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 가담자

  • 총 참 모 : 오시영
  • 비 서 : 정백현(공음면 구정출신으로 전봉준장군 비서)
  • 수 행 : 김흥섭(무장면 원촌출신으로 전봉준 수행원)
  • 두 령
  • 고 창 : 오하영, 임천서, 임향노
  • 무 장 : 송경찬, 강경중
  • 흥 덕 : 고영(원)숙 성내용교출신으로 1894. 12. 26 정읍에서 사형
  • 군 장
    • 고 창 : 홍낙관, 홍계관
    • 무 장 : 송문수(공음면 당산리 1894. 12. 03 영광에서 사형) 송진호, 장두일, 곽창욱
    • 흥 덕 : 고영백
  • 집강 및 기포장
    • 고 창 : 장동행,김수병(고창읍 월곡리. 1894. 12. 06 고창형장에서 처형),엄대영 (고창읍 덕산리 1858. 생)
    • 무 장 : 최서중(1894. 12. 28. 광주에서 처형), 송병욱(해리면 수락),김병은(1894. 12. 12. 체포 효수),
  • 박경석(사망. 1894. 12.12 物故)
  • 동학군 처형 : 고창일, 우복록(기포장 최서중의 마부로 1894. 12. 28. 처형) 서재성(살인), 이동술(살인)
  • 무 장 : 고순택(38세: 1895. 3. 29 무죄로 석방), 양상집(1895. 1. 16 압송),송진팔(외 18명) 1894. 12. 12
  • 흥 덕 : 서상은 (성내면 은동 1894. 고종 6년 生)
  • 사발통문서명자
    • 정종혁(부안면 검산리 1862년 초명 종묵)
    • 황채오(성내면 신성리 1854년 초명 성모) 1894.12. 16 나주에서사형
  • 접 주
  • 고 창 : 홍동관, 한학천, 신정옥(독립접주)
  • 무 장 :
    • 김성칠(무장면 원천리-김흥섭의 父)
    • 표종길(상하면 장호리)
    • 이재현(해리면 왕촌리)
    • 조성원(해리면 사미동)

강경중 (姜敬重, 미상~1894)
무장 탁곡면 강남리(江南里)에서 진주강씨(晋州姜氏) 후손으로 태어났다. 1892년 8월 선운사 상도솔 미륵불의 복장 비기 탈취사건때 오지영(吳知泳) 고영숙(高永叔) 접주등과 주모자로 지목되어 무장관아에 체포 되었었다. 1880년대에 무장지역 동학교단과 교도를 이끌어 온 무장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으며 1894년의 3월 봉기때 송경찬(宋敬讚)등과 1300여 농민군을 이끌고 9월 재봉기 때까지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동학의 팔도도성찰(八道省察)이 되어 부성찰(副省察)인 허용(許鏞)과 함께 1894년 11월 30일 청산동사에서 상주(商州) 민보군(民保軍)에 체포되어 포살 당하였다.

고성천 (高成天, 미상~1894. 12)
흥덕 이동면 내옥리 內玉里 출신으로 1894년 당시 동학농민군 접주로 활동하였다. 흥덕현감의 보고에 따르면 “고성천은 이번 여름 이후에 평민과 선상 船商의 재산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적지 않았고, 10월에 군사를 인솔하여 나주에 갈 때에 선봉으로 불렸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동료 강윤언 ·김태운 ·추윤문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그해 11월 흥덕현의 장리 將吏와 민병 民兵에게 체포되었다. 이들은 조사를 받고 군민 軍民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으로 처단되었다.

고순택 (高舜澤,1858~1895)(자, 舜澤(順宅) . 본명, 昶柱)
무장 동음치면 당뫼(堂山里, 현九水川)에서 장흥고씨(長興高氏) 제량(濟良)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재골이면서 무예에 능하였다. 일찍이 송문수 대장의 천거로 동학에 입도되어 문덕중(文德仲)과 함께 송문수 휘하의 군장(軍長)으로 1894년 3월의 무장기포에 핵심요원으로 가담 9월 2차 봉기 이후 관군에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문중의 배경을 힘입어 1895년 3월에 무죄 방면되어 내려오는 길에 고부(古阜)에서 다시 붙잡혀 무장에서 농민군 73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고영백 (高永伯, 미상~1894)
흥덕현의 이동면(현 성내면) 다리골(橋洞)에서 장흥(長興)고씨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동학 접주가 된 고영숙(高永叔)과 친족 간으로 그에 영향을 받아 1894년 3월 무장기포때 고두령(高頭領)이 7백여 명의 농민군을 인솔함에 그도 역시 고태국(高泰國)과 함께 세태의 가렴주구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비장한 결의로 농민군에 가담되어 맹활약을 하였다. 그해 12월 26일 고영숙과 함께 정읍에서 피체되어 통위영군(統衛營軍)에 의해 처형되었다.

고영숙 (高永叔, 1871~1894)(자, 永叔 . 본명, 濟中)
흥덕 성내면 교동(橋洞)에서 장흥고씨의 후손으로 출생 흥덕의 대표적인 접주로 성장하여 1894년 3월 무장 당뫼(堂山)골의 제1차 봉기이후 흥덕고을의 두령으로 7백 명의 농민군을 인솔하였다. 1894년 12월 26일 정읍에서 체포되어 수성장(守城將, 朴里炫)과 좌수(座首, 柳孟煥)의 입회하에 통위영군(統衛營軍)에 처형당하였다.

고태국 (高泰國, 미상~1894)
흥덕 이동면의 다리골(橋洞)에서 세거해온 장흥고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흥덕의 접주 두령 고영숙과 근친간인 그는 청년기에 고두령의 천거로 1894년 3월 제1차 무장기포때 고두령이 이끈 7백여 명의 농민군 일원으로 고영백과 함께 수령들의 가렴주구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싸워서 분풀이라도 해야겠다.」는 비장한 결의로 농민군에 가담되어 좌충우돌의 맹약을 거듭하였다. 패전이후 그해 12월 26일 고영숙 두령과 함께 정읍에서 붙잡힌 그는 통위영군(統衛營軍)에 처형되고 말았다.

곽창욱 (郭昌郁(玉),미상~1894)
무장읍내 시거리(市巨里)에서 현풍(玄豊)곽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894년의 3월 제1차 무장기포때 송문수 대장의 휘하에 가담한 그는 영광에서 장두일(張斗一)과 함께 송대장의 부하로 활약 두령에게 충성을 다해 왔는데 패전 후 송대장과 함께 이현숙(李鉉淑)이 이끌던 민보군에 체포되어 12월 5일 영광 관아에서 집단 처형되었다.

