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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탐방 감상문(고창북고-임정묵)

  • 작성자 : 동학관리자
  • 작성일 : 2016.05.23
  • 조회수 : 105

감상문: 고창북고등학교 2학년 2반 임정묵

사람들은 녹두라고 하면 뭐가 떠오를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전봉준이 생각난다. 왜냐하면 녹두는 전봉준 장군의 별명이기 때문이다. 일명 녹두장군이라고 불리었던 이 남자는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글 솜씨와 사람을 이끄는 천부적인 재능이 합쳐진 그야말로 장군감이라고 불리울 만한 전봉준이 생각난다. 하지만 전봉준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노쇠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닌 동학농민운동을 하면서 나라의 역적으로 몰려 고문 받고 찍은 사진들 밖에 없었지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자 생각해보면 아파서 쓰러진 모습보다 맑고 깨끗한 눈빛의 굳건한 자세의 허리를 곧추 세운 모습의 사진들을 보면 정말이지 감탄할 정도의 의지와 우직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동학농민군의 주요 인물들의 사진도 다를 바는 없다. 그만큼 억압과 수탈이 심했기에 존재 할 수 있었던 사진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다음으로 선조들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는 전투가 무었이었느냐 말한다면 아마도 경군을 무찌른 전투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때 당시 대포는 일정거리의 사정거리가 있었다. 600미터를 날아가고 500미터 이하로는 쏠 수 없게 사정거리에 제한이 컷다 그걸 노리고 농민들은 한 가지 꾀를 내어 경군을 물리치게 되는데 그건 시장에 닭을 팔기위해 닭을 가둬 놓는 닭장을 가로 6미터 세로 2미터로 크게 만들어 그 안에 짚을 가득 넣어 굴리면서 날아오는 포탄을 튕겨내어 빠르게 경군을 무찌른다. 이 얼마나 완벽한 생각이 아닌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이와 관련 돼서 이때 이런 생각을 할 정도의 농민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인재에 등용하고 관리의 자리에 앉혔다면 우리의 일제강점기나 지금 미국과 중국 사이에 껴서 힘든 상황을 격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 당시의 정치 독점의 양반 가문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나간 일이니 되돌릴 수도 없다는 점에서 아쉬웠지만 선조의 지혜만큼은 다시 한 번 존경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국가가 하라면 하는 대로 반항의 개념의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원래 성격이 조금 소심해서 싫은 소리도 못하는 타입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용감하게 경군들과 싸우고 자신의 뜻을 널리 주장했던 전봉준 장군님을 비롯해 모든 참전자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한번 드리고 싶다. 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금 동학 농민운동 참전자의 후손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은 한국에 498명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유는 증거 불충분으로 몇 십 몇 백만 명이 참가했는데 만 명도 아니고 498명이라는 말에 아직도 국가는 이 운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다. 정말 안타가울 따름이다.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며 감상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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