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고인돌이란 무엇일까? 고인돌은 지석묘의 우리말

모양에 따라 배바우, 거북바우, 두꺼비바우
  • 고인돌이란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을 묻는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선사시대 무덤이 대부분입니다. 납작한 판석이나 괴석형 덩이돌 밑에 돌을 고여 지상에 드러나 있는, 즉 고여 있는 돌이란 뜻인 지석묘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 민간에서는 고인돌을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다고 하여 독배기, 바우배기, 독바우로, 받침돌이 고이고 있는 기반식 고인돌의 경우 괸바우,암닭바우로, 덮개돌의 형상을 따라 배바우, 거북바우, 두꺼비바우, 개구리바우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 또한 민간신앙과 연관시켜 고인돌의 배치상에서 칠성바우, 옛날 장군이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장군바우 등으로도 부르기도 합니다. 마을 이름도 고인돌과 관련하여 주암(舟岩)(배바위),구암(龜岩)(귀암, 거북바위), 칠암(七岩)(칠성바위), 지석(支石)(괸돌, 고인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02 왜 돌로 만들었을까? 돌에 담긴 불멸성과 견고함 숭배

변하지 않은 돌에 염원 표현, 영속성 기원하는 암각화 돌검
  • 바위나 돌은 우리에게 견고함과 불멸성으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변 자연환경에 의존하면서 살아간 선사시대 사람들에게는 주변의 환경과 기후 변화에 의해 그들의 생사가 좌우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주변 환경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고 오래도록 잔존하고 있는 거목 (巨木)이나 거석 (巨石)에 대한 승배는 자연 발생적이 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바위를 이용한 고인돌은 죽은 사람의 혼령의 상징적인 안식처로서,죽은 사람의 혼령이 끼칠지도 모를 위해(危害)로부터 살아있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생각도 가졌을 것입니다. 이는 고인돌의 부장품으로 간돌검이나 돌화살촉 등 무기들이 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지켜주는 것으로 볼 수가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승에서 누리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 신분과 지위를 보장해 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03 누가 만들었을까? 공동체 사회의 의례행위

집단들의 협동과 결속력을 다지는 공동체작업
  •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거대한 바위를 채석, 운반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수 톤에서 수십 톤에 이르는 거석을 채석해서 운반하는데,
  • 오랜 시간에 걸친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농경을 배경으로 하는 사회여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고인돌은 벼농사(稻作)를 위시한 농경과 일정한 영역권이 형성된 정착생활, 혈연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집단의 의례 행위로서 축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인돌을 축조하던 사회에서 여러 집단들의 협동과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일정한 지역 내에서 농업공동체 같은 공동체사회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 고대사회에서 보이는 두레와 같은 협동 조직이 형성된 공동체 사회를 배경으로 한 혈연집단간의 거족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자기 조상의 무덤 뿐만아니라 집단의 기념물인 고인돌이 건립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행위는 공동체사회의 힘의 결집과 협동 단결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04 고인돌은 어떻게 생겼을까? 독자적 문화, 다양한 모양

