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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 그리고 해산

우금치에서 밀린 전봉준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노성으로 후퇴, 일단 진용을 정비했다. 이곳에서 농민군과 관군이 연합하여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조선군대에게 호소했으나 이미 승세를 잡은 데다 일본군의 지휘하에 있던 관군이 이에 호응할 리 없었다. 이 사이 금산에 있던 김개남이 5,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11일 회덕과 신탄진을 경유하여 13일 청주를 공격하였다.

이때의 북상 또한 전봉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공주를 공격하던 전봉준의 후원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김개남 역시 청주영병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9월 재봉기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라는 두 최고 지도자가 북상로를 달리 했다는 점을 두고, 이것이 농민군이 패한 하나의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양 지도자가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공주, 청주로의 분산공격은 3월 봉기에서 보여준 농민군의 전략과 유사한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농민군을 전력을 키우고 진압군을 분산시켜 공격효과를 최대화하는데 있었다. 9월 재봉기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의 전라도 농민군과 최시형, 손병희의 충청도 농민군이 일치된 전략 속에 치른 총력전이었던 것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3,000여명의 농민군은 14일부터 일본군, 그리고 이규태와 이두황이 합류한 관군의 본격적인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14일 노성에서 공격을 받고 논산으로 밀려났고, 15일에는 논산 황화대에서 접전을 벌였다. 황화대 전투는 전봉준이 2차 봉기 이후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싸움이었다. 이후의 농민군은 저항력을 상실한 채 토벌군의 소탕전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낸 채 강경으로 패주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강경에서 만났으나, 이들의 조직과 세력은 이미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였다. 이들은 함께 남하하여 11월 19일 재봉기의 출발지인 전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패배로 이미 농민군의 전력과 사기를 크게 꺾였고, 더욱이 일본군과 관군은 그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전면 전투는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22일밤 전봉준, 손병희는 고부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흩어졌다. 농민군이 철수한 전주에는 이튿날 일본군 경군이 들어와 전주성을 장악하였다. 전주에서도 밀려난 농민군은 25일 금구 원평에서 접전했다. 한나절 동안 전개된 원평 구미란(龜尾卵) 전투에서 농민군은 또다시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내고 태인으로 패주했다. 27일에는 태인전투가 벌어졌다. 태인 일대의 농민군까지 가세하여 5,000~6,000명의 세력을 이룬 농민군은 하루동안 세 차례에 걸친 접전을 벌이며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온 몸을 던져 새 세상을 열고 나아가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했던 농민군의 의지와 행동이, 일제의 야욕과 무력 간섭으로 좌절되고 만 순간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반일항쟁으로서의 의미는, 역설적이지만 농민군이 꺾인 후 거국적인 저항 한 번 못하고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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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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