구재안 (具宰安) 생존기간 미상
흥덕 출신으로 1894년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피신하였다. 구체적인 죄명은 “백성들의 소요를 지휘하고 이방 吏房을 임명”하였다는 것으로, 이후 충청도 중영 中營에서 체포하여 1895년 3월 19일 전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그해 8월 함열 咸悅에 유배된 사실이 확인된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국인영 (鞠寅映,1871~1961)
흥덕 북면 후포리에서 담양국씨(潭陽鞠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흥덕접주 고영숙(高永叔)의 천거로 동학에 입도 접주가 된 그는 1894년 3월 무장기포에 참여할 때 옆집 유종철(柳鍾喆) 가의 각종 무기를 빌려가지고 선군장이 되어 농민군을 지휘하였다고 하며 무장 당뫼에서 출발 무장읍과 고창 당촌을 경유 사포, 후포에서 하루밤 숙영하도록 녹두장군을 설득시킨 선군장이 바로 국인영이었다 한다. 동학농민군이 패퇴한 이후 내변산으로 깊숙이 잠적한 그는 오랫동안 도피 유랑생활로 일제 강점기를 넘기고 조국 광복이 되어 귀향 1961년 91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김기학 (金箕學, 1870~1936)
고창 고사면 은동(隱洞)에서 광산김씨 전리판서 공파 후손 김상휘(金相輝)의 아들로 출생. 신촌(莘村)의 부자 서익서(徐益瑞?源國)의 맏사위가 되었는데 그의 장인이 녹두장군 아버지(全基永)의 서당 제자로 공부할 때 전봉준 장군과 밀착이 된 연유로 녹두장군이 무장에서 1차 봉기할 때 함께 가담하였는데 사위도 장인을 따라 25세에 친위부대의 호위병으로 참여하여 장인을 호위하면서 영광, 함평, 장성을 거쳐 전주로 진격할 때 용머리 고개 전투에서 사활을 건 죽을 고비를 끝내 극복해 냈으며 9월 2차 봉기에 다시 가담하였다가 역적으로 몰리게 됨에 나주에 있는 외가 집안으로 은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김낙종 (金洛鍾, 1851~1895)
무장 공음면 용산(龍山)마을에서 부안김씨(扶安金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족형인 동학접주 김낙봉(金洛峰)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한 그는 1894년의 3월 무장기포에 가담 백산봉기와 9월 2차봉기에도 참여하였다가 패전이후 이듬해 봄에 용산 마을의 등룡골에서 민보군에 의해 집단 사살을 당하였다.

김도순 (金道順) 미상~1894. 12
흥덕 이남면 해천 海川 출신. 그는 재인才人으로, 1894년 동학농민군의 접주가 되어 활동하였다. 흥덕현감의 보고에 따르면 “김도순은 원래 천인으로 접주를 칭하고 그 무리를 풀어서 양반을 잡아다가 때리며 노략질 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해 11월 동료 12명과 함께 흥덕현의 이교와 수성군에게 체포되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김병운 (金丙云, 1843~1894)(자, 子範. 본명, 圭一)
무장 하리면 장암리(壯岩里)에서 청도김씨 김이진(金以珍)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였다가 1894. 3. 20 무장기포에 가담 군수전(軍需錢)을 출연하고 9월 2차 봉기에 참전하였다가 12월에 관군에 피체되어 무장고을에서 효수형(梟首刑)을 당하였다. 부인 조씨(趙氏)가 형장에 나와 효수된 머리채를 치마폭에 안고 겨우 시신을 수습한 후 장사를 지내고 멀리 정읍 장재동(長才洞)으로 이거 후손의 목숨을 부지하였다고 한다.

김성칠 (金聖七, 1855~1901)(자,東一 . 호, 粹菴. 초명, 聖七 . 본명, 夏一)
선대의 세거지가 광산군 용곡(龍谷)이었는데 아버지(文厚)가 훈장을 맡아 무장 청해면 하련리에 우거하다가 그가 무장 신촌(新村)으로 옮겨 훈장생활을 지속하였는데 재산도 모아 큰 서당을 차리게 되어 시천주(侍天主)를 믿는 민족 신앙인이기도 하였다. 손화중 대접주 송문수 대장 녹두장군 등이 보국안민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의 장소로 그의 집을 중심축으로 하여 거사를 논의 하였는데 1894년 3월 1차 봉기 때에도 그는 군자금으로 벼 50석을 쾌척하였었다. 그리고 손화중 접주와 협의가 되어 그의 아들 흥섭(興葉)을 녹두장군의 호위 수행원으로 천거하였는데 그의 서당체는 「남접도소」(南接都所)의 본부가 되었으며 그는 무장집강소의 장두(長頭)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김수병 (金秀炳, 1866 ~ 1894)(호, 雲齋 . 본명, 容秀)
김해김씨 삼현파의 20세손 봉환(鳳煥)의 아들로 고창 읍내에서 태어났다. 기골이 장대하고 오달진 성품이 넘쳐 읍내 젊은 패거리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1890년 어느 장날 홍낙관 접주의 건사한 시국담에 홀려 뒷날 1894. 3. 20. 동학 농민군이 봉기할 때 홍낙관이 이끄는 천민부대의 선봉장으로 가담 고창읍내 청년들을 규합 주도적 역할을 도맡았다. 농민군의 최선봉에서 진군하여 많은 활약을 거듭하였다. 농민전쟁의 실패로 몰락이 되자 두목격인 그는 당당히 수성군(守城軍) 앞에 불호령을 내린 뒤 스스로 붙잡혀 들어가 12월 6일 29세의 한창 나이에 고창 숲정골 형장에서 목숨을 내어 놓았다. 수성군들이 기둥에 묶어 놓고 관솔불로 머리통의 쥐구멍에 불을 붙여 머리골을 터뜨려 죽이는 참혹한 주검으로 귀중한 생을 마감하였다.

김양두 (金洋斗, 1845~1895)(자, 士益)
부안면 선운리에서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 후손 창강(昌强)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6(고종23년)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1894년 9월 2차 봉기에 가담 종횡무진하게 활약하였는데 패전 후 가까스로 퇴각하였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1895년 1월 5일 고창현아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김영달 (金永達, 1852~1894)(초명, 永達 . 자, 永心 . 본명, 達炳)
무장 석수(石水)리에서 김해김씨 삼현파조(管)의 셋째아들인 한림공(勇)의 15대손으로 태어났다. 녹두장군의 진중 수행원인 김흥섭과 동문수학하였는데 체격이 건장하고 날렵하였으며 성품이 착근하고 온순하였다. 무장기포의 농민봉기 때 그는 창의소와 영광 농민군간의 문서 연락 꾼이었다. 황아장수로 변장하여 정보수집 업무에도 성실하였다. 2차 봉기 이후 송문수 대장을 수행한 그는 우금치 싸움에서 패한 이후 송문수와 함께 서부 퇴로를 따라 영광에 이르렀다가 민보군에게 붙들려 갖은 고문을 당한 후 영광 관아 앞대로 에서 12월 27일 처형되었다. (향년43세)

김정문 (金鉦文, 1867~1932)(자, 敬洙 . 호,南谷)
무장 청해면 신대(新垈)마을 김해김씨 시중공파 15세손(三萬)의 차남으로 출생 백부(二萬)의 양자가 되어 대를 이었다. 1894년 3월 27세 무장기포가 일어 날 때 청해면의 사미동(士美洞) 출신으로 선군장이던 조성원(趙誠元)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던 중 5월말 전주성의 서문 밖 용머리 고개에서 관군들과 격돌하다가 부상을 입고 귀향하였다.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되자 고향을 버리고 사위(徐判岩)가 세거하는 사돈가에 은신하였다가 고창 신월리에 거처를 마련 이거하였는데 1932년에 생에를 마감하였다.

김준옥 (金俊玉, 미상~1899)
고창 아산면 구암(九岩)리에서 태어난 그는 무장 제1차 봉기때 농민군으로 가담하였다가 어렵게 목숨을 부지하여 수년간을 은신하다가 1899년 정읍 농민 봉기에 다시 가담 4월 23일 부안면 알뫼 장터 싸움에서 고창 수성군(守城軍)에 피체되어 4월 27일 고창 현옥에서 옥사 당하였다.

