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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공작과 청,일전쟁

일본은 1870년대부터 조선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1871년 일본에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1870~73년 무렵 일본정부 내에서 고조된 한국침략론)이 등장하였다. 이 정한론은 일본 국내의 불안한 정세에 대한 관심을 대외로 돌려 해결하려는 메이지정권의 정책이 세워지면서 곧바로 구체화되었다. 그 첫 시도는 1875년 운요호사건에 이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나타났다.

이후 일본은 대륙 팽창욕을 드러내며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중국과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보문제를 두고 대립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양국의 첫 대결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로 이어졌다. 두 사건을 계기로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진출의 기회를 노렸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1894년 5월 청군의 조선파병은 일본으로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청국과 동시에, 더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청,일 군대의 출병 직후에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함으로써, 조선의 정국은 일본의 기대와는 일단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선정부는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했으므로, 즉 내정이 안정되었으므로 일본군은 철병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철병을 거부하는 한편, 청과 분쟁을 일으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조선정부는 청군의 철병도 요구했으나 역시 일본군의 증강을 앞세워 거부하였다. 조선정부는 양국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조선 주재 서양 각국의 공사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러시아, 영국과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섰으나, 일본은 열강의 모든 조정안을 거부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조선을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서둘러 세워갔다. 즉 일본은 ‘조선국왕을 포로로 잡아 조선정부를 장악하고(1단계)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청국 군대의 축출을 일본에 의뢰케 하며(2단계) → 조선의 의뢰를 기다려 청군을 공격한다(3단계)’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해 간 것이었다. 일본은 6월 21일에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용산에 있는 병력을 출동시켜 궁궐 출입문을 폭약으로 부수고 들이닥쳤다. 이것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조선정부를 장악한 일본은 고종을 협박하여 아산에 있는 청군의 철퇴를 일본에 의뢰토록 강압하였다.

이렇게 개전(開戰)의 구실을 만든 일본군은 아산만 앞 풍도에 주둔한 청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로써 청,일 전쟁의 막이 올랐다. 풍도(豊島,경기 안산시 대부동(大阜洞)에 딸린 섬) 기습공격과 충청도 아산, 성환 전투에서 청군은 패퇴하였다. 청.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는 평양에서 전개되었다. 청군 2만여 명과 일본군 12,000여명이 평양성을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청군을 궤멸시킨데 이어 대동강과 압록강 앞 바다의 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평양전투에서 참패한 청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9월말 조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공격을 늦추지 않고 중국대륙까지 계속 진격해 갔다. 중국의 봉천성, 여순항, 산동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지무까지 장악하자 청은 백기를 들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고,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 같은 청.일전쟁의 결과, 중국은 수천 년 간 이어온 동아시아 패권자의 자리를 일본에 내주고 경제적 파멸에 접어들었다. 또한 조선은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공급지로 또 그들의 자본제 상품시장으로 전략하였고 끝내는 식민지가 되었다. 반면 일본은 팽창주의적 산업화에 성공하는 한편, 대내적인 불만을 한꺼번에 해소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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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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