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이란미와 예술활동 및 그 소산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말한다. 판소리와 같이 예술에 대한 평가가 관중에 의한 즉석에서의 반응이 그 중요한 평가가 되는, 이것들은 판소리 미학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고 볼수 있다.

미학이란 미와 예술활동 및 그 소산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말한다. 어떠한 예술이든지 그것이 출현하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미적 향유의 대상이 될 때, 그 대상 예술에 대한 미적 판단의 기준들, 미적 의장들에 대한 논의들, 감상들 등 그 정수를 논하는 담론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수많은 논의를 거쳐 미학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사실 판소리와 같이 예술에 대한 평가가 청관중에 의한 즉석에서의 반응--공연의 과정에서 청/관중의 추임새--이 그 중요한 평가가 되는, 청/관중과 공연자가 탈경계화되는 예술의 경우, 공연자들 사이, 향유자들 사이, 그리고 공연자와 향유자 사이에는 미적 판단의 기준들과 용어들이 통용되기 마련인데, 이것들은 판소리 미학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각 요소들/예술적 장치들의 관계, 배합, 균형, 조화 등을 설명해 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판소리가 구현하고자하는/구현하고 있는 미의 세계의 단면과 이를 구현하는 독특한 방식을 설명해 준다.

이면을 그린다

"이면을 그린다"는 것이 판소리의 예술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소리에서 "이면을 그린다"는 것은 서사내용(문학적인 면)과 부합이 되게 노래(음악적인 면)를 부르는 것, 또는 달리 말하면, 어느 대목의 사설 내용이나 철학적 바탕을 음악으로 잘 표현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면을 그리는 부분은 단지 어떤 일련의 대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단어의 차원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어떤 단어가 가리키는 사물의 이면, 일정한 상황의 이면, 서사단위의 이면을 그리는 것으로 확대되고, 이것이 선조적으로 이어져 결국 한 판의 이면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소리에서 이면을 그린다는 것은 미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면을 그린다는 것은 두 단계의 차원을 거쳐 이루어진다. 이면을 그려지는 대상은 먼저 언어로 포착된 사물/사건의 세계다. "푸르러지고", "탕탕한 물결이라". 그러나 언어는 이러한 사물의 변화나 상태를 지시하는 하나의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기호일뿐, 사물의 세계를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이렇게 언어로 포착된 세계를 소리/성음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면을 그린다는 것은 언어의 차원을 뛰어넘어 보다 감각적인 차원으로 사물/사건을 표현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일단 언어로 포착된 사물/사건의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창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으며, 그 표현도 달라질 것이다. 즉 이면을 그린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대한 사회적 의미, 특히 사건들이 계열화됨으로서 띄게되는 의미의 공동체적 해석에 개인의 주관적인 창조적 해석이 덧붙여져 이루어지는 판소리의 예술적 목표인 것이다.

한의표출-시김새

시김새는 우리 음악, 특히 판소리의 멋과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 판소리 창자가 소리를 치켜 올렸다. 꺽어내렸다. 궁글렸다 뒤집었다 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부여하는 일종의 발성의 기법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소리를 떨거나 음정에 다양한 고저의 변화를 줌으로써 그 음을 한결 미묘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른바 장식음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훨씬 더 미묘한 변화의 폭이 깊고 넓고 깊다는 점에서 서양음악의 그것과는 큰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발성법에 있어서 이런 유동성이 서양음악의 경우는 극히 부분적인 것인 데 반하여 판소리에 있어서는 거의 전반적이고도 한결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김새는 단순히 장식음이라는, 발성의 기법적 차원을 넘어서서 판소리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는 용어라고도 할 수 있다. 시김새라고 할 때의 <시김>이라는 말은 <삭임>(소화시키다,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다)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그 시김새란, 판소리 창자가 수련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그 가락이 제대로 잘 삭고 익어서 예술적인 멋을 성취하게 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말하자면, 판소리의 가락을 잘 소화시키고, 그 오묘한 경지를 터득하여 차원높은 예술로 승화시켰느냐, 하는 정도나 차원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김새를 얼마만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판소리의 예술적 차원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소리에서 청을 얻고(이를 득음이라고 한다), 자기 나름의 가락을 터득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다시 <시김새>를 갖추기까지에는 하루 이틀의 공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어린 묘목이 거목으로 자랄 때와 같은 삶의 경륜과 더불어서 익어가는 것이 이 시김새라고 말할 수 있다. 판소리에서는 ‘한'이라고 하는 정서의 표출은 이 시김새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이라고 하는 정서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고, 시김새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삭임(소화시킴)의 과정을 통해 해방되기에 이른다. 즉 판소리에서 한이라고 하는 정서는 이런 삭임의 과정을 통해 표출되고 극복되는 것이다.

한의표출-그늘

판소리에서 ‘그늘'이라는 것은 소리의 바탕에 깔려 있는 오묘하고도 융숭깊은 어떤 멋 혹은 여유 같은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시김새>를 일러 묘목이 거목으로 이루어질 때까지의 긴긴 피나는 공력의 시간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면, <그늘>은 그런 총화에서 성취되어진 어떤 높은 경지 같은 것을 표상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씨가 땅에 떨어져 비와 바람을 견디며 끊임없이 자라는 과정을 시김새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거목으로 자란나무가 울창한 가지를 드리우며 온갖새들을 그 품안에 싸안는 너그러운 운치를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럽고 한스러운 가락을 삭이고 익히는 과정에서 시김새가 붙고, 마침내 그늘이 드리워지게 되는 것이 한의 예술로서의 판소리의 표상인 것이다.

귀명창

소리를 할줄은 모르지만, 그것을 많이 들어서 깊이 감상하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공동체에 기반을 둔 이야기의 스토리라인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앞서 논급한 것처럼, 그 이면을 그리는 소리의 미학적 깊이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창자의 이면의 해석과 그 미적표현의 오묘한 깊이, 그 가락이 제대로 잘 삭이고 익혀서 예술적인 멋을 성취하게 된 상태, 그리고 이를 통해 드리워진 운치의 그늘은 이것을 감상할 수 있는 높은 감식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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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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