김천일 (金千一,1860~1894. 12. 26. 34세)
무장 하리면 장암리 고산 마을에서 청도김씨(淸道金氏) 후손 김이진(金以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4살 때인 1894년 3월 20일 무장기포 당시 형 규일(圭一)과 함께 근동의 농민군을 이끌고 출전한 그는 그해 12월 26일 무장농민군 지도자 박경석(朴景錫) 송진팔등 19명과 함께 수성군에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형 규일(일명:병운)과 박경석은 무장현에서 즉일로 효수 당하고 송진팔등은 영광으로 압송당한 후 며칠 뒤 영광 관아에서 모두 물고를 당하였다고 하는데 마침 영광 월곡마을 친가에 피난 왔던 정씨(丁氏)부인이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한편 무장기포 때에도 형과 함께 그는 인근에서 많은 액수의 군수전(軍需錢)을 모금 출연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김흥섭 ( 金興燮, 1874~1965)(자, 恩燮 . 호, 榮菴 . 본명, 興寬 )
김해김씨 문경공파 20세손으로 동합접주 김성칠(金聲七)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대가 광산군 용곡에서 무장현 장자산면 남당(南塘)으로 이거해와 아버지가 훈장으로 해리면 하련리(下蓮里)를 거쳐 무장 신촌(新村)으로 옮겨 훈장 노릇을 계속 하였다. 그는 21세에 동음치면(冬音峙面) 당뫼(堂山)골의 송문수(宋文洙) 접주댁에서 손화중(孫華仲) 대 접주의 천거로 녹두장군의 진중 수행원이 되어 경호의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본래 기골이 장대하여 힘이 장사였던 그는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신촌의 그의 집은 1894. 3. 20의 무장 기포가 이루어지기까지 농민혁명의 산실이었다. 그의 부친은 무장집강소의 두령으로 많은 실적을 거두었으며 우금치 전투에 패하게 되자 전봉준 장군의 개별 행동의 지시에 따라 변산의 깊은 골짜기에 은거지를 두고 서당 훈장으로 변신 불행을 극복해 냈다가 8.15 광복이 되자 무장면 원촌리 송산(松山)으로 집을 옮겨 92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문덕중 (文德中, 미상~1894)
무장현 와공면(瓦孔面) 한사동(閑士洞)에서 남평문씨(南平文氏)의 후손 지현(智炫)의 아들로 태어났다. 손화중의 포(包)로 동학에 입도한 그는 송문수(宋文洙) 고순택(高順宅)과 함께 1894년 3월 갑오동학 농민 봉기에 가담하여 백산 봉기와 9월 2차 봉기에 참여하였다가 12월초에 관군에 체포되어 무장 관아에서 처형 되었다.

문만호 (文萬浩 , 1864~1895)
무장 와공면 상례(上禮)마을에서 남평문씨 문종영(文鍾永)의 장남으로 출생 1894년 3월 20일 무장 1차 기포에 가담한 이후 이듬해 을미년에 끝내 실종되어 그 가족이 각 고을의 형장을 두루 살폈으나 부패로 인해 시신을 거두지 못한 채 초혼 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한다. 역적으로 몰려 은신할 때 장검 한 자루와 납탄 한 자루를 집에 숨겨두고 떠난 것을 보면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고 있다.

문상학 (文尙學, 1872~1894)(초명, 尙學 . 자, 尙烈)
무장 상리면 검산리 막정(幕亭)마을에서 남평문씨 감찰공 후손(文貴大)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23살 되던 1894년 3월 20일 무장 당뫼(堂山)골의 제1차 봉기 이후 무장과 영광, 함평 땅을 누비고 다니면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는데 9월 2차 봉기의 참패로 늦가을 와공면 선산등(仙山嶝)에서 붙잡혀 참형을 당하였다.

박 헌(朴 憲, 미상~1895)
밀양박씨로 상하면 도리동에서 태어났다. 갑오년 3월 무장기포에 농민군으로 가담한 이래 2차 봉기후 패전할 때까지 동학농민군 대열에서 활약하였는데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영광 홍농면 월암리(月岩里) 처가댁에 은신하였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895년 2월 10일 무장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박경석 (朴景錫, 미상~1894)
무장읍에서 밀양박씨 후손으로 태어났다. 1894년 3월 무장기포때 무장읍내 젊은 패거리로 등장했던 송진팔(宋振八), 곽창욱(郭昌郁), 張斗一(장두일)과 함께 젊은 역군이었던 그는 최선봉에서서 당뫼골의 송문수 대장을 추종해 그의 휘하에 19명의 동지들이 한데모여 주로 영광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패전이후 송문수 장군 이하 모두가 민보군에 체포되어 그는 맨 먼저 무장에서 물고(物故)를 당하고 김병운은 관아에서 효수형으로 처리되고 송문수 일행은 영광 관아로 이첩되었다.

박흥화 (朴興化, 1869~1904)
흥덕현 일남면 임리에서 무안박씨(務按朴氏) 보익(寶益)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기질이 총명 정대하여 의를 승상하는 자품이 있어 항상 강개한 의기가 넘쳐 있었다. 녹두장군이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때 흥덕 접주 고영숙(高永叔)을 추종하여 일남면 장두(長頭)로서 1894년 3월 봉기때 주력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황토재 전적과 황룡강 대첩에서 크게 활약하고 전주화약이 이루어 질때까지 농민군의 선군장으로 그 임무를 다 마친 후 귀향하여 일남면의 집강 개혁에 진력하였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낙담한 그는 내변산에 잠적하였다가 은둔생활 끝에 1904년 병사하고 말았다.

배환정 (裵煥廷, 1863~1922)(자, 相三 . 호, 南溪)
무장 와공면 청천(淸川)마을에서 달성배씨(達成裵氏) 후근(厚根)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약방을 경영한 그는 손화중 대접주와 만나게 된 인연으로 그 휘하의 접주로 활동하게 되었다. 무장기포 당시 농민군의 건강을 지켜주는 공의(公儀) 노릇을 전담하는 등 호군(?軍)장 역할까지 감당해 냈었는데 평소의 적덕한 보람으로 패전이후에 주변에서 감싸주어 향년 60세의 수를 무난하게 누렸다고 한다.

서상옥 (徐相玉) 미상~1894. 12
흥덕 이동면 은동 隱洞 출신. 1894년 당시 동학농민군 접주로 활동하였다. 흥덕현감의 보고에 따르면 “평민을 학대하고 재산과 곡식을 빼앗은 것이 몇 차례인지 모르겠고, 더욱이 군사를 일으켜 나주에 갔다가 얼마 전에 도망하여 돌아왔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이교와 수성군의 추격과 정탐꾼(이목 耳目)의 탐문 과정에서 그해 11월 동료 정무경 鄭武京과 함께 체포되었다. 군민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서상은 (徐相殷,1869~1894)(자,玉女 . 호, 松菴)
흥덕현 이동면 은동(隱洞)에서 달성서씨(達城徐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영숙(高永叔) 접주와 친교지간으로 그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 1894년 3월 무장기포이후 동학 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그해 패전후 12월 11일 흥덕의 민보군에 체포되어 통위영군(統衛營軍)에 의해 처형되었다.

서재성 (徐在成, 미상~1894)
고창읍내에서 출생한 그는 농민군으로 활약하던 중 고창기포장 장동행(張東行)의 밀령에 의거 고창현의 도사령 이춘경(李春京)에게서 고창현의 제반 업무를 비밀리에 전달받다가 1894년 4월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에 적발되어 이동술(李同述) 그리고 도사령 이춘경과 함께 처형되었다.

서원국 (徐源國) 1844~1931
이천 서씨. 고창 덕정면 신촌 출신.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과의 인연으로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을 주도할 때 친위부대로 참여하였다. 이때 그의 맏사위 김기학 金箕學도 동참하였다가 2차 봉기 이후 패주할 때 나주로 피신하여 남의 집 더부살이 하다가 1905년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송경수 (宋景洙) 미상~1894
무장 동음치면 당뫼골(堂山洞, 현 공음면 구수내)에서 여산송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동학 농민군의 두령이요 기포장으로 알려졌던 송문수 장군(속칭 大將)의 친제(親弟)인 그는 당내지간인 송진호(宋珍浩)와 함께 송대장의 수행원으로서 1894년 3월 무장 봉기이래 영광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패전이후 그해 12월 3일 송문수 대장이하 수행하였던 수십 명의 농민군과 함께 체포되어 영광 관아 앞마당에서 모조리 처형당하였다.

