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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기포

고부민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봉준은 무장현의 손화중을 찾아갔다. 고부에서도 동학교도에 대한 이용태의 만행이 자행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봉기 조짐을 보이는 데다 전봉준의 설득이 계속되자, 손화중은 마침내 봉기를 결정지었다. 3월 16일 무장현 동음치면 구암리 당산마을 일대에 손화중 휘하의 농민군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준비를 마친 농민군은, 마침내 3월 20일 무장현 당산에서 창의문(倡義文: 布古文이라고도 함)을 낭독하고 기포하였다. 전봉준 등의 지도부가 만천하에 밝힌 거사의 대의명분은 창의문(倡義文)에 응집돼있다.
※무장포고문은 92p에 수록 돼 있다

백산대회

3월 20일 무장현을 떠난 전봉준, 손화중의 농민군은 21일 고창현을 거쳐 22일 흥덕현의 사포와 후포, 23일 부안현 줄포를 지나 고부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부군을 점령하고 향교와 관청 등에서 하루를 머문 다음, 24일 전략지인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무장현을 출발, 고부군으로 향해 가던 전봉준.손화중은 봉기한 사실과 부대의 일정을 태인현(泰仁縣)의 김개남 등 주요 농민군 지도자에게도 전달했고, 이에 김개남도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태인현을 출발하여 3월 24일 경에는 백산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이 집결, 연합 농민군이 완성되었다. 이 백산대회에는 고창, 무창, 흥덕, 정읍, 태인, 금구, 김제 등지 즉 호남 우도 지역의 농민군이 총 봉기한 양상을 보였으며, 이들이 3월 봉기 기간 내내 농민군의 주력을 이루었다. 이 연합 농민군은 3월 25일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總大將)으로, 김개남, 손화중을 총관령(總管領)으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總參謀)로, 최경선을 영솔장(領率將)으로, 송휘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정하는 등 그 지휘체계와 조직을 세우는 한편, 격문(檄文: 널리 세상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분을 고취시키려고 쓴 글)과 4대 명의(名義:명분과 의리), 12개조의 기율(紀律:도덕상으로 여러 사람에게 행위의 모범이 될 만한 질서)을 잇따라 발하였다. 먼저 격문을 보자.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 뜻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을 것이나.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무장창의문이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 유교적 이념체계 안에서 봉기의 명분을 찾은 데 비해, 이 격문은 봉기에 나서는 자신들의 뜻과 의지를 적극적이고 잔혹하게 밝힌, 이를테면 농민혁명의 출사표(出師表:출병할 때 그 뜻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와도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또한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마라.(『不殺人 不殺物』부살인 부산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忠孝雙全 濟世安民』충효쌍전 제세안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逐滅倭夷 澄淸聖道』축멸왜이 징청성도)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모두 없애버린다. 기강을 크게 떨치고 명분을 바르게 세워 선인의 가르침을 따른다.(『驅兵入京 盡滅權貴 大振紀綱立定名分 以從聖訓』구병입경 진멸권귀 대진기강입정명분 이종성훈)”는 내용의 4대 명의는 일종의 행동강령으로서, 이는 농민봉기의 목적과 방향이 보국안민과 외세축출 그리고 탐관오리의 제거에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12개조 기율은 농민군의 군사행동 원칙이라 할 수 있다.

  • 1.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 3.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 4. 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
  • 5.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 6. 굶주린 자는 먹인다.
  •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 8.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
  •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 11.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 12. 불효자는 죽인다.

이상과 같은 격문과 4대 명의, 그리고 12개 기율의 포고는 바로 본격적인 농민혁명의 선포였다. 백산에 모여 모든 준비를 마친 연합 농민군은 곧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를 목표로 북상하여, 3월 26일 고부군 백산, 예동에서 태인현 화호 신덕정리로 나아갔다. 29일에 태인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전주로 곧바로 가기 위해 4월 1일 태인에서 금구현 원평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농민군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전주로 진격해 오는데 놀란 감사 김문현은 사태를 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런 한편 전주성의 관군으로 하여금 서문과 남문을 지키도록 조처하고, 2일에는 서문 밖 용머리고개를 지켰다. 그리고 곧 고부, 부안, 정읍 등지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두 길목인 원평의 청도리 앞길과 금구의 대로를 지켰다. 금구현 원평까지 진출해 있던 농민군은, 관군이 전주 입구를 지키고 있는 데다 또 관군 10,000여명이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려 오자, 3일 부대를 3대로 나누어 남하하였다. 1대는 부안현 서도면 부흥역으로, 1대는 태인현의 인곡, 북촌, 용산 등지로 내려왔고, 나머지 1대는 원평에 일시 잔류하였다. 4월 4일 원평에 남아 있던 농민군이 부안으로 내려와 이미 부안에 와 있던 농민군과 합세하여 그 날로 부안현을 점령하였다. 부안현을 점령한 것은 전봉준,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이었으며, 이때 태인의 용산 등지에 머문 농민군은 김개남이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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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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