01. 탁자식 고인돌(卓子式 支石墓)
  • 책상처럼 생긴 납작한 덮개돌
    • 넓은 판석으로 축조한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형식으로,판석 4매 혹은 6매 이내로 짜맞춘 무덤방 위에 납작한 덮개돌이 올려진 것입니다. 마치 책상처럼 생겨서 탁자식이라고 합니다. 주로 한강 이북에서 중국 요령지방에 집중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북방식(北方式)으로 불리워진 것입니다. 탁자식 중 대형은 주로 제단이나 기념물로 축조된 것입니다.
    • 탁자식 중 길이가 8m 이상이고 폭이 5m 이상, 높이 2m 이상인 초대형급의 고인돌은 요동반도와 한국 대동강유역에서만 나타나고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 씩만 있는 것이 특징 입니다. 이에 비해 남쪽의 탁자식 고인돌은 대개 3~4m크기의 덮개돌과 그 밑의 무덤방 높이도 1m 이내로 고인돌의 규모가 작고 무덤방 폭도 좁게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탁자식 고인돌의 남방 한계선은 경남 거창과 전남 영암, 강진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반식 고인돌(基盤式 支石墓)
  • 바둑판 모양의 커다란 덮개돌
    • 주위에 받침돌을 4개에서 8개 정도 놓고 위에 커다란 덮개돌로 덮어 마치 바둑판처럼 생긴 형태입니다. 외형상 지표면에서 들려져 있어 웅장하게 보이는 기반식 고인돌은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대형들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는 형태들로 뚜렷한 무덤방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는 형식으로 남방식(南方式 支石墓)고인돌 이라고도 합니다.
    • 규모가 큰 기반식 고인돌은 산기슭이나 구릉상, 계곡 끝 평지에 1기씩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나,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는 가운데에 있거나 어느 정도 떨어진 독립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이런 고인돌의 덮개돌은 대개 길이 3~6m, 두께 2~4m 정도의 달걀처럼 생긴 둥그스런 형태와 각 면들이 반듯하게 잘려진 직육면체 형태의 외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석식 고인돌(蓋石式 支石墓)
  • 무덤방 위에 바로 덮은 뚜껑
    •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은 형식을 말합니다. 받침돌이 없이 바로 무덤방을 덮은 것에서 개석식을 무지석식(無支石式), 뚜껑식, 대석개묘 등으로도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형식에서는 거의 돌로 만든 무덤방이 확인되고 있어 원래 무덤의 기능으로 축조된 것입니다.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큐슈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어 고인돌 형태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무덤으로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덮개돌의 형태에 있어서도 판석형,직육면체인 장방형,볼록렌즈 형태의 장타원형 등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북쪽지역에서는 덮개돌 두께가 얇으나 남쪽지역에서는 대체로 두터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도 대부분 이 형태에서 출토된 것들입니다.
위석식 고인돌(圍石式 支石墓)
  • 덮개돌 주위를 따라 노출된 무덤방
    • 제주식이라고 부르는 위석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데,수매의 판석이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 세워진 형태입니다. 지상에 드러난 판석들의 수가 6매 이상으로 덮개돌의 평면 형태와 유사하게 무덤방 형태를 하고 있어 대개 타원형이나 방형에 가까운 무덤방 형태가 특징적입니다. 이는 장방형이 기본 형태인 다른 지상 무덤방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제주 용담동 6호 고인돌로 판석 11매가 덮개돌을 따라 타원형상으로 돌려져 있는 형태입니다. 이 유형은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만 보이는 형태이며 중국 절강성지역에서도 유사한 무덤방 구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05 고인돌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지역·문화에 따라 상이한 구조

1. 덮개돌
  • 무덤방 위에 올려진 거대한 돌
    • 고인돌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무덤방 위에 올려진 거대한 돌입니다. 이는 지상에 드러나 있거나 받침돌에 의해 들려져 있으며 개석(蓋石), 탱석(撑石), 상석(上石)이라고도 합니다.
2. 받침돌
  • 덮개돌을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는 역할
    • 덮개돌을 받치거나 고이고 있어 지석 또는 굄돌이라고도 합니다. 탁자식 고인돌에서는 넓은 판석에 의해 덮개돌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무덤방을 이룬 판석 자체를 말하고, 기반식 고인돌에서는 기둥모양이나 둥글거나 각진 돌로 고이고 있는 돌을 말합니다. 덮개돌을 직접 받치고 있으면서 하부구조인 무덤방의 파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면서 덮개돌을 더욱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3. 묘역시설
  • 무덤방 주위에 깔려진 돌
    • 덮개돌 아래 무덤방 주위에 돌을 깔거나 쌓아 구획한 것을 말합니다. 무덤방 주위를 보강해 주고, 덮개돌의 무게를 무덤방에 직접 받지 않게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 것과 넓은 묘역이나 묘역 가장 자리를 구획하여 묘역 표시 기능을 한 것이 있습니다. 이는 깬돌이나 강돌을 쌓아서 만든 것과 납작한 판석이나 자연석을 한 겹 깔아 놓은 것이 있습니다. 앞의 것은 돌무지, 적석(積石)이라 하며, 뒤의 것은 깐돌, 포석(鋪石), 부석(敷石)이라고 부릅니다. 무덤방 주위에 돌을 여려 겹으로 단을 쌓은 것을 석축형이라 하고 매장 주체부를 구를 파서 구획한 것은 주구형이라 합니다.
4. 뚜껑돌
  • 무덤방을 덮고 있는 돌
    • 무덤방을 덮고 있는 돌로, 주검을 보호하면서 덮개돌의 무게로부터 무덤방의 파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뚜껑돌은 판석 1매인 것과 수 매의 판석으로 덮은 것이 있으며, 보통 한 겸이지만 여러 겹으로 포개어 쌓는 경우도 있습니다.
5. 무덤방
  • 주검(시신)이 묻히는 곳
    • 고인돌의 하부구조로서 돌로 만들어진 무덤방입니다. 돌을 세우거나 쌓아 축조한 무덤방의 총칭으로 대부분 평면이 장방형으로 수혈식입니다. 돌널(石棺),돌덧널(石樹),돌돌림(圍石) 등으로 구분합니다.

