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창농악보존회 2023 문화유산활성화지원사업

농악으로 즐기는 삶의 여유
고창농악 상설굿판 2023

매월 마지막 주 목(木)요일
5월~9월
5.25 6.29 7.27 8.25금(꽃대림축제) 9.21

19:00 주막 '나무아래' 오픈
19:30 당산굿
20:00 판굿과 구정놀이
☎063.562.2044

주최·주관 : 사단법인 고창농악보존회
협력 : 고창군농악단연합회
후원 : 전라북도, 고창군
  • 2023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
고창농악 X 국악뮤지컬
이팝:소리꽃

5.27~8.19 신재효판소리공원 매주 토요일 저녁 7시 30분
주최_ 전라북도, 고창군
주관_ 고창농악보존회, 전북문화관광재단, 아트컴퍼니 고풍
후원_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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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시티투어

*고창시티투어 탑승요금 : 탑승료 1일권 2,000원(36개월 미만 무료)
*고창시티투어 운행시간 : 4월~11월 09:00~18:00(주말 및 공휴일 운영)
*고창시티투어 문의전화 : 063-561-0055(고창고속관광여행사)
				    063-560-2949(고창군청)
  • 고창군

사계절 꽃피는 도시, 고창으로 떠나봐요!
세계유산도시 고창

자세한 내용은 '고창 방문의 해' 를 검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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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군 주요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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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풍요롭게 찬란하게고창 방문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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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고장, 고창

  • 작성자 : 하춘도
  • 작성일 : 2007.02.27
  • 조회수 : 4221
 

바람의 고장 , 고창군

하춘도/상주시 거주 


저명한 사진작가에게 경주 남산을 찍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468m의 금오봉과 494m의 고위봉으로 이루어 진 남산. 남북 길이가 약 8km, 동서 너비 약 4km의 남북으로 길게 누운 형상을 하고 있는 남산은 평탄하고 높지도 않은 산이라 한 눈에 쏙 들어올 것 같았다. 남산을 일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기껏해야 서너 시간이면 되리라. 작가는 서너 달을 넉넉한 기한으로 잡았다.


웬걸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르니 산첩첩 문화재요 물첩첩에 역사가 비춰져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골짜기에 살포시 앉아있는 문화재는 왜 그렇게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작가는 장탄식을 하며 무거운 중형카메라를 소형카메라로 바꾸고 산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로부터 물경 3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경주 사진첩이 완성됐다고 한다.


고창은 선운사다. 고 미당 서정주 시인이 자랑하고 아꼈던 선운사를 보면 고창을 다 알 것 같았다. 고창은 관광의 목적지가 아니고 지나가다 잠깐 들르면 되는 지역이리라. 필자는 그런 마음으로 고창을 찾았다.


전날, 고창군 행정계의 오미숙씨에게 고창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다며 안내를 부탁하였다. 오미숙씨는 토요일이라 휴무인데도 불구하고 낯선 나그네를 맞이하기 위해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놀라운 일은 오미숙씨의 곁에 우리를 안내해 주기 위해‘문화유산해설사’자격증을 지닌 유영란씨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넓지 않은 지역이지만 ‘문화유산해설사’를 대동하고 살펴봐야 한다면 고창의 문화 유적 규모는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리라. 그리고 전화 한 통에 이방인을 안내하기 위해 문화유산해설사를 데리고 나올 정도로 정성을 쏟는 공무원의 열정이 나그네를 감동시켰다. 이것은 내 고장을 사랑하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결코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미치자 고창 사람들이 크게 느껴졌다. 문화는 스스로 높이고 존귀하게 가꾸어야 남들도 인정해 주는 것이지 스스로 얕보면 남들은 더 멸시하기 마련이다.


주마간산 격 답사지만 알찬 코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고창군 홈페이지를 보면 선운사 도립공원, 고창읍성, 고인돌공원, 미당시문학관, 동리국악당의 사진과 설명이 있는데 동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 터와 판소리 박물관은 고창군청에서 차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고창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았던 사람들은 질마재와 선운사를 들었을 터이고 그러면 보통 선운사를 찾아 발길을 헤매리라.


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서 한참 찾다가 돌아왔더니 뜰 앞에 핀 난초에 봄이 왔더라는 말처럼 고창의 또 하나의 보물은 군청에서 한 10여 분 떨어진 판소리 박물관과 동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 터에도 있었다. 동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고창현의 경주인(서울에서 지방을 대신하여 행정 사무를 하던 직책) 을 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고창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동리의 부모가 40이 넘도록 자식을 보지 못하다가 초산 월조봉에 치성을 드려 자식을 낳았으니 그는 곧 신재효다. 즉 초산 월조봉이 고창에 있으니 동리의 출생지는 고창이다. 그래서 내 고장의 인물인 동리에 대한 고창 사람들의 애정은 미당 선생에 대한 것만큼이나 각별하였다.


