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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 점령

경군마저 격파한 농민군은 빠른 걸음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농민군의 당장의 목표는 전주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전주는 감영의 소재지며 전라도의 수부(首府)일 뿐 아니라, 풍패지향(豊沛之鄕: 건국자의 고향)으로서 태조 이성계의 영정(影幀)을 보관한 경기전(慶基殿)과 시조(始祖) 및 시조비(始祖碑)의 위패를 봉사한 조경묘(肇慶廟)가 있는 영지(靈地)였다. 따라서 전주는 조선정부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봉기를 확대하려는 농민군에게 있어서도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발통문거사계획 단계에서부터 전주가 주 공격목표가 된 것도, 농민혁명의 시작과 함께 관군의 거점이자 농민군의 1차적 점령 목표가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남하하던 농민군이 감영병과 경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고 그 뒤를 홍계훈이 하루 차이로 쫓아옴으로써, 이제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성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전라감영 전주가 농민혁명의 중심무대로 떠오른 것이다. 전주성은 김문현이 4월 18일자로 이미 파면되었고 후임 감사 김학진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며 감영병은 홍계훈을 따라 남행하였으므로,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26일 농민군은 전주 삼천까지 진격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전주성 공략의 채비를 마친 2~3만여 명의 농민군은, 이튿날 전봉준, 김순명을 비롯하여 아기장수 이복용과 박선봉장 등의 지휘하에 서문밖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용머리고개에서부터 일자로 진을 펼치며 전주성을 압박하였다.

4월 27일 전주 서문밖 장날, 장터 건너편 용머리고개에서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 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시장판을 뒤엎었다. 별안간 난 포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고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한편 고함을 지르며 한편 총질을 하였다. 이때 전봉준 대장은 천천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로써 농민군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의 수부(首府: 한 도의 감영이 있던 곳)인 전주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전투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으며, 정부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청.일의 개입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경악한 정부는 이원회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조선시대 군무를 띠고 변경을 준검하던 특사. 주요 임무는 변방의 전반적 상황을 순찰하는 것임)로 임명하여 병력 1,400명을 인솔하고 전주일대의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긴급대신회의를 연 끝에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청나라는 병력을 곧바로 조선에 보냈다. 그리하여 2일부터 7일까지 청군 2,500여명이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을 끌어들인 것은 망국의 화(禍)를 스스로 재촉하는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청국의 파병은 오래 전부터 조선 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병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은 ‘일본공사관에 병사 약간을 두어 경비한다’는 제물포조약 제5관을 억지 근거로 내세우고 ‘조선 내 일본공사관원과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조선정부의 요청이 없는데도 5월 4일 출병을 통보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선정부가 일본의 출병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고 6일부터 12일까지 약 6,300여명의 병력을 조선에, 그것도 서울을 코앞에 둔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제 조선정부는 안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하고, 밖으로는 청.일 양군을 철수시켜야 하는 이중의 문제에 봉착하였다. 이 청.일 군대의 조선 진주는 농민혁명, 나아가 근대 한국 및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에 커다란 굴절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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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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