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내고장
- 작성자 : 류희춘
- 작성일 : 2015.12.04
- 조회수 : 1583
이 글의 제목은 만정 김소희(金素姬) 선생님(1917 - 1995)이 고창출신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재학중인 대학생들의 모임인 在京高敞學友會 (재경고창학우회)의 회원들에게 주신 글의 제목입니다.
당시 회장을 맡은 본인이 향토지 - "高敞誌"-를 발간하려고 원고를 부탁해서 얻은 글로 지금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965년 여름에 쓰신 글이며 서울 계동에 있는 다방에서 만나서 건네 주셨습니다.
지금 고창출신 신재효선생(1812-1884)과 명창 진채선(1847- ? )이 등장하는 판소리 영화 "도리화가
(桃李花歌)가 개봉되어 상영중인때라, 고창의 명인 김소희 선생의 젊은이를 향한 말씀을 읽는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사료되어 다시 소개합니다.
멋 있는 내 고장
김 소 희( 金 素 姬 )
“전라도”하면 으레 산수가 좋다거니 인재가 많다거니 물산이 풍부하다거니 등의 말들을 하고 있으나 한마디로 말 하자면 “멋”이 가장 많은 고장이라 자랑하고 싶다.
이 "멋“은 일조일석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요 유구한 문화적인 전통에서 싹터 자라는 것이니 아득한 옛날은 고사하고 이조시대(李朝時代)에만도 하고한 시인이 구름같이 쏟아저 나와 성대(盛 代)를 울림과 동시에 한편 우리 소설문학의 꽃인”춘향전“이 나타나 오늘의 자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신 재효(申 在孝)선생같은 명인(名人)이 나서 ”오바탕“의 판소리가 지어진 곳으로 다른 지방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는”멋“을 지녔었다.
따라서 오늘에도 그 흐름을 이어받아 고단한 살림에 허덕이면서도 오직 멋지게 살아 보려고 애쓰는 지방이 바로 전라도이고 그 중에서도 우리 고창(高敞)일 것이다.
내가 고향을 떠난 사십년인 이제 어찌 다 기억하리오마는 꿈 속에 가물거리는 그 조그마하고 아늑한 읍촌은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으며 기름진 땅에서는 풍부한 곡식이 집채와 나란하여 평화롭고 안락한 속에 서로가 그지없이 정다왔다.
어느때인지 기억은 감감하나 해가 저 어둑할 무렵 골목길을 걷자니 은은히 들려오는 음율(音律)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그골목을 지나 다른 골목을 접어들어도 역시 시조와 단소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그래서 머슴들까지도 짚신을 삼으면서“육자백이”를 하는데 마치 요새 흔히 들을 수 있는 유행가나 비슷하였다.
내가 성장한 뒤 들은 이야기지만 거기서는 음율을 모르는 이는 행세할 수 없게끔 되어 실기(實技)를 못하면 들을줄이라도 알아야만 신사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가산은 돌아보지 않고 음율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각자 맡은바 일을 끝내고 남은 시간에 서로 모여앉아 하루의 고됨을 풀었다. 그 때만 해도 먹고 입는 문제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적 여유도 있었지만 이른바 전통의 “멋”이 아니고서야 이랬겠는가 ?
그토록 멋지고 다사론 고향을 등지고 타관살이 수십년에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내 스스로도 우리나라 음율을 배워 창을 전공하고 있는데 실은 그 전통속에서 자라난 나로서 고향사람을 대할 때 부끄럽지 않게 하려는 노력만은 꿈에서조차 잊은 적이 없다. 그러던중 뜻밖에도 이번 무형문화재 제정에 있어 미력이나마 사계(史界)에 공헌이 있다 하여 외람히도 이름이 끼었음을 볼 때 다만 송구함만이 앞선다.더욱 열심히 가다듬어 헛된 이름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 뿐이다.
우리 예술에 대하여는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다 높이 평가하는데 오직 국내에서만이 등한시하는 점은 실로 유감된 일이나 머지 않는 장래에 국민 전체가 이해하여 환영할 것을 나는 믿고 싶다.
우리 예술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이어서 현대의 모진 감각을 융화시키는 본밑이기 때문에 끊을래도 끊을 수 없는 존재다.
내가 1962년에 프랑스 빠리에서 열린 “국제민속예술제”에 우리나라가 참가하게 되어 그 일원으로 참석했었는데 그 곳 평론가가 보고 “수 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의 예술로서 그 맑고 아름다움은 민족의 우수성을 상징함과 동시에 냉수를 마실 수 있는 나라”라 하였다.
또 1964년 미국 아시아학회 초청으로 당지를 갔을 적에도 미쉬간 대학 무용과 과장이 우리의 무용을 보고 “팔이나 다리에서보다도 마음에서부터 먼저 시작되는 철학적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여생을 국악에 바쳐 우리의 전통적인 가락을 되살림과 동시에 하루속히 대중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을 개척하여 “판소리”의 발상지인 “우리 고창(高敞)”을 다시 빛내게 함이 나의 사명(使命)으로 안다. 아울러 이것이 내 자신의 삶을 보다 멋지게 하는 길이라고도 생각한다.
196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