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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영도자 전봉준은 고창 당촌태생

1894년 갑오년은 조선말기에 밀어닥친 근대화의 여명과 더불어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민중의 물결이 의식되면서 새로이 싹튼 궁반(窮班)과 농민의 저항은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구태에 쪄려있는 질서와 양반사회의 퇴폐의식에 진저리가 나다 못해 이에 대한 윤리적 항변으로 비약되어 마침내 동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태동시키면서 사대와 봉건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절실한 시대적 요청 속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권 운동으로 승화된 거룩한 새 역사의 장을 열고 동학 농민 혁명의 농민 봉기로 표출되었다.

이와 같이 천하의 대본을 민심에 둔 이 혁명은 민권.민생의 바탕 위에 우리 민족의 자조.자율.자강을 위한 민중의 항전으로써 반봉건 반사대, 반침략주의의 기치아래 민족의 자주의식과 인권 및 자유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고 자주 독립의 정신적 근간으로 이룬 새 역사 창출의 민족적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불과 1세기 남짓한 세월 속에서 이와 같이 이 엄청난 역사적 몸부림을 주도했던 전봉준의 태생에 대해서만은 그동안 여러 설이 분분하여 혼선이 거듭됨으로써 혼미일색이었던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토인비」의 말마따나 한국 사람들은 해양에서 대륙을 있는 반도국가의 지세로 인해 다리 위에서 사는 추세가 되어 매사에 성급하고 참을성이 없고 초조하고 불안하여 긴장한 나머지 빨리빨리의 습성에 푹 빠져 버린다는 이와 같은 습속 때문에 지난 일을 쉽사리 잊고 새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근세의 첫새벽을 알려준 민중혁명을 통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에 담긴 거룩한 의지의 자욱이 이리도 쉽게 묻혀 버렸단 말인가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고치고 모든 민족구성원이 평등의 원칙아래 자유를 누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근대적인 개혁이 필요하였고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부터의 힘에 대응할 수 있는 자주화의 절대적인 힘을 얻어내고자 맨 앞에 섰던 혁명의 영도자 전봉준의 족적이 이렇게도 허망할 수는 없는 일. 필자는 전문사학자는 아니나 오직 향토사를 지키는 순수한 열정으로 여기에 뜻을 세우고 오랫동안 집념을 두고 진력한 보람이 있어 「전국 향토사 연구 발표회1)에서 전봉준의 생시에 간행된 임술보(壬戌譜)2)와 병술보(丙戌譜)3)를 통해 전봉준의 태생이 고창 당촌임을 밝혀내고 또한 전봉준은 삼재공(三宰公)파가 아니고 문효공(文孝公)파임을 확인하고 그 뿌리를 내린바 있었다.

그러나 2003년 12월 19일 정읍시에서 주재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한 학술 토론회」에서 「전봉준장군 출생지 정립4)의 주제 발표를 통해 전봉준은 고부 진장문아래 차복리 부근의 마을에서 출생하여 유년기에 고창 당촌으로 옮긴 것으로 본다.는 새 주장이 나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학문은 확인이 필요한 것이지 추정이나 임의 규정은 무의미하고 용납될 수 없으며 이것들은 결코 확인사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소신껏 주장하면서 그 동안 발로 뛰어 현장을 확인하고 축적해 왔던 전봉준이 살아 있을 때 간행된 족보와 대대로 이어진 천안 전씨 세보 등을 조사 연구해왔던 생생한 경험의 산지식을 바탕으로 이 기회에 빈틈없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전봉준이 고창 당촌 태생임을 확인하여 재조명하고자 한다.

1) 제4회「향토사연구발표회」(1989. 10) 서울세종문화회관 대강당.
2) 壬戌年(1862)에 간행된「天安全氏世譜」
3) 丙戌年(1886)에 간행된「天安全氏世譜」
4)우윤「전봉준장군 출생지 정립」(2003. 12. 19)「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한 학술 토론회」주제 논문
5)우윤 앞의 글 p19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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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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