른으로 기재되어 있기에 뒷날 고부파로 바뀌더라도 이미 고창파의 확실한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한 고증

필자가 고창 당촌 태생설을 발표할 당시로서는 [병술보]의 확인 사항만으로도 충분하겠기에 그리고 [임술보]의 기재사항을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 읽어만 보았을 뿐 당시에는 한질의 복사가 불가능한 실정이어서 복사본 입수가 안되어 심증만 굳힌 체 [병술보]만으로 발표를 하고 말았으나 오늘 이와 같이 재조명하게된 마당에 그때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겠다는 일념하나만으로 서두른 것이 보다 철저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게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되고 있다.

그동안 필자가 20여년간 현장을 발로 뛰어 엮어낸 자료조사를 통해 전봉준 장군의 태생지가 고창 당촌 태생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기록을 고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1960년대에 고창 지역에 생존했었던 고창 기로사들의 관계된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녹두장군의 아버지가 고창 당촌에 서당훈장으로 오게 되어 대소가가 모여 살게 되었다 한다. 그 선대에서는 빈한한 선비집안이어서 여기저기 형편대로 흩어져 살았고 수준들은 있어서 풍수에도 상식들이 넘쳐 겨우 생계는 유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전봉준의 선계를 보면 그의 7대조(彦國)는 부인이 광산김씨라는 기록외에는 공란으로 되어 예측할 수가 없는 실정이고 다만 [임술보]에서는 고창파 어른으로 [병술보]에는 고부파 어른으로 기재된 것을 보면 고창파의 파조로 있다가 고부로 이거한 이후에는 고부파의 파조로 전기만 된 것으로 미루어 볼 수가 있다.

6대조 후증(厚徵)은 태인현의 고현면(古縣面)에 내외간의 묘소가 각기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인근에 살았던 듯 싶고, 5대조 만기(萬紀)는 남원 북면(北面)에 합조된 것을 보면 근동인 것으로 추리가 되고, 고조 상규(相圭)는 순창 하치동(下峙洞)에 합조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순창 땅에 우거한 듯한데, [임술보]에는 관직 기록이 없고 24년 후의 [병술보]에는 통덕랑을 지낸 것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황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1726년생인데 [임술보] 발행년도 만해도 100세가 넘게 되어 터무니없는 조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증조(道臣) 내외와 종조(碩雲)내외가 임실 강진면 밤고개(栗峙)에 동원으로 설치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근동에 자리하고 살았다고 보아도 무방하겠기에 어디 일정한 곳에 세거지를 잡지 못한 듯했다.