06 어떤 유물이 출토될까?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부장용 유물

죽은 사람의 성별, 신분, 머리방향 추정 가능
  • 무덤방 안에 넣은 부장용 유물은 무기류, 공헌토기류, 장신구류 등이 있습니다. 부장용은 유물의 형태가 완전한 것이 대부분이며, 죽은 사람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유물로 죽은 사람이 소유했거나 그를 위해 따로 만들어진 것들을 주검과 함께 무덤방에 넣어준 유물들입니다. 이를 통해 죽은사람의 성별, 신분, 머리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무기류(석기)
  • 가장 많은 것은 무기류인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대표적입니다. 간돌검은 보통 1점씩 부장시키고 있으나, 돌화살촉은 여러 점씩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돌검은 요령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북한에서 극히 일부 출토되며, 한강 이남지역에서 부장품으로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인돌에서 발견된 돌화살촉은 부장품인 경우 간돌검과 같이 나오며, 보통 10점 이내로 배나 허리부근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하지만 전남 보성 덕치리에서는 간돌검, 청동촉과 함께 29점이, 경남 거창 대야리에서는 간돌검과 함께 28점과 42점이 각각 한 무덤방 안에 부장된 예도 있습니다.
무기류(청동기)
  • 당시에 희귀하고 특수계층만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이 많으나 비파형청동창, 청동도끼와 청동촉, 한국식동검도 있습니다. 비파형동검은 옛 악기인 비파모양에서 붙여진 명칭인데, 중국 요령지역에서 집중 출토되어 출토된 지역이름을 따서 요령식동검으로도 불립니다. 고인돌에서 주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은 금강유역도 있지만 대부분 한반도 남해안지역, 특히 여수반도에서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세형동검은 경기 양평 상자포리와 전남 영암장천리 고인돌에서 출토된 바 있습니다.
공헌토기
  • 공헌토기는 붉은간토기와 가지문토기가 있습니다. 붉은간토기는 고운 점토를 이용해 빚은 후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하여 구운 토기를 말합니다. 붉은 색을 띠고 있어 홍도, 적색마연토기, 단도마연토기라고도 합니다. 형태는 목이 달린 둥근 바닥을 한 단지 모양으로 남한강유역과 금강, 낙동강, 보성강, 남해안지역 등 남한지역 고인돌에서만 출토되며 주로 남해안지역에서 많이 나옵니다. 가지문토기도 붉은간토기와 형태는 같지만 회백색을 띠고 있고, 어깨부근에 흑색 가지문이 있는 것으로 남해안지역 고인돌에서 주로 출토됩니다.
장신구
  • 장신구류는 천하석제 곱은옥, 환옥, 소옥과 벽옥제 대롱옥이 있습니다. 곱은옥은 푸른바탕에 흰 반점이 있는 천하석제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한쪽 머리부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 것입니다. 전남 여수 평여동에서는 한 무덤방안에서 환옥은 쌍으로, 소옥은 수 점 또는 수십 점이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목걸이와 옷에 장식했던 장식품으로 보이며 마한에 대한 기록 중 ‘마한인은 금, 은보다 옥을 더 귀히 여기고, 이를 귀나 목에 걸거나 옷에 장식하기도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미 고인돌사회에서도 옥을 장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06 어떤 유물이 출토될까? 무덤방 주위나 묘역의 의례용 유물

죽음에 따른 제사향연과 관련
  • 의례용 유물은 무덤방 주위나 묘역시설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의미의 장송용(葬送用)이나 죽음에 따른 제사 향연과 관련된 제의용(祭儀用), 고인돌 축조에 따른 생활용 유물들이 있습니다. 장송용 유물은 무덤방 주위에 간돌검을 여러 조각으로 깨서 포개 놓은 경우나, 무덤방 옆이나 뚜껑돌 사이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제의용은 제의를 지낸 후 일부러 깨서 주위에 뿌린 석기나 토기편이 있고, 생활용은 고인돌 축조시에 사용했던 유물로 숫돌이나 공구용 석기들이 있습니다.
  • 이러한 의례용 유물들은 대부분 파손된 것들로 깨진 파편입니다. 그리고 형태상 완전하지만 일부러 깨서 넣어준 것도 있습니다. 이 파손품은 죽음과 관련된 파의식의 소산물로 보기도 합니다.

