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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전투

홍계훈의 경군과 농민군은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이른바 완산전투이다.

하루 차이를 두고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경군은 28일 정오 무렵, 용머리고개를 넘어 완산(完山)에 진을 쳤다.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 밖에 안되지만 전주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어 홍계훈은 1,500여명의 군사를 건지산, 기린봉, 오목대, 황학대 등에 배치하였다. 길게 포위망을 형성하며 전주성을 에워싼 것이다.

그리고 본영은 용머리고개 남쪽 산 중턱에 설치하는 등 전투 준비를 마쳤다. 군진을 형성함과 동시에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를 쏘아 댔고, 이에 맞서 농민군 수백 명이 서문과 남문으로 나와 완산칠봉의 경군을 공격하였다. 완산전투의 첫 싸움에서 농민군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패배하고 말았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을 열고 나와 황학대를 공격하였으나 경군의 화포공격에 백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났다. 5월 1일 농민군이 남문을 열고 경군을 공격했으나 이때에도 경군의 화포공격으로 3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2일에도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이에 농민군은 서문을 열고 나와 용머리고개의 경군을 공격했으나 또 다시 화포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물러났다. 전주성을 배경으로 한 농민군과 경군의 최대의 격전은 5월3일에 벌어졌다. 농민군은 이날 아침 10시경부터 서문과 북문으로부터 돌진하여 사마교(司馬橋: 현 다가교 자리)와 부근의 하류를 건너 유연대(油然坮: 현 기전여고 북서쪽 최고봉)를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유연대 부군의 경군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농민군은 이를 추적하여 다가산을 점령한 후 다시 남진하여 용머리고개를 가로질러 경군의 본영이 있는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여기에서 경군 본영으로부터 대포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 용장 김순명, 아기장수 이복용을 비롯하여 200~5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고 성안으로 물러났다. 이때 전봉준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으며, 전투는 오후 6시경에야 끝이 났다. 4월 28일에서 5월 3일까지 벌어진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력상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황토재전투·황룡촌전투·전주성 점령 등으로 치솟았던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고, 궁지에 몰린 가운데 내부의 동요마저 이는 상황이었다. 3일 이후로 더 이상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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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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