송경찬 ( 宋敬贊, 1859~1894)(자, 敬贊 . 본명, 榮植. )
1859년(철종10) 공음면에서 여산 송씨 아버지 의호(義浩)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젊어서 돈독한 효행으로 향리의 수범이 되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강경중(姜敬重)과 함께 동합 접주가 되어 동학 농민군의 두령으로 무장지역의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손화중 막하에서 핵심요원이었던 그는 1894. 9월 2차 봉기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이후 관군에 체포되어 나주 군영으로 압송 12월 27일 처형되니 향년 36세였다.

송문수 (宋文洙, 미상~1894)
무장 동음치면 용산(龍山)마을에서 여산송씨(礪山宋氏)의 후손으로 출생 성장하여 당뫼골(堂山洞, 현구수내)로 이거한 부잣집 아들이었다. 1894년 3월 무장기포때 손화중 대접주와 함께 무장 신촌(新村) 남접도소(南接都所)의 통사(統使, 長頭)로 참여한 동학 농민봉기의 핵심요원이었다. 송경찬(宋敬贊)과 함께 1,2차 봉기때 농민군 7천여 명을 이끌어 낸 장군(속칭,宋大將)으로 통하였다. 평소 굴정동 훈련장에서 단련시킨 호위병 요원 10여명을 인솔하고 주로 영광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패전 후 영광 홍농면의 이현숙(李鉉淑)이 이끌던 민보군(民保軍)에게 체포되어 12월 5일 영광 관아에서 처형되었다.

송병욱 (宋秉郁, 1868~1941)
무장현 청해면 수락(水洛)리에서 은진송씨(恩津宋氏)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인근 사미동(士美洞) 출신으로 무과급제후 선략(宣略) 장군이 되었던 동학 접주 조성원(趙誠元)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한 그는 동학정신에 흠뻑 젖어 열성 동학도가 되었다가 1894년 3월 무장기포 이후 패전의 고배로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서울로 올라가 은거하면서도 동학 진흥책을 꾀했으나 1904년 북접(北接)의 장두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3세 교주가된이래 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등 세력 암투가 무성하자 그는 마음을 비우고 만주와 중국대륙등에 유랑생활로 자신을 숨겨오다가 병마에 시달리게 되자 은밀히 귀향하였다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송진팔 (宋振八, 미상~1894)


무장읍내리에서 여산송씨(礪山宋氏)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박경석, 장두일, 곽창욱 등과 함께 무장의 각 주막걸이를 무대로 패거리 생활을 일삼다가 속칭 송대장(宋文洙) 휘하에서 동학농민군을 모군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과 함께 송문수 대장 휘하에 가담하여 1894년 3월 무장기포이래 패전이후 역적으로 몰릴 때까지 행동 통일을 같이 해오다가 민보군에 체포되어 영광으로 이첩된 후 다 같이 참화를 당하고 말았다.

송진호 (宋珍浩, 미상~1894)
무장현 동음치면 당뫼(堂山)에서 여산 송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속칭? 송대장(宋文洙)의 같은 문중 출생으로서 송경수(宋景洙)와 함께 송문수 대장의 수행원으로서 1894년 3월 무장기포이래 송대장을 따라 영광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패전 후 12월 3일 영광 관아에서 모조리 처형되고 말았다.

신정옥 (申正玉, 미상~1895)
고창 지역의 접주로 활약하였던 그는 손화중 대접주와 연계되어 9월 재봉기 이후 10월 중순 장성으로 내려와 개천?단암리 등에 포진을 하였다가 10월 28일에는 장성읍에서 4백상의 점심을 대접받고 저녁 무렵에 황룡면으로 이진하였다.(이상 장성 유생(儒生)의 기록에 의함) 황룡에 도소(都所)를 세우고 각 마을에서 군수미를 거두어 들여 일본군 남하토벌 작전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 이후의 행적은 알 길이 없으며 나주(羅州) 지역의 손화중 대진(大陣)에 합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양상집 (梁尙集, 미상~1895)
무장현 대정리 해정(海井)마을에서 제주양씨(濟州梁氏)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용수리 출신 배환정 접주의 권유로 1894년의 3월 무장기포에 농민군으로 가담한 이래 9월 2차 봉기에도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몸 싸우고나 죽자」하고 목숨을 내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전이후 무장 민보군에 붙잡혀 1895년 1월 16일 압송 당하였으나 1899년 기해 농민봉기에 다시 가담되어 알뫼장터 싸움에서 다시 체포되고 말아 그의 행적이 묘연하게 되었다.

엄대영 (嚴大永, 1858~1933)(자,成道)
고창읍 덕산리(德山里)에서 영월엄씨(寧越嚴氏) 사직공(司直公)파 13대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가담된 그는 고창 접주가 되어 동학 전파에 심혈을 다하여 독실한 교도가 되었다. 1904년 이후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3세 교주 시대에 그는 일진회(一進會)의 간부가 되어 관도사(觀導師)의 자격으로 활약하다 진보회(進步會)에 밀려 유랑생활을 거듭하다가 1930년 귀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엄흥삼 (嚴興三, 1860~1899)(자, 興三 . 본명, 俊化 . 보명, 永)
고창군 아산면 구암리(九岩里)에서 영월엄씨 복야공파 13세손 석서(錫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0대에 족형(嚴大永? 接主 . ?導師)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 1894년 3월 무장기포의 4천군에 가담 백산 봉기에 참가하였으며 9월 2차 봉기 이후 패전 때까지 활약하다가 은신하였는데 다시 1899년 4월 재봉기에 가담하였다가 민보군에 체포되어 그해 5월 25일 고창 관아에서 처형되었다.

오응문 (吳應文) 생존기간 미상
무장 장재면 남계리 南溪里 출신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1894년 10월 함평의 서우순 徐佑順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에게 동학을 전수하는 역할을 하였다.

오재봉 (吳在奉) 1869~미상
흥덕 일서면 백선동 白仙洞 출신으로 1894년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그해 말 농민군 패전 이후 잠적하였다가 다시 1899년 음력 4월 6일 흥덕 삼태리 三太里 거주 이강성 李江成과 함께 태인군 화호 禾湖의 김여성 金汝成에게 가서 동참하고 그 집에 며칠간 머물렀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19일 흥덕관아를 공격하여 군기 軍器를 탈취하였고 20일에는 ‘알뫼 卵山’ 시장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21일에는 무장 지역으로 들어가 군기를 탈취하였다. 22일에는 고창군 수정 藪亭에서 수성군과 전투를 벌이다 패전하여 집으로 돌아왔고 며칠 후 순검과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고창관아에 수감되었다가 광주로 압송되었다. 그는 『대전회통大典會通』「추단조 推斷條」 ‘군복을 착용하고 관문 官門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남재판소 판사 민영철 등이 교수형을 선고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종신형 이상은 재판소에서 스스로 선고한 전례가 없다는 1900년 5월 1일 법부대신에게 민영철이 올린 보고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다행히 처형만은 면한 것으로 보인다. 1901년 5월 17일 당시까지 전남재판소에서 심리 중이었음은 『관보 官報』를 통해 확인되지만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오지영 (吳知泳, 미상~1950)
한국 인물대사전의 기록을 보면 그는 동학농민운동과 1920년 이후 천도교 혁신운동의 지도자로 소개되고 있다. 익산(益山)출신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이는 분명히 와전인 것이다. 고로(古老)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무장현의 방죽안(현 德林里)에서 태어난 것이 확실하며 성년기에 고창읍의 향교동(현 校村里)으로 이거해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오시영, 오하영등과 고창에서 시천교(侍天敎) 운동을 전개하다 손화중(孫華仲) 동학접주와 무장에서 연계되어 동학에 일찍이 입도되어 사실상 동학농민운동의 주역으로 가담하게 된다. 갑오년의 무장기포때에는 형제간들이 동학의 지역 두령으로 가담되어 고창지역 모병활동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의 저서(東學史)에서도 들어나 있듯이 동학의 전도(傳導)관계로 중년에 익산으로 이거한 그는 양호도찰(兩湖都察)의 중책을 맡아 남, 북접(南, 北接)의 조정역을 수행하게 되고 항일 구국투쟁의 명분과 기치 하에 동학의 대동단결을 성사 시킨 주역이었다. 동학농민 운동중의 그의 집안 행적을 숨기기 위해 익산으로 이거할 때 해주오씨(海州吳氏)로 위장하였다는 것이 당시 고창 고로들의 한결같은 주장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부기해 둔다.