신재효 선생의 부친은 서울에서 경주인을 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고 한다. 동리 선생은 지방관아의 향리로 있으면서 부친의 재력을 바탕으로 판소리 문화를 일으켰으니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유럽의 문화가 부흥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 어떤 계기로 신재효가 판소리를 지원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설에는 향리의 직무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즉 향리는 지방 관청에서 열리는 행사에 판소리꾼들과 기생들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때 소리를 듣다보니 귀가 틔어 판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생점고 귀명창이다. 고 이병철 회장도 사업상 손님들과 소리 기생들을 불러 소리를 자주 듣다 귀 명창이 되었다고 하니 자주 접하다 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는 모양이다.


신재효 선생은 소리꾼을 키우고 그들의 역량을 알리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소리꾼은 신재효에게 보내라고 할 정도니 백록의 안목이 신재효의 청각에 들어앉은 셈이다. 판소리에 대한 신재효 선생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신재효 선생의 호를 딴 동리대상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신재효 선생은 19세기 후반(후기8명창시대) 지방향리 출신으로 광대가 아니면서도, 판소리에 심취한 후원가로서, 판소리 사설의 집성자로서, 이론가 비평가로서, 그리고 판소리의 지도자로서 당대에 가장 심대하게 판소리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신재효 선생은 당시까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판소리를 문자로 집성하여 판소리 체계를 세웠다. 말하자면 신재효 선생으로 인하여 판소리의 문자 시대로 들어섰다고나 할까.


신재효 선생은 평민으로 태어 난 것을 크게 한탄하였다고 한다.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절망감은 양반 사회를 삐뚜름하게 보게 되었고 집마저도 신분 차별을 조롱하는 방안으로 짓게 되었다. 대문에서 사랑채로 들어가는 마당에 가시덩쿨나무를 심었는데 천하의 누구라도 신재효 선생을 만나러 가기 위해 마당을 걸어갈 때 가시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재능은 없어도 부모 잘 만난 덕에 양반이라 불린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능멸하였으니 재능있는 영웅들은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법이다.


  포부는 천하를 휘어잡고 이 세상을 바꾸고 싶었으나 눈을 내려 깔고 고개를 숙여야 했으니 가슴에는 울분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홍길동도 서자로 태어난 신분 때문에 크게 한탄을 하고 집을 나섰으니 재능은 있으되 신분상 제약으로 이름을 떨치지 못한 자가 어디 한 두 사람이리. 요즘 들어 태생의 신분 제약이 없어 역사는 발전한 것 같지만 또 다른 신분상 제약이 현대에도 존재하고 있으니 요즘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신재효 선생은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고 명창들을 지원하였는데 당대의 쟁쟁한 판소리 명창인 이날치, 박만순, 전해종, 김수영, 정창업, 김창록 등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판소리 창단 최초의 여류명창인 진채선과 허금파 등도 신재효 선생의 전문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어찌 옛날에 예술 깨나 한다는 사람이 재능있는 여인을 마다하리. 그가 사랑했던 소리꾼이자 애첩은 진채선으로 흥선 대원군 앞에서 ‘도리화’를 불렀던 명창이었다. 대원군 또한 귀명창이 아니었던가. 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하던 남장 여인 진채선이 여자로 밝혀지자 대원군은 진채선을 숙소에 붙잡아 두고두고 사랑했다고 하니 재능 있는 예술가의 생애가 순탄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판소리 박물관에는 다양한 전시품이 있어 나그네의 눈길을 끌었고 공명체험장은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발길을 붙잡아 체험장으로 꾸며 놓은 폭포 앞에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아이들로 붐볐다. 신재효 선생의 초상이 너무 단아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영정이 있는가 물었더니 한솔코리아 공장장으로 있는 신정균 씨가 집안에서 그 분과 가장 닮았다는 얘기를 들어 그 분을 참조하여 그렸다고 한다. 죽으면 혼과 기백만 남겨지는 줄 알았는데 얼굴도 대물림 하는 것으로 보아 곧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도 내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차를 박물관에 두고 걸어서 고창읍성으로 갔다. 불과 5분 거리다. 고창읍성은 특이한 구조로 성문을 보호하고 있었다. 적들이 성문을 깨부수지 못하도록 성문 앞은 돌 성으로 에워싸여 있었고 경사진 곳에 자리 잡아 올라가기도 어려웠다. 고창읍성의 입구에 있는 ‘옥’이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 옥에 사람이 한 번도 갇혔던 경우가 없었다고 하니 오가는 사람들이 옥을 보고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 행동거지를 조심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계영배의 발상이 고창읍성의 옥에 자리 잡았다.


