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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전투, 우금치의 좌절

10월 21일경 논산을 출발한 전봉준과 손병희의 농민군은 공주를 눈앞에 두고 23일부터 잇따라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공주성을 둘러싼 전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보다 며칠 전인 21일 충청도의 농민군이 목천 세성산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공주의 측면을 장악하여 관군의 남하를 견제하고 농민군의 진격로를 확보하려는 것이었으나 농민군은 패하였다. 논산을 거쳐 노성에서 공주로 들어오는 길은 경천으로 해서 판치(板峙, 널치)를 넘어 효포(孝浦), 웅치(熊峙, 곰티,능티)를 경유하는 길과 이인을 거쳐 우금치로 들어오는 길이 있다. 이때 농민군은 노성에서 2대로 나누어 전봉준이 이끄는 1대는 판치-효포-웅치로 공주의 동쪽을 공격하고, 나머지 1대는 이인으로 나아가 공주의 남쪽을 공격하는 전략을 썼다. 공주성을 둘러싼 공방전은 크게 두 번 치뤄졌다. 1차전투는 10월 23일~25일 사이에 벌어진 이인.효포.웅치 싸움이며 2차전투는 11월 8일부터 4일간 계속된 우금치(牛金峙) 혈전이다.

공주전투는 23일 이인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이인을 점령한 농민군은 구완희의 순영병, 성하영의 경리청병, 스즈끼(鈴木彰) 소위가 지휘하는 100여명의 일본군과 만났다. 농민군은 일.관(日.官)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인근 취병산으로 후퇴하여 반격전을 폈다. 이들은 여기에서 몇 차례의 공방을 주고 받았는데, 날이 저물면서 농민군에 밀린 관군은 1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공주쪽으로 달아났다. 첫 접전에서 농민군은 승리를 거둔 것이다. 24일에는 효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을 지키던 관군이 23일 밤 금강을 건너 대교리 일대의 농민군을 치러 나간 틈을 타고, 전봉준의 주력군 1대가 이곳을 급습한 것이다. 전날 이인에서 패주한 관군은 포를 쏘며 농민군의 진격을 막아섰다. 양쪽의 공방은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25일 날이 밝는 즉시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웅치를 공격하였다. 이에 일.관(日.官)연합군은 강력하게 방어하며 맞섰다. 웅치전투의 상황은 농민군에 불리했다. 이규태의 본진이 모리오(森尾雅一) 대위의 일본군 100여명과 합세한 데다 대교에서 돌아온 부대까지 가세해서, 진압군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23일부터 25일까지의 전투는 일종의 전초전인 셈이었다. 승패가 확연히 갈린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경천으로 물러났다. 이때 전주에 있던 김개남은 북상을 시작하여 24일 ‘청주로 가는 길을 열고자’ 금산을 점령하였다. 금산을 친 것은 공주전투의 성원(聲援)이 되기 위해서였다.

11월 초순 노성과 경천일대에서 전열을 정비한 농민군은 일본군.관군과 전면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이 공주성 2차 공격에 나선 것은 11월 8일이었다. 공격에 나선 농민군은 2대로 나뉘어 이인과 판치의 관군을 공주쪽으로 몰아 붙였다. 판치의 관군은 농민군의 대대적인 진격에 밀려 효포와 웅치로 후퇴했다. 농민군은 계속 돌진하여 효포와 웅치의 뒷면까지 진출, 주위에 깃발을 꽂고 기세를 올렸으나 더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았다. 판치 쪽에서는 관군이 일방적으로 후퇴함으로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인의 상황은 약간 달랐다. 관군은 선봉진의 후퇴 명령을 시행할 사이도 없이 농민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들은 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퇴로를 뚫어 10리쯤 떨어진 우금치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9일 날이 밝으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기록되는 이른바 우금치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농민군은 총집결하여, 동으로 판치 뒷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봉황산 뒷편까지 30~40여리에 걸쳐 산 위에 진을 쳤다. 북쪽을 제외하고 삼면에 진을 치며 공주감영을 둘러싼 것이다. 일.관(日.官)연합군은 우금치를 중심으로 왼쪽 봉우리에 모리오 대위의 일본군이, 맞은편 견준봉에는 백낙완, 고개 밑에는 성하영 부대가 각각 배치돼 주방어선을 형성했다.

또한 동남쪽으로 금학동, 웅치, 효포의 봉수대, 그리고 금강나루와 산성쪽, 공주감영 뒷편 봉황산 방면에 각각 수비대를 배치했다. 일.관(日.官)연합군 역시 전면 전투 채비를 갖춘 것이다. 곧 효포 쪽에서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우금치를 공격하자 일본군과 관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함으로써 전투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우금치를 지키던 성하영 부대가 농민군의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모리오 대위는 우금치 견준봉 사이의 능선에 일본군을 배치하였다. 공격해 오는 전봉준 부대를 향해 이들은 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일제사격을 가했다가 산 속으로 은신하였다. 농민군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곧바로 또 산마루에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발사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40~50차례 거듭하자 농민군의 시체가 온 산에 가득히 찼다. 농민군은 잘 훈련된 일본군과 그들의 최신 병기의 화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천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채 끝내 패하고 말았다. 9일의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투는 이후 11일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미 전면적 전투가 아니었다. 수만에 이르는 농민군은 일본군 200여명 관군 2,500여명 등 2,700여명에 불과한 진압군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런 수적 우세에도 참혹하게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지적이 있으나, 공주전투에서 패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은 전투 수행능력과 화력의 차이였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었고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가 2,000m에 이르는 미제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다 소총 등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말 그대로 농민이었고 대부분 칼과 활, 죽창을 지녔다. 일부가 지닌 재래식 화승총은 사거리가 100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차이로 농민군은 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에게 접근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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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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