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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유적지탐방 감상문(고창북고-김성표)-2018.05.31

  • 작성자 : 동학관리자
  • 작성일 : 2018.06.12
  • 조회수 : 88

반봉건 반외세, 동학농민혁명을 찾다

김성표 / 고창북고 2학년

 

 

  내가 다니고 있는 고창북고등학교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고창군에 위치한 학교이다. 나는 거의 1년 반을 고창북고등학교에서 생활하며 고창이라는 지역에 대해 많은 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본래 알고 있던 것보다 고창이라는 지역은 훨씬 더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한국 근대사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규모 농민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바로 고창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이번에 우리학교 2학년 재학생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들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바로 그 동학농민혁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동학농민혁명이란 1894년에서 1895년에 고창 지역의 무장 등지에서 일어난 반봉건·반외세 성격의 농민 봉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학교 한국사 수업에서 배울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조선 봉건 정부의 수탈이 극에 달했으며, 또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이에 맞선 민중들로부터의 혁명이 바로 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동학농민혁명은 고창이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것일까?

  이 운동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동학 교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운동이다. 그렇다면 고창이라는 지역이 동학의 중심지가 되어 활동을 전개했다는 말인데, 여기서 우리는 인물 한 명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이다.

  사실 그는 고창에서 나고 자란 인물은 아니다. 그는 정읍 출신의 인물로, 그곳에서 나고 자랐던 대지주 출신이다. 스무 살이 되던 1881년에 그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동학에 입교하게 된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포교와 동시에 차츰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 후에는 결국 남접을 대표하는 대접주가 된다. 그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면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자체의 인간적인 면이 훌륭했음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의 영향력을 확대해 준 사건으로는 도솔암 비기 탈취사건을 제일로 쳐줄 수 있을 것이다.

  도솔암은 고창에 자리한 선운사의 암자이다. 이곳에는 보물 제 1200호인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이 웅장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다. 나와 우리학교가 답사의 시작으로 방문한 곳도 이곳이었는데, 이곳에는 예로부터 한 가지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바로 도솔암 마애불의 감실에 있는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 한양이 망하고 새 세상이 올 것이라는 조선왕조 멸망을 암시하는 예언이었다. 문란하던 조선왕조의 봉건 질서의 상황 아래,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민중들의 바람은 더욱 커져갔고, 손화중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마애불의 감실에서 비결을 탈취했다는 소문이 확대되자 수만 명의 민중이 손화중의 포에 들기를 청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손화중의 영향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인물이 한명 있으니, 그가 바로 녹두장군전봉준이다.

  ‘동학농민혁명을 말할 때 대표되는 인물인 전봉준. 그는 1856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나와 우리학교는 다음 답사지인 전봉준 생가터로 향했고, 깔끔하게 복원된 그의 생가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전봉준은 자신의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사회개혁에 큰 뜻을 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5세 전후로 동학에 입교한 그는 고부지방의 동학접주가 되었고,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과 농민 두 가지를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의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는데, 그리 넓지 않은 자신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남접 대접주인 손화중과의 결합을 원했다. 총 세 차례의 설득 끝에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할 수 있었고, 그렇게 역대 최대 규모의 1차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전봉준 생가터를 떠난 나와 우리학교는 고창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무장읍성으로 향했는데, 이곳은 봉기 중에 간신히 화를 면한 곳으로 보존이 잘 되어있어 그 멋을 뽐내고 있었다. 무장읍성은 병마사 김저래가 고을의 승려와 장정 2만 명을 동원하여 4개월 동안 공사를 벌인 끝에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성의 둘레가 658보라고 하고 문종실록에는 읍성의 둘레가 1,470척이고 높이가 7척이며, 적으로부터 몸을 가릴 수 있도록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이 471개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옹성을 갖춘 문이 두 개에 성 둘레에는 2,127척의 해자가 파여 있었다고도 기록돼 있다. 무장현 출신의 농민군의 만류와 농민군에 대거 동조한 무장 서리들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던 무장읍성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그 당시의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느껴보고자 애썼다.

  우리는 무장읍성에서 동학농민혁명 홍보관으로 발을 옮겼는데, 이곳은 원래 신왕초등학교였다고 한다. 현재는 귀농귀촌학교로 1층에 홍보관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인 여시뫼봉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들을 알기 쉽게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장군기 등 잠시 준비를 하고 우리는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로 향했다.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1894320, 보국안민의 정신을 천명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지역적 민란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혁명으로의 출발을 알렸던 곳.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로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곳이다. 나는 3명의 학우와 함께 포고문을 선포하는 4인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가 되어보았다. 함께 흩날리는 깃발아래 서서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무장포고문의 내용은 아주 논리적이었고, 그 당시 농민들의 간절한 외침이 담겨있었다. 나라를 향해 반기를 든 봉기군의 선언이라기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문장 하나하나에서 녹아나왔고, 개인의 탐욕을 위한 것이 아닌 민중 전체의 염원을 담고 있다는 점은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행사 후 우리의 답사는 마무리 되었고, 나는 학교로 돌아왔지만, 이론적 지식으로만이 아닌 직접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본 하루의 열기는 채 가시지가 않았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적으로 이어진 동학농민혁명. 봉건 질서 속 탐학으로 고통 받던 민중들의 변혁 의지를 수용했던 이 밑으로부터의 혁명은 비록 외세와 결탁한 세력에 의해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일제에 맞선 3·1 운동부터, 1980년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의지를 드러내었던 5·18 민주화 운동, 최근 부패한 권력 폐단의 척결을 위해 전 국민이 함께했던 촛불혁명까지, 면면히 이어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지남(指南)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끝으로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갖게 해주신 모든 분들과 답사일 하루나와 우리학교 학생들을 위해 애쓰신 선생님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특히 나에게 항상 따뜻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시는 안후상 선생님께 가장 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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