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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65.11.5 신문-동학난과 전봉준 장군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03.05
  • 조회수 : 521
중앙일보 1965.11.5 신문-동학난과 전봉준 장군 1번째 이미지
중앙일보 1965.11.5 신문-동학난과 전봉준 장군 1번째 이미지
 

동학난(東學暖)과 전봉준 장군(全琫準 將軍)’

1965115() 중앙일보 기사

 

  지난날 28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 때의 전봉준(全琫準)장군의 진중 수행원이었던

김흥섭(金興燮)(갑오동학혁명의 증인이기도 함)이 세상을 떠나면서

토막토막으로 엮은 회고록을 남겨놓았다.

 다음은 기자가 입수한 김옹의 회고록을 통해 전장군의 면모와

동학혁명의 일면을 살펴보기로 했다. -전주 주재 이치백 기자(全州 駐在 李治白 記者)

 

읍 접주((邑 接主)들과 기병모의(起兵謀議)

김옹이 전봉준(全琫準)장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8931210,

무장(茂長)군 동음치 당산(冬音峙 堂山)(현 고창(高敞)군 공음(孔音))

송문수(宋文洙)씨 댁에서 전장군이 잠시 몸을 피하면서

동학교(東學敎) 접주 손화중(孫化中), 김성칠(金聲七), 정백현(鄭伯賢), 송문수(宋文洙)

네 사람과 자리를 같이하고 전라(全羅)감사 김문현(金文鉉) 폭정에 거의(擧義)할 것을 약속,

기포(起包)를 모의할 때였다. 그 후 1894(甲午갑오) 219일엔

당시 동음(冬音)면 신촌(新村)리의 김옹 집에서 다시 모여 행동준비를 구체화했는데,

여기 모인 사람은 전기 손···송씨 외에 김개남(金開南), 서인주(徐仁周), 임천서(林天瑞),

김덕명(金德明), 강경중(姜敬重), 김영달(金泳達), 고영숙(高永淑), 최재형(崔載衡)

각 읍의 접주들이었다. 김옹의 부친 김성칠 접주는 그 준비공작금으로 쌀 50섬을 내놓았다.

 

불과 닷새에 훈련(訓練)마쳐

전봉준장군을 도솔대장(導率大將)으로 한 동학군(東學軍)은 대장기엔

오색단(五色緞)으로 오만년 수운(五萬年 受運)’이라 새겼고,

각 포() 군기는 다섯 가지 색으로 나누어 나타냈으며

군졸들은 궁을군(弓乙軍)’을 붙이고 월여에 걸쳐 준비,

315일엔 부대를 편성, 5일 동안 훈련을 마친 다음,

21일부터 각지에 격문(檄文)을 보내는 등 행동을 개시하자

그동안 피신 중이던 수많은 교도들이 떼 지어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김옹은 전장군의 수행원이 되어 종군했는데

기거와 침식을 함께 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관군(官軍)에 쫓겨 변산(邊山)으로

1894610-전주(全州)서 강화(講和) 때까지 줄곧 전장군을 수행한 김옹은

그 후 대규모의 재기포때부터는 부친께서 집강(執綱)으로 출진했기 때문에 집에 돌아왔다.

그해 12, 동학군이 논산에서 일군과 연합한 관군에 의해 완전 패배되자

그는 부안(扶安), 변산(邊山)의 깊숙한 골짜기로 피신-거기서 약 5년을 지냈다.

논산(論山)작전에까지 참전했던 그의 부친도 요행히 살아남았다.

 

5척단신(5尺短身)이란 말은 과장

전봉준장군을 세상에서 5척단구라하여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다 한다. 언제나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단정한 차림으로 적진에 출동했던 전장군은 부하 아끼기를 친자식 이상이었다.

원래 서당훈장인 전장군은 문장이 훌륭했으며 동학군(東學軍)의 창의문, 격문,

포고문등은 일체 자신이 초했다. 김옹은 전장군이 부르는 대로 진중일기나

각처와의 연락문서를 받아 기록하는 등 지금으로 따지면 문서비서까지 겸했다.

흥섭(興燮)이 자네도 외우세....” 전장군이 새벽마다 애송하는 옛글이었다.

若時至而則 (약시지이즉)

能極人臣之位 (능극인신지위)

得機而 動則 (득기이 동즉)

能成絶代之功 (능성절대지공)

故君子潛居抱 (고군자잠거포)

道以待 其時 (도이대 기시)

 

선두(先頭)에서 독전(督戰)지휘도

황토현(黃土峴)싸움때의 일이었다. 동학군(東學軍)의 총은 말만의 총이었고,

몇 자루 안 된데다가 주로 고부(古阜)관아에서 얻은 것이어서 구식이고 낡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전장군은 맨 서두에 서서 출격진두지휘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하들을 전부 잠자게 한 다음, 자기 자신은 단신 관군의 진지에 들어가

정탐하기도 했다. 적이 투항해오면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엄명했다.

관군의 불의의 기습에 당황, 동학군이 마구 도망쳐버리자 전장군은 한 놈도 남김없이 잡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런 전장군의 독전으로 동학군은 황토현(黃土峴)서 대승을 거두었다.

 

밥상받고 옥사(獄史)에 호통

전장군이 관군에 붙들려 한때 손화중(孫化中)과 장성(長城)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처음 저녁밥상을 받고 보니 말이 아니었다. 걸인들에 주는 그대로였다.

전장군은 옥리를 불러 너희들이 나를 죄인이라고 이렇듯 홀대하는데

나는 다행히도 너희들의 죄인은 아니다. 성상(聖上)을 뵈면 충민(忠民)이요,

설사 죄인이라 할지라도 네놈들에게 천대받을 죄인은 내 분명 아니다.

당장에 이 상을 물리치고 대장상으로 바꾸어 오도록 해라!” 고 크게 호령했다.

옥리들은 벌벌 떨며 밥상을 바꾸어 들여왔다.

서울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을 때 마침 박영효(朴泳孝)가 나타나자

전장군은 분연히 일어나 너 이놈, 이 역적놈! 너는 위로 성상을 불안케 하고

아래로는 토색질만을 일삼아 백성들을 괴롭히니 네 죄를 네가 알 것이지

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느냐고 크게 꾸짖자 박영효(朴泳孝)는 전장군의 호통에 위압되어 황급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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