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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김제

구미란 전투지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623-3 일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과 관군 및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수십 명의 농민군이 전사한 곳으로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농민군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 패배한 후 논산을 거쳐 전라도로 후퇴하였다. 11월 19일, 전봉준은 1,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주로 들어갔으며, 23일에는 금구 쪽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25일 원평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관군 및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이 전투는 오전 9시에 시작되어 오후 4시경에 끝났으며 수십 명의 동학농민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현재 구미란 전적지에는 당시 전투과정에서 희생당한 무명농민군들의 무덤이 다수 남아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1994년부터 구미란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하고 상생과 화합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전주입성 직전 선전관 처형지

원평장터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원평장터
장성에서 경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농민군은 전주입성을 위해 잠시 원평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농민군은 왕의 윤음을 가지고 온 이효응, 배응환 등을 공개처형하여 자신들의 투쟁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김덕명 생가

김덕명 생가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용계마을
원평은 금구취회의 중심지이자 집강소 통치기에 대도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의 접주 김덕명은 언양김씨 세거지인 금구현 두류면 거야마을 일대 (금산면 삼봉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평의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3년 원평집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백산대회 때에는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군량미 공급과 금구일대의 농민군 규합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점령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집강소 통치시에 전주, 원평, 삼례, 광주, 남원 등지에 대도소가 설치되었는데, 김덕명은 원평에서 집강소의 핵심 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어 들였고 탐학한 지주를 응징하며 농민의 고통을 해결해 나갔다.
1894년 11월 8일(양 12월 5일)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하자 동학농민군은 원평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김덕명은 전봉준보다 먼저 원평으로 돌아와 농민군을 소집하고 군량미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이들은 11월 25일 벌어진 원평전투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태인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틀 후의 태인전투에서도 농민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뒤, 김덕명은 참담한 심정으로 전봉준과 헤어져 집안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의해 체포, 일본군에 넘겨진 그는 서울에서 전봉준과 함께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원평 집강소

원평 집강소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학원마을(김영태 家)
당시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집강소 자리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평집강소는 망치질 한번에도 건물이 주저앉을 정도로 훼손됐다. 뜯겨진 천정 사이로 보이는 상량문에 ‘光緖捌年壬午三月二十(광서팔년임오삼월이십·1882년 건립)’ 문구만이 건물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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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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