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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역사의 물결에는 항상 그 시대의 주인공이 있었다.

삼국시대의 주인공이 무사(武士)였다면 고려의 주인공은 무인(武人)과 승려였고, 조선의 주인공은 양반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 밀어닥친 근대화의 여명과 더불어 민중이 새 역사의 역량과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여기에서 싹튼 궁반(窮班)과 천민의 저항은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질서와 양반사회의 퇴페에 대한 윤리적 항변으로 비약되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시민사회가 귀족사회를 무너뜨린 '불란서 혁명'으로 역사의 궤도를 달리하게 되었던 19세기말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계적 조류와 정세가 일대 방향 전환의 물결을 크게 일으켰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고장에서도 사대와 봉건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 속에 그 역사의 전통이 맨 처음 전라도에서 세워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권운동의 새 장은 동학농민혁명의 농민봉기로 표출되었다.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의 유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만 요원하게 인식되었다. 때문에 반봉건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전주화약, 폐정개혁안 집강소 부분과 반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제2차 농민봉기의 목적에 대한 서술이 도외시되어 반봉건, 반침략을 표방하고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이, 우리나라 역사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꿔 놓은 일대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 우리민족해방 운동사 또는 민중운동사의 시발점이 뚜렷하긴 하나 아직도 그 성격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은 어느 뜻있는 학자에 의해 우리 역사가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의 괴리에서 자기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동학이 우리나라 근대 100년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ㆍ반사대ㆍ반침략주의의 기치 아래 민족의 자주의식과 인권 및 자유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고, 아울러 자주독립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어 왔다. 이와 같은 천하의 대본을 민심에 둔 이 혁명은 민권ㆍ민생의 바탕위에 민족의 자조ㆍ자율ㆍ자강을 위한 민중의 항전으로서 당시 사회상이던 정치적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세금의 과중 등으로 농민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고, 특히 외국 세력의 침투로 국가의 위험이 가중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농민들은 막연하게나마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풍조가 싹트게 되었으며, 동학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도로 발전, 단순한 종교를 넘어 농민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사회개혁과 외국 세력의 배척을 포함하는 정치적인 세력으로 삼남지방에 급격히 전파되었다.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은'축소지향정책(縮小指向政策)'에 따른 일제의 간계와 이에 동조한 친일 학자들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맥락 위에서 무모하게 인용하여 온 일부 학설들에 의해 불과 1세기도 안 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베일에 가려져 역사의 뒤안길을 맴돌아 온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마땅히 세계사조의 물결 속에 새 역사의 장으로 열려졌어야 할 동학농민혁명의 빛깔은 그 당시 탐관오리의 상징으로 부각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에 대한 단순한 농민들의 불평불만에 대한 봉기로 얼버무려 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기한 농민들을 외세에 대응하여 저항의식이 투철하였던 '동학군'들의 단순한 농간으로 몰아붙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당시의 전라도는 곡창지대로 관리의 토색질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서 대규모의 민란이 27회나 발생하였던 곳이다. 이 고부의 민란은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를 이루었다. 고부 군수조병갑의 혹세무민한 가렴주구에 분격한 농민들이 폭발적으로 봉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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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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