오하영 (吳河泳, 미상~1894)
오시영과 마찬가지로 그의 본관은 해주와 고창으로 혼기되고 있으나 고창지역에서는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여 고창오씨로 통하고 있다. 무장 고을의 덕림(德林)리 태생이었으나 성년기에 고창읍 교촌(校村)으로 옮겨 살아 고창 사람으로 통용되고 있다. 「東學史」의 저자 오지영의 근친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동학농민 전쟁이후 역적으로 몰리자 고창오씨들이 멀리 경상도로 이주해가 그 규명이 어렵게 되고 있다. 오지영의 따님을 통해 문의를 하였더니 역시 자기도 혼동이 되고 있어 확답을 줄 처지가 못 된다고 증언하고 있다. 형인 오시영과 함께 활약하여 영광에서 체포된 이후 행적을 기록상으로 확인할 길이 없어 생몰관계가 의문시 되고 있다.

우복록 (禹福祿, 미상~1894.12.28)
고창 읍내에서 단양우씨(丹陽禹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기포장(起包將) 최서중(崔西仲)의 마부로 동학농민군에 가담 한 그는 1894년 3월 제1차 무장기포이후 9월 2차 봉기에도 참여하였다가 패전이 된후 12월 28일 최서중과 함께 고창 수성군(守城軍)에 피체되어 고창 숲정거리에서 공개처형 되었다.

유공선 (柳公先, 미상~1894)(자, 공선 . 이름, 龍(容)洙)
그의 출생지는 정읍 내장면 금붕리(琴朋里)이며 그는 손화중(孫華仲) 대접주의 처남으로 그의 선대는 고흥류씨(高興柳氏)이다. 그는 대접주 손화중과의 연계로 고창 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접주의 존재였다. 1894년 3월 봉기 이후 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창지역 관내에서 동학정신에 어긋나는 무리들에게 무고한 백성들 가택을 수색하고 붙잡아 구타를 일삼고 심하면 주리를 틀고 다닌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동학도의 행동강령에 그런 사항이 없는 것을 보면 광제창생(광제창생)의 큰 뜻을 펴내고 있는 그에게 모욕을 주기위해 일부러 훼손시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주방면의 진군을 위해 장성지역에서 횡포가 심한 것으로 써놓고 있으나 사실은 자형(姉兄)인 손접주 부대와 나주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던 과정을 와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2월에 흥덕 수성군에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돈휘 (李敦徽, 1856~1894)
전주이씨 의안대군 20세손 보문(輔文)의 막내 아들로 심원면 주산리 대실(竹谷)마을에서 태어났다. 평소 정의감과 개척정신이 뚜렷한 그는 39세 되던 1894년 동음치면 당뫼(堂山)골에서 송문수 접주와의 인연으로 동학군에 가담 심원면 두령으로 활약하던 중 부안면 인촌 마을의 부잣집인 진산(珍山) 영감댁이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부잣집 마름을 대실까지 끌고 와 주리를 틀어 다짐을 받고 방명해 준 위인이었다. 패전이 된 이후 관군에 체포되어 광주의 일본군 수비대에 끌려가 생사를 모른 채 시신조차 수습을 못하였다 한다.

이동술 (李同述, 미상~1894)
고창읍내에서 출생한 그는 농민군으로 활약하던 중 고창 기포장(起包將) 장동행(張東行)의 밀령에 의거 고창현의 도사령(都使令) 이춘경(李春京)에게서 고창현의 제반 업무를 비밀리에 전달받다가 1894년 4월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에 적발되어 서재성(徐在成) 그리고 도사령 이춘경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문교 (李文敎, 1858~1894)
본래 그는 영광 묘량면 영당(影堂)리 소골 마을에서 전주이씨 양도공파 후손 이윤록(李潤綠)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체구가 건장하고 활달한 성격인 그는 글발도 출입할 정도는 수학하였으며 가산도 여유로웠는데 손이 귀할 팔자라고 고향을 떠나서 살아야 한다고 해서 외손(金基一, 청도김씨)의 권유에 의해 무장 오리동면 왕거(旺巨)마을에 이거하였다가 외손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한 그는 오리동(吾里洞)면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접주로서 두각을 냈었다. 무장의 제1차 봉기때 무려 백여 명의 동학군을 이끌었다 한다. 37세의 완숙한 나이 탓에 최선봉에서 지휘 감독을 도맡았던 그는 백산에 총집결하여 동도 대장소(東徒 大將所)를 차렸을 때에도 송경찬, 강경중 휘하 천3백여의 농민군 최선봉에 섰었다. 2차 봉기이후 끝내 패전을 당하고 집에 은신했다가 주변의 밀고로 무장관아에서 12월 26일 처형당하였다.

이성천 (李成天, 1856~1922)
그는 1856년 고부 소정면 마동리(馬洞里)에서 출생 1893년에 무과(武科)의 병과(丙科) 701인으로 급제하여 5위 도총부 용양위 소속 사과(司果. 正6品)직에 근무하였는데 어지러운 세태를 피해 고향에 내려왔다가 마을 사람들이 추대 진무(鎭撫)를 삼아 동학란을 대비해 달라고 요망하자 마을을 지켜내기 위해 자진하여 동학군에 가담 마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함으로서 난세를 무난하게 넘겨 냈으나 후에 경군(京軍)들이 닥쳐 역적 가담자를 적발하게 되자 그는 자수하여 마을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성을 들어 사죄의 면책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부인(흥덕장씨)이 왕사(王師)앞에 엎드려 자기가 대신 죄를 받겠다고 호소 절규함에 이에 감복한 왕사가 이 사실을 나라에 품신하여 효부로서 정려까지 내리게 되었다.(1904) 이성천은 처가가 있는 고창 신림면의 깊은 산속으로 은신하여 본래 전주이씨 담양군파였는데 순천군파로 변성명하여 선대의 누를 덜어드렸다. 지금은 그 후손이 고창 신림면 송촌(松村) 마을에 내려와 살고 있다.

