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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항쟁

전봉준이 휘하 농민군을 해산시킨 데 이어 11월 27일 광주를 점령하고 모여 있던 손화중과 최경선도 곧 휘하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이처럼 각 지역의 주요 농민군은 해산 길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산간벽지로 숨거나 타지역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일부는, 특히 광주에서 해산한 농민군은 전라도 서남해안의 장흥과 강진 쪽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이곳의 농민군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최후까지 저항하였다. 당시 장흥, 강진 일대의 농민군은 이방언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 무렵 여기에는 광주의 농민군 만이 아니라, 인근 남평, 보성, 능주, 화순 등지의 농민군도 합류했다. 또한 전봉준 본영에서 활동했던 금구대접주 김방서 부대도 합류했다. 이로써 장흥 농민군의 군세는 1만~3만여 명으로 크게 강화되었다. 이들은 12월 3일 벽사역과 장흥부 인근까지 진출했다. 12월 4일 벽사역(碧沙驛)을 점령하고, 다음날에는 장흥부성을 점령한 후 강진현과 강진병영으로 방향을 돌렸다. 9일 농민군은 강진현도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강진현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10일 강진병영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처럼 농민군이 장흥?강진 일대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는 동안, 나주에 머물던 관군은 일본군 미나미 소좌의 지시에 따라 강진으로 향했다. 관군의 추격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영암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바꿔 다시 장흥으로 돌아갔다.

장흥으로 가던 도중인 13일 농민군은 관군과 일군의 선발대와 만나 1차 접전하였다. 농민군은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났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장흥부로 진출을 꾀했다. 그리하여 15일에 수만의 농민군은 교도병 및 일본군 본대와 장흥 석대들에서 전면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또 패하여 수백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길에 올랐다. 이들은 17일에 장흥 옥산리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였으나 여기서도 1백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옥산리 전투를 끝으로 장흥, 강진 일대 농민군도 해산했다. 전라도 일대에서의 조직적 저항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한편 북접 손병희가 지휘한 농민군은 태인 전투 이후 장성 갈재를 넘어 순창을 거쳐 임실로 들어갔다. 손병희는 11월 초순부터 임실 청웅면 새목티에 머물러 있던 최시형을 만나 함께 도피길에 올랐다. 임실을 떠난 이들은 장수 장계로 가던 도중 관군과 여러 차례 접전한 뒤 금산을 거쳐 12월 5일 무주를 점령하였다. 다시 북상길에 오른 손병희는 충청도 지역을 넘어가 9~10일 청산, 황간, 영동을 잇따라 함락하였으나, 청주영병 및 보부상, 민보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산하였다. 이때 손병희는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와 보은 북실로 향했다. 북실에 주둔한 농민군은 17,18일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명이 사망했다. 북실을 떠난 손병희는 청주 화양동을 거쳐 충주 회서촌으로 갔다. 이 곳에서 관군의 습격을 받아 충주 무극시장으로 옮긴 손병희 부대는 24일 관군의 공격을 받아 대오가 완전히 흐트러졌다. 이에 최시형은 해산령을 내렸고, 최시형을 비롯한 손병희 등은 강원도 홍천으로 향했다. 이들은 강원, 충청도를 오가며 이후 4~5년 동안 세상의 이목을 피해 숨어 지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남접 핵심지도자들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한 반면, 손병희 등 동학교단의 지도자 상당수는 관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남았다. 손병희 등은 뒷날 동학교단을 다시 일으켜 천도교(天道敎)로 교명을 바꾸고, 근대개혁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해가 바뀌어 1895년 1월 24일, 대둔산(大屯山: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의 접경, 해발 878m) 정상부근으로 도피하여 요새를 세우고 있던 농민군 25명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다가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 대둔산 전투는 규모는 작지만 동학농민혁명 전과정 중 기록에 전하는 가장 마지막 전투다. 대둔산 정상 부근에는 갑오년 11월 중순께부터 농민군 일부가 험한 암벽을 의지한 천연요새에 은거해 있었다. 이곳에는 어린 소년 1명과 28~29세의 임산부를 포함한 26명의 농민군이 마지막까지 항복을 거부한 채 저항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일제 사격으로 쓰러져 갔다. 어린 소년을 제외한 25명 모두가 장렬히 산화했다. 이것을 최후의 항전으로 해서 동학농민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튿날부터 전라도 일대에 있는 일본군과 관군은 모두 전라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퇴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전봉준, 손병희, 김개남이 이끈 주력 농민군에 참여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외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군도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처벌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농민군 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데 있어 무엇보다 큰 장애가 되는 세력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군 및 향촌 유림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에 의한 자의적인 살육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189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조선 전역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희생된 농민군 숫자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문서들은 20만명 이상, 혹은 30만명, 혹은 30~40명이 전사 또는 학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농민군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체포, 처형되었다. 김개남은 12월 초순 태인 종송리(현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매부 서영기의 집에서 잡혀 전주에서 효수되고, 전봉준은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쌍암리)에서, 손화중은 고창 부안면 수강산 산당(山堂)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일본에 협조하면 살려준다’는 일본의 수 차례에 걸친 유혹을 당당히 뿌리치고 이듬해 3월 30일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의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 이런 잔혹한 토벌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의 행로는 어땠을까? 이들의 대다수는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온 의병대열에 합류하여, 또 다시 항일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의병의 절반은 비류(농민군)라는 당대의 기록이 이런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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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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