고창군 관광화보에는 고창읍성의 성벽에서 부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을 밟는 사진이 있다. 처음에 성을 쌓고 나면 돌이 제자리에 앉혀있지 않아 돌을 밟아 다져줘야 하며 부족한 돌도 가끔 보충해야 한다고 한다. 일일이 군사들을 시킬 수도 없어 고창 군수가 꾀를 내 부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을 밟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얘기를 퍼뜨렸으니 부녀자들의 일년 중 가장 큰 일이 성벽 밟기라고 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왜 몰랐겠는가? 하지만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이 세상사인데 그 꾀가 좋은 것이라면 속는 척 하는 것에도 삶의 묘미가 있다. 꾀라면 나쁜 것인 줄 알았는데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꾀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알고도 그것을 시행한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성벽에 오르니 고창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유영란 씨가 저 멀리 학교를  가리키며 미당 선생이 다녔던 고창농고라고 말한다. 그 학교는 약 100년의 전통을 지녔으며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우리나라 3대 고보중의 하나라고 자랑한다. 미당은 저 학교에 다니다 데모로 퇴학당하여 서울로 가서 넝마주이를 하다 인촌 김성수의 눈에 띄어 중앙고보에 다닐 수 있었다. 미당의 발자취가 고창 곳곳에 남아 있으며 하나의 흔적이라도 미당과 연관지어 얘기하는 고창사람들의 미당 사랑 마음가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시대는 인물을 낳고 인물은 역사를 만들어 가고 인물을 사랑하는 후손들은 그것을 전설로 남기려고 한다.

솥의 무게는 솥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솥에 가치를 주는 만큼의 무게가 있다는 얘기처럼 고창은 조그마하되 결코 적지 않은 곳이었다. 선조들의 삶을 곰곰 따져보면서 둘러보니 시간이 쉬 지나 간다.


서둘러 고창읍성을 빠져나와 윤도장(輪圖匠) 김종대 씨를 만나러 성내면으로 갔다. 윤도장은 풍수가나 지관이 사용하던 나침반을 만드는 기술 또는 기술자를 말한다. 김종대씨는 지난 1996년 12월 3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윤도란 나침반으로, 일정한 방향을 가르키는 자침을 이용하여 지관들이 산자의 삶의 터인 양택을 구하고 죽은 자의 음택인 무덤을 찾는데 아주 긴요하게 쓰이며 지리상의 방향을 알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은 삶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며 삶 속에 죽은 자의 영혼이 함께 한다는 정신의 발로이다. 외국의 나침반은 단순히 방향을 찾는 것이나 우리 조상들이 만든 윤도는 방향과 사주가 녹아있어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준다. 요산(樂山)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요수(樂水)하는 자가 있을 진대 이것을 패철로 찾아 준다니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윤도는 지관이나 여행객들이 항상 몸에 차고 다닌다고 하여 패철, 자침이 남쪽을 가리킨다고 하여 지남철이라고도 부른다. 윤도는 풍수지리를 실생활에 활용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품이다. 윤도는 중심에 자침을 두고 24방위를 기본으로 여러 개의 동심원에 쓰인 방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윤도에는 음양, 오행, 팔쾌, 십간, 십이지 및 24절후가 조합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때문에 윤도는 고대 동양인들이 우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고로 체계화한 음양오행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고창군 성내면에서는 400년 전부터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해왔고 정,한,김씨등이 조상대대로 기술을 이어받아 제작해 왔으나 지금은 유일하게 김씨에 의해 유지해 오고 있다. 윤도장 전수관은 지난 2003년 김종대 선생의 생가터 옆에 들어섰다. 고창군 성내면 신림리 양계마을 햇살 좋은 자리에 지난 2002년 고창군의 군비지원을 받아 대지 500여평에 50여평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1층에는 작업실과 자료실을,  2층에는 윤도제작을 위한 도구와 윤도의 제작과정, 완제품 등 전시시설을 갖추고 우리나라 윤도장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고창 최초의 윤도는 낙산마을 전씨 가문에서 나침반의 설계도와 자석을 만들 수 있는 원석을 구해오면서부터 시작됐다. 김 명인이 윤도 만드는 법을 처음 배우게 된 것은 그이 나이 22세 때. 군대를 막 제대 한 후 조부로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받으면서 반 백년에 걸쳐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부(김권삼)와 백부(김정의)에 의해 200여년을 이어오면서 그의 손기술은 장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의 작업실에는 할아버지 때부터 유산으로 내려오는 300년 된 신기한 자석원석이 있다. 이 원석에 바늘을 30여 분가량 붙여놓고 있으면 저절로 자력이 생겨 윤도의 바늘이 된다.