이재헌 ( 李栽憲. 1873~1944)(자, 仁培 . 호, 下田 . 본관, 咸平 )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함평 이씨 현령공파 14대손 돈복(敦福)의 장남으로 해리면 왕촌리 신흥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호걸풍의 선비로 성장 경학(經學)을 두루 섭렵한 보람으로 몽학훈장(蒙學訓長)이 되었다. 13세에 상하면 장호리 동학접주 표종길(表宗吉)의 사위가 되면서 동학에 입도 오리동면(吾里洞面)과 청해면(靑海面) 일대의 접주로 활약 하였다. 1894. 3. 20. 갑오농민혁명의 무장기포때 21세의 건장한 성년으로 그는 장인 표종길(中衛將)의 부장(部將)으로 출진 표종길의 동학접인들의 연락을 도맡아 모병활동을 전개 4월 28일 전주 입성전투에서 특수 공격의 역할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9월 2차 봉기에 다시 가담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변산의 은신처에서 은거하다가 일본군의 토벌 작전때 다시 상처를 입고 대성산의 영모재에 은거 후학을 양성하다가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청용 (李靑用) 미상~1894. 12
흥덕 현내면 치리 峙里 출신으로, 1894년 당시 동학농민군 접주로 활동하였다. 흥덕현감의 보고에 따르면 “이청용은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부르고 읍과 마을을 제멋대로 다니며 재물과 곡식을 빼앗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이교와 수성군의 추격과 정탐꾼(이목 耳目)의 탐문 과정에서 그해 11월 동료 김도순 등 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군민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희풍 (李希豊) 미상~1894. 12
흥덕 이서면 사천 沙川 출신. 1894년 당시 동학농민군 접주로 활동하였다. 흥덕현감의 보고에 따르면 “이희풍은 이번 봄에 고부 ·장성 ·전주에서 싸울 때에 그곳에 갔고 원평에서 임금의 명을 받은 선전관 宣傳官을 살해할 때에 따라 갔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이교와 수성군의 추격과 정탐꾼의 탐문 과정에서 그해 11월 동료 김도순 등 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군민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춘경 (李春京, 미상~1894)
고창읍내에서 중인(中人)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미확인 되고 있다. 고창현의 도사령(都使令) 관아에서 보조업무를 수행하는 사령의 우두머리)으로 관아업무에 종사하던 중 1894년 4월에 제반 업무를 동학군에게 비밀리에 정보제공을 해주다가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에 적발되어 동학군 서재성(徐在成) 이동술(李同述)과 함께 조사를 받고 처형되었다.

임천서(林天瑞, 1864~1894)(자,天瑞, 본명, 鍾文)
고창 고수면 돌모랭이(石隅村)에서 조양임씨 임석황(林錫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소년기에 녹두장군의 태생지인 고창 당촌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전봉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전봉준과 죽마 고우였던 인연으로 전봉준이 동학 농민혁명의 준비단계 때부터 전봉준이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어 오하영(吳河永), 오시영(吳時永), 임형노 등과 함께 1500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백산봉기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임천서는 고창 두령으로 가담하였다. 「천도교 백년사」에서도 그의 활동을 비중 있게 다룬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고창 에서 5천군을 동원한 괴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패전이후 그는 처가가 있는 무장 상리면 장호리(長湖里)에 피신하였다가 끝내 붙잡혀 법성포 수비대에 끌려가다 홍농면 지란리 다리에서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주검을 맞게 되니 향년 31세였다.

임형로 (林亨老, 1857~1894.12.19)(자, 亨老 . 본명, 星老)
고수면 석우(石,? 돌모랭이)에서 조양임씨(兆陽林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일가인 임천서(林天瑞)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 접주가 된 그는 1893년의 보은집회(報恩集會)등 동학 농민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오시영(吳時泳), 오하영(吳河泳) 형제와 더불어 고창의 접주로 활동하였다. 1894년 3월 제1차 무장기포 때에는 오시영 형제와 임천서 등과 함께 1,500여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 하였으며 9월 재봉기의 농민 전쟁 때에는 임천서와 함께 5천여 농민군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는데 패전 후 12월 19일 처형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장동행 (張東行, 미상~1894)
고창 교촌에서 인동장씨(仁同張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 접주가 된 그는 1894년 3월 제1차 무장 기포때 고창 기포장으로 출전하였으며 9월 재봉기에도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패전이후 12월에 고창 수성군(守城軍)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창 숲정거리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장두일 (張斗一, 미상~1894)
무장읍내 정거리(井巨里)에서 인동(仁同) 장씨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곽창욱(옥)과 막역지간으로 송문수 대장 휘하에 가담하였다. 체격도 건장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무직이었던 그는 주막패거리의 우두머리였었다. 또 그 정열을 보국안민의 기치하에 농축시키기로 한 열성으로 송대장을 도와 1894년 3월 봉기 이후에는 주로 영광지역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그는 패전이후 송대장과 함께 처형되었다.

전막동 (全莫童, 미상~1899)
무장면 사점(沙店) 출신으로 1894년 3월 무장기포때 농민군으로 가담 활약하였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그는 1899년 4월 기해(己亥)농민 봉기때 다시 가담하여 23일 부안면 알뫼(卵山) 장터싸움에서 고창 수성군(守城軍)에 체포되어 고창 현옥에서 옥사를 당하였다.

전성숙 (田成淑, 미상~1899)
무장군의 사점(沙店)에서 담양전씨(潭陽田氏) 후손으로 태어났다. 정읍에 사는 접주 최익서(崔益瑞)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한 그는 1894년 3월 제1차 봉기인 무장기포에 가담 전주입성때의 사활을 건 분통을 못 이겨 2차 9월 봉기에도 참여하였으나 수년 동안 유랑 도피생활 끝에 최익서가 이끄는 1899년 4월의 기해(己亥) 농민 봉기에 다시 가담했다가 고창 수성군(守城軍)에 체포되어 고창관아에서 5월 2일 옥사 당하였다.

정덕수 (鄭德守, 1860~1894)(자, 德守 . 본명, 寅吉 )
무장 와공면 예전리(禮田里)에서 동래정씨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촌에 사는 동학교도 문만호의 권유로 손화중 대 접주 휘하의 송문수 접주 핵심요원으로서 1894년 3월 동음치면 당뫼골의 제1차 농민군 봉기때 근동의 농민군 규합에 앞장을 서서 활약하였으며 출진이후 고부관아를 들이치고 백산에서 봉기할 때까지 송문수 예하의 선군장으로서 영광, 함평, 장성, 정읍, 태인, 원평, 금구를 거쳐 이해 4월말 전주성 입성을 위해 용머리 고개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기위해 싸우다가 포화에 맞아 절명하였다.

정무경 (鄭武京) 미상~1894. 12
흥덕 일서면 진목정 眞木亭 출신으로, 1894년 당시 동학농민군 접주로 활동하였다. 흥덕현감의 보고에 따르면 “평민을 학대하고 재산과 곡식을 빼앗은 것이 몇 차례인지 모르겠고, 더욱이 군사를 일으켜 나주에 갔다가 얼마 전에 도망하여 돌아왔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이교와 수성군의 추격과 정탐꾼의 탐문 과정에서 그해 11월 동료 서상옥 徐相玉과 함께 체포되었다. 군민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정재찬 (鄭在燦,1864~1923)(자, 在燦 . 이름, 重夏)
무장현 원송면 산수리(山水里) 173번지에서 진주정씨(晉州鄭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산수리 마을의 부호인 정복규(鄭復奎)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동학의 손화중(孫華仲) 대접주가 성동면(星洞面) 괴치리(槐峙里)에서 활약을 시작할 때 손화중 사촌 동생 익중(益仲)과 동갑내의 인연으로 접촉이 쉽게 이루어져 동학에 입도하는 인연이 되었다. 부자인 그는 손화중 대접주를 크게 도와 농민군의 훈련비도 후원해주고 농민군의 무기도 많이 구입해다 주었으며 심지어는 손접주의 숙소도 괴치에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1894년 3월 무장 당뫼(堂山)골에서 봉기할 때 여러 기포장(起包將)들과 함께 농민군에 가담하여 많은 군자금(軍資金)도 뒷받침해 주는 등 농민군의 후원자요 재정담당 호군장(?軍將)으로서 종횡으로 활약하였다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20여 년간을 전국 산천을 누비며 유랑생활로 여생을 마쳤다고 고로들은 증언해 주고 있다.

