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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유적지 답사 감상문-신승호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12.18
  • 조회수 : 266
동학농민혁명 체험 보고서
 
고창북고 1117 신승호
 
우리학교 1학년 전교생은 동학농민혁명 행사를 위해 아침부터 서둘렀다.
바람이 매섭게 불고 비가 올 듯 흐릿한 하늘을 피해서 대형 관광버스에 몸을 담아
우리는 먼저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포고문을 읽었던 곳인 무장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정말 추웠지만, 동학농민 혁명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유익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무장읍성, 전봉준 생가를 차례대로 들른 뒤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는 고창을 벗어나 정읍 동학농민혁명 박물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짧은 동영상과 함께 박물관 내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며 우리는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 체험 행사를 통해 알게 된 것 중, 이 혁명이 일어난 계기는 이러하다고 한다.
백성들에게서 수탈과 횡포가 끊이지 않았던 17세기,
고부지역의 새로 부임한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정말 극심했다고 하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전봉준의 아버지가 더 이상 낼 곡식이 없어 군수에게 찾아가 사정하니
오히려 곤장을 쳐서 죽게 만들어 그의 아들 전봉준이 분개했고,
때마침 비슷한 처지의 백성들이 힘을 모아들고 일어난 개혁이었다.
그들은 먼저 무장에서 포고문을 읽은 뒤 죽창 따위의 무기를 들고 무장읍성으로 진격하여 탈환하고
그 뒤 고창읍성, 이어 전주성까지 ‘무혈입성’하였다.
여기서 무혈입성이란 성을 싸움이나 아무런 피 흘림 없이 탈환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동학농민군들은 전주성에서 그렇게 전주화약과 함께 집강소 설치를 했으며
이는 근대 민주정치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산한 농민군들의 1차 봉기는 끝이 나고, 문제는 2차 봉기였다.
1차 봉기 때 위기를 느낀 조선은 청에 도움을 요청했고, 청과 함께 일본군도 조선에 와서
그 것을 빌미로 조선에 군사를 주둔시켜며 각종 내정간섭을 했는데,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농민군들이 다시 모였다.
일본군에 맞서 봉기가 일어났으나 일본군의 신식무기들에 농민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학농민혁명군들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비록 패배하였지만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싸운 우리 혁명군들, 조상들의 정신을 우리들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오늘 동학농민 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그 의의를 깨달을 수 있어서 유익한 하루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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