조선 시대에는 명 지관들이 ‘성내 윤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명지관이 아니다’ 할 정도로 고창의 윤도를 선호했다고 한다. 김 명인이 만드는 윤도는 200년 이상 된 대추나무를 사용한다. 생목을 1년 동안 물에 담궈 진을 뺀 다음 2~3년의 은근을 거친 다음 다시 2~3년을 더 말린다.  최소 6년 이상 된 대추나무만을 고집한다고 하니 명인의 정신은 재료의 선택과 다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김 명인이 만드는 윤도는 그 종류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유리가 달려있는 면경철, 부채에 달고 다니는 선추, 풍수 지관들이 이용하는 보통패철 그리고 장식용으로 쓰이는 거북패철 등이다. 몇 해 전 김 명인이 만든 나침반이 전국 토산품 박람회에서 특상을 받기도 하여 그 가치성이 높이 평가된 바 있다. (새전북신문 박제철기자 자료 인용)


정말로 중요한 나침반의 기능은 사람이 제 자리를 잡도록 도움을 주는데 있을 것이다. 이리 저리 여러 방향에 휘둘리지 않고 제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비단 지리상의 방향 뿐 아니라 삶에서도 중요할 것이다.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자침 방향에 절개와 고고를 적어 놓고 재물에 눈이 멀거나 생활에 빈한함을 느낄 때 그 글을 들여다보면 마음에 평안함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 내 생활의 중심은 당대의 물질적 풍요함이 아니라 대를 이어 존경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감히 허튼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미당을 키운 팔할의 바람을 맞으려면 미당의 집으로 가야한다. 미당의 집은 앞쪽이 바다로 미당은 그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의 나무를 키웠을 것이다. 갯내음 나는 바다 바람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 저 바다를 떠가는 배는 바다 바람을 뒤로 하고 어디로 갈 것이며 바람을 등지고 오는 배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미당은 한 때 집 부근에 있는 초등학교에 둥지를 터고 생각을 정리하였다고 한다.


이제 자연의 바람을 뒤로하고 미당의 생각 바람을 맞기 위해 선운사로 가야한다. 미당의 생각을 키운 것은 바다 바람이지만 미당을 성숙하게 만든 바람은 선운사로부터 불어올 것이다. 고창을 고창답게 만든 것은 선운사이며 선운사와 동백꽃을 널리 알려지게 한 이는 미당 선생이시다.


  선운사는 누가 뭐래도 고창에 있어야 되며 그런 연유로 미당이 선운사 입구에서 육자배기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미당은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고 ‘선운사 동구’에서 노래했다. 육자배기는 남도를 대표하는 문화로 삶의 애환을 애드립으로 표현한다. 정해진 주제는 있으되 표현방식이나 양식 등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선운사는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사찰 뒤편을 둘러싼 빽빽한 동백림으로도 알려 졌고 기둥이 짜 맞춤으로 버티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선운사 앞 마당의 차밭도 유명하다. 눈을 뒤집어 쓴 차밭이 보성이나 화엄사의 차밭과도 달랐다. 보통 차 밭이라면 산비탈에 있는 줄 알았더니 이곳에서는 차가 평지밭에 줄지어 서 있었다. 사과를 먹어 보지 않고 그 오묘한 맛을 표현할 수 있을까? 선운사의 멋이 그랬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가보는 것 외에는 달리 얘기할 방법이 없으니 나그네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선운사는 한 번 가보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그것도 이른 봄, 동백꽃이 활짝 피었을 때가 좋다고 하니 때 맞춰 가는 수 밖 에 없다.” 


후기 : 유영란 씨는 도시에 살다 부모님의 병환을 치료하러 고향에 내려 왔다. 도시에 비해 열악한 교육 환경으로 자녀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할까 우려한 유영란 씨는 자연이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도시락을 싸 식물도감을 옆에 끼고 고창 이곳저곳을 다녔다. 아이들이 없는 농촌의 노인들이 유영란 씨와 그 자녀들을 살갑게 맞아주었다. 노인들은 정이 들자 구전으로 내려오는 얘기들을 풀어 주었다. 유영란 씨의 강점은 노인들로부터 들은 풍부한 잡설과 야사를 구수하게 풀어내는 것이다. 그는 2004년 문화공보부에서 양성하는 ‘문화유산해설사’ 양성반에 고창 사람 10명과 함께 뽑혀 2달 동안 교육을 받았다. 기존에 얻었던 지식에 공부를 더하여 유 선생의 강의는 청산유수였다. 해설을 얼마나 재미있게 하는지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아이들의 말 “낯선 말이 사람 잡네.” 문화유산해설사란 낯선 단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는 표현이다.

                                                                                        (주간상주 2006년 3월 13일, 3월 31일 2회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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