정종혁 (鄭鍾赫,1862~1952)(호, 春耕 . 초명, 種)
흥덕현 부안면 중산리(中山里)에서 진주정씨(晉州鄭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강직한 선비로 의(義)를 숭상하던 대쪽 같은 성품이었다고 고로들이 증언해 주었다. 1893년 11월 고부 서부면 중산리 송두호(宋斗浩) 댁에서 부폐척결을 통한 폐정개혁으로 광제창생(廣濟蒼生)을 구현하기 위한 사발통문(沙鉢通文) 서명을 할 때 서명인 20인중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여 그의 심중을 토로한 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요시찰인이 되어 어려움이 많았으나 마을에서 서당 훈장으로 오직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여 용케도 수를 누리고 여생을 마쳤다.

조성원 (趙誠元, 1857~1894)(자, 敬順 . 호, 三思亭 )
무장 청해면 고성리 사미동(士美洞)에서 한양조씨 종환(鍾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질이 탁월하여 무과급제로 충무위(忠武衛) 부사용(副司勇)의 선략(宣略)장군이 되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892년 34세에 손화중 대접주의 수하가 되어 1894년의 무장기포때 청해면의 두령으로 가담 선군장으로 농민군지도부의 역군이 되었다. 6월 6일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으로 진격해오는 관군들과 격돌하다 10여일만에 전주성을 퇴진할 때 손화중 장군의 밀령을 받아 공백상태가 된 무장읍성의 치안 유지에 진력 전주화약이 이루어진 후 무장 집강소 설치에 선봉장이 되어 집강소 운영의 주축으로 활약 하였다. 동학 농민전쟁의 패퇴기에 집 뒤안에 숨어들어 갈퀴 나뭇단에 은신하다가 동네 이장 박춘명(朴春明)에게 발각되어 이튿날 새벽에 밀고를 받아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어 장성으로 압송 되었다가 함평에서 사형 당하였다.

조재용 (趙在鏞, 미상~1899)
고창 월암리 수월(水月) 마을에서 직산조씨(稷山趙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월암리 임벽하(林碧河)의 천거로 정읍사는 동학 접주 최익서(崔益瑞)를 통해 동학에 입도해 무장기포에 농민군으로 가담하였던 그는 1899년 4월 기해(己亥) 농민 봉기때 다시 참여하여 활약하다가 실패 후 고창 수색작전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끝내 수성군에 체포되어 5월 2일 고창 현옥에서 옥사 당하였다.

조판용 (趙判用,미상~1899)
고창 제내(堤內)마을에서 한양조씨(漢陽趙氏)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정읍 동학접주 최익서(崔益瑞)에게 천거되어 동학군에 가담한 그는 제1차 무장 봉기때 가담하여 2차 9월 봉기 이후까지 참여했었는데 패전한 이후 은신처를 찾아 몇 년 동안 산속 토굴에서 숨어 있다가 1899년 4월 기해(己亥)농민 봉기때 다시 가담하였는데 고창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5월 2일 고창현옥에서 옥사 당하였다.

최경칠 (崔景七,1871~1956)(자, 景七 . 호, 月浦 . 본명 , 貴煥)
무장 동음치면 당뫼(堂山) 마을에서 경주최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풍채가 장골이어서 9척 장신의 거구였는데 일촌의 송문수(宋文洙), 송경수(宋景洙) 형제와 고순택(高順澤)등과 나이 차이는 있었어도 마을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연유로 갑오년 3월 당뫼 1차 봉기 때에도 이들과 함께 동학군에 가담 호군장(?軍將)으로 활약 하였는데 2차 9월 봉기후 패전의 고배를 마신 뒤 다행히 숨어 지낼 수가 있어 85세까지 장수를 누렸다한다.

최서중 (崔西仲,미상~1894)
고창읍내에서 전주최씨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동학에 입도 접주로 활약하다가 1894년 3월 제1차 무장기포에 가담한 이래 9월 2차 봉기 이후 패전한 뒤 12월 28일 그의 수행원 겸 마부인 우복록(禹福祿)과 함께 고창 수성군(守城軍)에 체포되어 고창 숲정거리에서 공개처형 되었다.

추윤문 (秋允文,, 미상~1894)
무장현의 동음치면 두암리(斗岩里) 사기점 골에서 추계추씨(秋溪秋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손화중(孫華仲) 대접주의 심복으로서 1894년 3월 봉기에 가담하였으며 9월 2차 봉기이후 패전이 됨에 12월 초에 흥덕에서 민보군(民保軍)에 피체되어 처형되었다.

표종길 (表宗吉, 미상~1894.12.10)
무장현의 상리면(上里面) 복구동(伏龜洞)에서 신창표씨(新昌表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가 된 그는 1894년 3월의 무장기포때 중위장(中衛將)의 요직을 맡아 전봉준 장군을 직접 호위하는 본부대오(本部隊伍)의 상장(上將)으로서 중책을 수행하기 위해 사위되는 이재헌(李栽憲)을 중위장을 호위하는 부장(部將)을 삼아 인근의 농민군을 규합 통솔하였다. 무장, 고창, 흥덕을 거쳐 3월23일 고부군아(古阜郡衙)를 점령하고 백산성(白山城)에서 녹두장군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하고 조직 편제의 중책을 다 마친 후 황토재 싸움에서 진위대(鎭衛隊)를 크게 격파하는 주역으로서 민중 창생의 기치아래 무장, 영광, 장성을 진주하고 전주로 출진하여 전주 화약(全州和約)을 이끌어 내는 주무역을 도맡는 등 호위의 본부장 임무를 무사히 맞춰낸후 무장의 도집강소 (都執綱所)운영의 중책 수행에 최선을 다하였는데 패전 후 무장의 민보군에 피체되어 갖은 곤욕을 치르다가 무장의 칠거리 광장에서 효수형으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현재서 (玄在瑞,, 미상~1899)
고창현의 산내면(山內面) 사동(沙洞)마을에서 연주현씨(延州玄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894년 3월 무장기포에 가담하였던 그는 1899년 4월 기해 농민봉기에 다시 가담 행군집사(行軍執事)로 활약하였는데 4월 23일 흥덕현의 이서면(二西面) 알뫼(卵山) 장터 전투에서 고창 수성군(守城軍)에 피체되어 27일에 고창 관아에서 옥사 당하였다.

홍낙관 (洪樂寬) 과 아우들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그 당시 고창현을 대표하던 손화중포의 두령(頭領) 오하영(吳河泳), 오시영(吳時泳), 임천서(林天瑞), 임형로(林亨老)등의 영솔하에 그의 족제인 홍계관(洪桂寬), 홍동관(洪東寬)등과 함께 장령(將領)으로 농민군의 조직일원인 재인패(才人牌)와 당골패 등 천민부대를 이끌었다.

그의 인간적인 성품과 고창에 머물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우정국 총판(郵政局總瓣) 홍영식이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전국에 사는 남양홍씨들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난리가 난 것이다. 피신하는 자 족보를 뜯어 고치는 사람 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야단법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홍낙관은 동생들과 함께 은신의 요람을 찾아 계급사회가 아닌 동학의 세가 강한 고창땅을 찾아 들었다.