종증조(德臣)내외는 임실에서 정읍 서이면(西二面)으로 분가해 이거한 듯 싶고 그곳에서 아들(碩文)내외도 묻히고 손자(基煥)도 동원(同原)을 이룬 것으로 보아 3대를 누린 것으로 짐작되는데 기환의 부인 전주최씨는 전봉준가를 따라 역시 고창당촌에서 살다가 서당촌 뒷산에 묻혔다. 또 증조(碩雲)의 아들 4촌 기필(基弼)내외가 당촌 뒷산 고개인 회암치(回巖峙)에 묻힌 것을 보면 임실에서 4촌간인 기창(基昶)을 찾아 당촌으로 합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전봉준가의 족보상에 나타나는 모든 당내지간들이 고창 당촌으로 모여 동학농민혁명이 폐쇄될 때까지 자작일촌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제 전봉준의 조부모를 [병술보]에 수록된 고부 남부면 진장문하(鎭長門下) 차복리(次福里) 앞등 갑묘용간(甲卯龍艮)자리에 투장하기 위해 1868년 윤 4월 16일 고부로 위장이사를 떠난 유명한 일화를 고로들의 증언을 통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필자가 1966년 4월 고창 덕정리에서 전봉준의 가계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던 중 덕정마을에 당촌 천안전씨의 취객 한 분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치형(徐致亨; 1888~1968-향년 80)댁을 방문했을 때 노구를 무릅쓰고 친절하게 근동에 알려지고 있던 일화한마당을 들려주었다. 자기 조부(徐源國; 1844~1871)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라면서 조부의 처가가 당촌에 살았던 전기술(全基述)이 장인이며 1남 3녀 중의 맞사위였다고 한다. 서당촌의 서당에서 성년이 될 때까지 수년간 한문공부를 배웠는데 그때 스승이 처가로 3종숙 뻘되는 전봉준의 아버지(基永 또는 基昶)여서 더욱 친숙하였다 한다. 전녹두의 아버지가 어느 날 만나자고 하더니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고 하니 제자들 중에 착실한 사람 두 사람을 더 골라 같이 그 일을 거들러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당 동문이었던 나이가 든 죽림사는 김재영(金在英)과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정인민(鄭仁民)을 골라 셋이서 상의가 되어 스승을 위해 도와 드리기로 약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셋이서 윤 4월 보름날 아침에 모여 회암재 아래 맥모등에 올라 전봉준의 조부 묘를 파묘하고 대꼬쟁이를 깎아서 낙근된 뼈를 갉아 내여 다듬고 백지에다 곱게 싸서 순서를 매기고 집에 모셔 놓았다가 이튿날 아침 일찌기 모아서 소달구지에 위장하기 위해 이삿짐과 함께 꾸려 멀리 고부까지 갔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사하는 것이지만 속셈은 스승의 재략에 의해서 가난해서 돈이 없으므로 아버지 묘를 명당에 투장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후에 고부 남부면에 당도하여 어느 마을집에 이사를 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스승이 인도하는 갑묘용간 자리를 찾아 밤중까지 투장을 깨끗이 끝냈다는 것이다. 그날 전봉준은 갓 열 세살을 넘은 작달막한 키에 당차게 야물진 몸매로 아버지를 따라와 투장하는 일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 너를 위한 일이니 잊지 않고 명심해 두라」고 일러 주었다. 꿈을 꾸어 내는 것 같아 모두들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이곳 삼신산 자락을 중심으로 뻗어 내린 곳에 호남의 팔대혈(八代穴)명당이 감돌고 있는데
첫 자락이 옥구임피 술산(戌山)
둘째 고부 영주산의 선인포전(仙人鋪氈)
셋째 흥덕 호암 금반옥호(金盤玉壺)
넷째 부안 석재와우(臥牛石峙)
다섯째 무안 회승예불(回僧禮佛)
여섯째 순창 오선옥(五仙玉)
일곱째 장성 손용낙사(巽龍落梭)
여덟째 영광 비봉귀소(飛鳳歸巢)인데

그중에 으뜸이 고부의 선인포전이라 : 선인이 털방석에 누어있는 형국이라면서 이곳은 자손이 창창하게 빛나는 형국이라고 일설을 늘어놓았다. 이런 스승의 속셈을 들은 세 사람의 제자들은 엄청 날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해서 명당 투장을 하고 왔노라는 유명한 일화가 고창지역의 유식한 선비 사이에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이와 같이 전봉준의 아버지(基永; 基昶)는 매사에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구상력이 넘쳐나는 인물로서 고창 당촌에서 계획적으로 고부입성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끝으로 기록을 통한 고증자료로 [병술보]보다 24년 앞서서 만들어진 장장 18권의 「천안전씨 대동보」를 내놓고자 한다. 이 [임술보]는 1862년 3월에 금산 광업재에서 간행되었는데 전봉준(鐵爐)이 7살 때여서 생존시의 가장 오래된 귀중한 족보이다.

특히 1권, 16권, 18권의 세권은 직접적으로 기록된 고증자료가 등재되고 있다. 전봉준이 두 살 때인 1857년 5월 17일에 타계한 조부(碩豊)의 묘가 당촌마을 뒷등인 맥모등(?母嶝)에 써 있다는 기록만 가지고도 고창태생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임술보]에 기재된 고창파의 내력은 제 16권의 끝 부분에 등재되고 있고 맨 위 우두머리 어른은 언국(彦國)으로서 대를 이어 8대가 실려 있으며 공람칸에는 「此派單牒 正印後入來故載錄 此篇日後修譜時更爲考正」 (이파의 단첩은 족보인쇄가 마쳐진 뒤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이편(卷 16) 끝부분에 게재하니 뒷날 족보를 다시 만들 때 상고하여 바르게 하라)고 엄히 수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족보 卷18 말미에 수록한 유사분정기(有司分定記) 중에 고창파의 수단 원고수집과 분담금 징수 책임자(收單收錢)로 전봉준의 아버지(全基永)명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기영이 족보인쇄가 끝난 후에 수보소를 찾아 수단을 실을 수 있게 한 것을 보면 비록 수단원에 불과하지만 전기영의 고매한 인품이 능히 짐작되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내 역적모의 사건으로 귀결이 지어져 아무런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 막막한 중에서도 이와 같이 기록의 고증을 찾아 내 놓은 것은 역사 발전을 위한 일대쾌거요 귀중한 밑거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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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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