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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화-전주성 무혈입성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03.07
  • 조회수 : 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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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 무혈입성

 

전주는 감영의 소재지이며 전라도의 수부일뿐 아니라,

풍패지향(건국자의 고향)으로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한

경기전과 시조 및 시조비의 위패를 봉사한 조경묘가 있는 영지였다.

따라서 전주는 조선정부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봉기를 확대하려는 농민군에게 있어서도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1894년 5월 31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했다.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984년 2월 26일 고부 봉기 이후 한동안 주춤했던 동학농민군은 4월 25일 무장기포를 기점으로

전열을 재정비해 5월 10일부터 이틀간 정읍시 이평면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게 바로 ‘황토현 전투’였다. 황토현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전투를 벌여 거둔 최초의 승리로,

동학 농민군은 한껏 달아오른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주성 점령의 연료로 사용했다.

 

동학농민군의 황토현 전투 승리는 조정을 경악시켰다.

화들짝 놀란 조정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는데,

이에 따라 5월 10일 초토사 홍계군의 인솔하에 경군(京軍) 800명이 청국 군함 평원호를 타고

군산에 상륙, 이튿날 전주감영에 도착했다. 하지만 홍계훈의 경군은 싸움 전부터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잔뜩 눌려 있었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의 규모와 전투력에 놀라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했으며,

심지어 청군 병사를 빌려야 한다는 말까지 건의하기까지 했다.

 

5월 28일 장성에서 홍계훈의 경군과 처음으로 동학농민군이 맞붙었다. 결과는 동학농민군의 대승이었다.

그리고 5월 31일 마침내 전주성에 입성했다. 장성에서 패배한 경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기에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사실상 무혈입성이나 다름없었다.

전주성 입성은 봉기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자 성과였다.

전라도의 중심지이자 조선왕조의 본향이라 할 전주를 동학농민군이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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