평소 호탕한 성격으로 구성진데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분명한 미남이면서 살결이 희고 뿌연 해 귀티가 흐르는 호남형이었다. 그는 고창 화산리(火山里)에 사는 종씨인 남양홍씨(南陽洪氏) 집성촌을 찾아 주호격인 홍종은(洪鐘雲:1844~1925) 집에서 알게 된 동학접주 유동근(劉東根), 유치호(劉致鎬)등의 천거로 동학에 입도 접주에 이르게 된다. 그러던 그가 화산 종씨댁에서 식객(食客) 노릇을 하다가 금족령을 받게 된다. 그 연유인즉 고창 읍내 당골댁과 살림을 차리면서 부터였다. 입담 좋고 구스름한 서울 말씨에다 빼어난 용모로 장날마다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상대로 높은 연단에 서서 시국담이나 재담을 팔아 잔돈푼을 벌어 썼는데 그를 눈여겨 지켜보던, 홀로 사는 읍내 당골이 푹 빠져 미쳐 돌아가기 시작하여 그에게 여간한 정성을 쏟기 시작한데서 홍낙관의 요지부동하던 마음씨가 동요되어 녹아나기에 이른 것이다. 「자기의 은신을 위해 철두철미한 보신을 위해 천민 속에 파묻히는 것도 처세의 상책이 되리라」고 생각이 굳혀지면서 그는 용기를 내어 당골 여인의 청혼을 응낙하게 되었고 이후 자기의 생계를 아내인 당골의 수입에 의존할 수가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론이 정립된 접주로 성장할 때까지 동학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당골 아내에게서 제공받을 수 있었다. 당골이나 재인아 등 천민들을 설득시켜 동학내의 자기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해 나갔다. 접주의 개념은 자기가 입도시킨 신도 수가 한 접(100명)에 이르면 접주의 호칭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은신처와 생계수단과 활동무대를 갖추게 된 그는 손화중포에 가담하게 되어 전봉준 장군과도 연계가 이루어져 그의 유식하고 유창한 서울 말씨는 동료 간에 오히려 선망의 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여하튼 당골과 살림을 차리게 되어 화산 사는 종씨들과 결별하긴 했으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생계수단을 확보하게 되었고 안전한 은신처를 구해 천민들의 대표자가 되는 자리 다짐 속에서 동학사회에 두각을 내어 승승장구의 탄탄대로를 닦아냈었다.

그는 1894년 3월 20일의 무장 1차 기포와 3월 말 백산 총집결때 장령으로 참여하여 폭넓고 다양하게 활약하였다. 특히 전주화약 이후의 집강소 기간에는 선봉대인 천민부대를 이끌고 더욱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이때 그의 동생들도 두드러지게 활동한 행적이 함께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천민부대의 상세한 활약상은 기록에서는 볼 수 없으나 규모 있는 행사 안내, 효과 있는 선전장, 흥미진진한 분위기 조성, 출동시의 선발대 등 다양한 임무의 과제들이 있어 선무공작 내지는 특수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겠다. 홍낙관이 잡힌 뒤 고창 유진교장(留陣敎長) 홍경원의 보고서에 「큰 괴수 홍낙관」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그가 신분타파의 불길을 당긴 천민부대의 두령임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그가 잡힌 것은 1894년 12월 초순으로 현지에서 처형되지 않고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 장군과 함께 재판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사형은 면하고 장(杖) 백 대를 맞고 3천리 밖으로 유배되는 판결을 받았다.

그는 고창을 대표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가 된 이후 1898년 11월 16일에 흥덕에서 일어난 영학당(英學黨) 사건의 농민봉기 민란에서도 그는 그의 동생들과 함께 참여하여 민란을 주도하는데 앞장을 섰었다. 이화상(李化三)이 이끈 300여 명의 흥덕 농민부대는 두령을 앞세우고 흥덕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관아를 차지하였으나 관군의 반격에 밀려 퇴각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영국인 목사가 말목 장터에 세운 교회에서 비롯되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영학계(英學契)라는 조직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영학계원들이 흥덕민란 또는 영학당 사건이라는 관아 점령을 주도한 것이었는데 이 조직의 이화삼 두령도 농민군 지도자 출신이었다. 또한 이듬해 이른바 기묘년 몽민봉기 때에도 정읍의 최익서(崔益瑞)등은 정읍을 비롯하여 고부, 흥덕,고창, 무장, 장성 등지로 조직을 확대하여 4월에 농민 400여명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때 농민군은 벌왜(伐倭) 벌양(伐洋)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진격하였었다. 이들은 1차로 고부의 무기를 접수한 뒤 흥덕 관아를 차지했고 이어 무장으로 진격하여 무기를 인수하고 4월 22일에는 고창읍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고 겹쳐서 비까지 쏟아져 끝내 수성군에 패하고 주력부대가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 이들 농민군은 「하지 못할 일이 없으며 화응하지 않을 바가 없으며 알지 못할 것이 없으니 공변되고 거룩하지 아니한가!」라는 깃발을 들고 외쳤으며 「성찰」 따위의 소임을 주어 독려하곤 했다는 광무 3년(1899년)에 나온 사법품보의 재판기록을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이 다시 규합해 전개한 최대의 사건으로서 이때 수백 명이 잡혀 지방관아에서 맞아 죽거나 굶어 죽었으며 또한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일은 홍낙관이 유배당한 지 4년 밖에 안 되었으므로 탈출을 해서 가담을 한 것인지 그 연유를 확인할 길이 없으나 흥덕민란 관련 기록을 보면 홍낙관의 이름자 위에「대괴수」로 부기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두령 이화삼의 다음 지도자격으로 크게 활약한 것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가 여기에서 또 붙잡혔는지 어떤 중형을 당하였는지 아직 찾아 볼 길이 없다. 다만 그의 아들이 경술합방 이후 보신을 위해 소년기에 고창경찰서 소사(小使)직을 맡아 10여 년 동안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행방불명이 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오리무중에 빠져있는 홍낙관의 처절하고 끈질긴 생애에 관하여 확실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밝혀질 날이 꼭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줄인다.

황채오 (黃彩五, 1854~1894)
흥덕현 성내면 신성리(新星里)에서 평해황씨(平海黃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후덕한 인품으로 항상 남을 배려 해왔던 값진 생애를 누린 분으로 인근의 찬사를 받았으며 부(富)도 넉넉하게 축적하고 살았었다. 1893년 11월 고부 서부면 중뫼등 송두호(宋斗浩) 집에서 폐정(弊政) 개혁으로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도모하기 위한 사발통문(沙鉢通文) 서명식에 농민 대표 20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했었다. 1894년 9월 2차 봉기를 통한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가 민보군(民保軍)에 피체되어 12월 16일 나주(羅州)에 있는 일본군 토벌 사령부에서 처형당하였다.

황하성 (黃化性, 1869~1894)
무장현의 동음치면(冬音峙面) 다옥동(多玉洞)에서 창원황씨(昌原黃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894년 3월 무장 봉기에 출전한 그는 영광, 함평, 장성, 정읍, 태인, 원평, 금구를 거쳐 전주 용머리 고개 전투에서 처절한 육박전을 치룬후 황학산의 관군을 몰아내기 위해 최후의 보루를 지키다가 폐정개혁을 통한 광제창생(廣濟蒼生)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향년 25세로 젊음의 피를 쏟고 말았다.

황희성 (黃憙性, 1872~1894)
무장군 하리면 갈오리 갈산(葛山)에서 창원황씨(昌原黃氏) 후손으로 태어났다. 27세 때 갑오년 3월 무장기포가 일어날 무렵 집안 동생인 화성(化性)과 함께 동음치면 당뫼(堂山? 구수내)에 사는 송문수 대장 휘하로 들어가 동학군에 가담 4월 28일 전주성 함락 전에 참전하였다.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다가산 전투에서 일시적으로는 많은 전적을 거두었으나 종내에는 경군(京軍)의 화력에 밀려 처절하게 싸우다가 아우 되는 화성(化性)이 용머리 고개에서 적탄에 맞아 처절한 주검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기진맥진한 탈진상태에서 어찌하지 못하고 길가에 밀어붙여 둔 채 자신도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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