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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고창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제

제125주년 무장기포제 사진 4장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전국 120여개 군현의 농민들이 봉기한 전국적인 농민전쟁이었다. 이 사건이 1860년대 이래의 농민항쟁(민란)과 다른 점은 고을 단위의 국지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인 농민봉기였다는 점에 있다. 19세기 중반이래의 전국 70여개 고을에서 있었던 농민봉기는 대부분 각 고을의 국지성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러한 고을 단위의 농민봉기는 수탈과 탐학의 당사자인 수령을 축출하고 아전들을 징치하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봉기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현실의 고통이 지방관의 잘못 때문이지 정부의 제도나 국왕의 잘못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봉기한 농민들이 고을의 경계를 넘어서거나 수령을 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고부군 내의 말목장터와 백산에서 2개월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 고부봉기의 목적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시정하기 위함이었다. 조병갑의 파직으로 고부봉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봉기 지도부는 호남 일대의 각 고을에 호응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인접 고을의 지지도 얻어내지 못하고 3월초에 후임 군수의 설득으로 해산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함열 조창에 대한 점령논의가 있었으나 고부군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고부 농민들이 해산한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봉기 지도부는 무장으로 피신하여 무장에서 다시 농민들을 모아 무장기포를 선언했다. 무장기포는 고을 단위의 농민봉기 선언이 아니라 중앙정부를 향한 전국적인 농민봉기 선언이었다. 무장에서 기포한 이후 백산대회에 이르기까지 농민군 4대명의와 군율을 발표하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군사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무장기포의 목적은 군현의 수령과 아전의 타도가 아니라 중앙정부의 권세가와 탐관오리의 숙청이었기 때문에 향리들에게도 봉기에 합세할 것을 촉구하기까지도 하였다. 비록 무장포고문의 내용이 국왕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는 명백한 조선왕조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무장기포가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조건은 동학 교단의 교조신원운동 경험이었다. 고을 단위의 피지배층 조직이었던 동학은 1892년부터 시작된 3차례의 교조신원운동을 통하여 농민동원의 연락망과 조직망을 제공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고창 동학농민혁명의 기억과 전승은 봉건체제의 억압과 질곡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농민의식의 성장과정을 기억하는 일이며 목숨까지 걸고 일어섰던 이들의 보편적 가치를 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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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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