07 왜 유물을 넣었을까?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와 존경

  • 유물을 왜 죽은이의 곁에 부장하였을까? 무덤이라는 것이 죽음과 관련되어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와 존경 등의 표시로 나타난 결과물로 당시의 내세관이나 현세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 무기류는 현세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기능과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능을 가집니다. 한편으로는 권위의 상징물과 사회적 지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여수 오림동 고인돌 덮개돌에 간돌검을 새겨 놓고 이를 향해 기원하는 인물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 고인돌의 부장품으로 간돌검 이외에 붉은간토기가 있습니다. 이 토기는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여 영원한 생명력을 갖도록 한 종교적인 의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죽음 후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당시의 내세관에서 보면 죽은 사람에게 피를 공급해 주는 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인돌의 무덤방에 안치된 주검의 위나 아래에 황토흙을 뿌린 경우가 있고, 붉은 돌을 무덤방 옆에 놓아두기도 합니다. 붉은색은 내세에서 재생과 부활을 바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08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도의 기술, 많은 시간과 인원 필요

  •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한 덮개돌입니다. 고인돌 축조 과정에서 탁자식 고인돌은 지상의 받침돌위에 덮개돌을 올리는데, 기반식 고인돌은 거대한 덮개돌을 고인돌 축조 장소로 옮기는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많은 시간과 인원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고인돌 세울 장소 마련하기
  • 일정한 장소를 택하여 땅을 다듬어야 합니다. 이 자리선정은 주변의 다른 집단의 양해와 동의하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덮개돌 구하기
  •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덮개돌은 산 인근에서 자연적으로 분리된 석재를 다듬어서 사용하거나 암벽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작업으로 구해야 합니다. 이때는 암벽의 절리를 이용하거나 알맞은 크기의 구멍을 내어 쐐기나 지렛대를 이용해 분리하여야 합니다. 이 작업에는 석공과 같은 전문인이 필요하게 됩니다.
덮개돌 운반하기
  • 덮개돌을 옮기는 데는 크기와 형태에 따라 여러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구해진 덮개돌을 산에서 굴리기도 하겠지만 무덤까지 옮기는데는 운반로를 개설하여야 합니다. 덮개돌을 쉽게 움직이기 위해서 밑에 통나무 레일을 깔고 그 위에 가로질러 통나무를 올린 다음 밧줄로 묶은 덮개돌을 올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끌어 옮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또 Y자 형태의 나무썰매나 추운 지역에서는 얼음 위나 빙판을 이용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무게가 가벼운 덮개돌은 목도식이, 가까운 거리에는 지렛대식이나 목도식이, 먼거리는 끌기식이 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덤방 만들기
  • 먼저 묘광(무덤움)을 파고 그 안에 주검을 안치하는 무덤방을 만들었는데 주로 판돌이나 깬돌을 이용해 네모꼴로 세우거나 쌓아 만들었습니다. 무덤방을 만들 때 간돌검이나 붉은 간토기를 징송용으로 넣어주기도 하며, 주검 곁에는 무기류나 장신구류, 공헌토기를 부장하기도 합니다.
받침돌과 묘역 설치하기
  • 무덤방이 만들어지면 주위에 받침돌을 세우고 납작한 돌을 깔아 묘역을 구획합니다. 그 다음 덮개돌을 끌어올리기 쉽도록 흙으로 경사지게 쌓아 올립니다.
덮개돌 올리기
  • 고인돌 축조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으로 받침돌 위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정확하게 올리는데 고도의 토목 건축학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운반되어 온 덮개돌은 경사지게 쌓은 흙 위로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하였다고 추정됩니다.
제사지내기
  • 고인돌 축조가 완성되면 마지막으로 죽은사람을 위한 제사, 또는 동원된 사람을 위한 향연 같은 행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묘역 주위에 깨어진 토기나 석기편들이 발견된 것은 그러한 흔적들입니다. 이와 같은 고인돌 축조는 동일한 혈연집단 뿐만아니라 이웃 혈연의 인력까지 동원해야 가능한 공동체집단의 의례행위의 일환이었습니다. 하나의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무덤방을 만든 사람, 운반로를 만드는 사람, 덮개돌을 끄는 사람, 지휘하는 사람, 음식물을 제공하는 사람 등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공동체사회였습니다.

09 축조 규모는 어떠했을까? 적게는 50명에서 많게는 200~300명 정도

  • 고인돌 덮개돌을 옮길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는가 하는 것은 실험고고학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강암의 무게는 1㎥가 2.3~2.8톤으로 2.5톤 내외입니다. 하지만 고인돌의 크기와 실제 무게는 석질과 형태에 따라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 고인돌을 옮길 당시 실제 무게는 대개 1.8~2.0톤으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1톤의 돌을 1마일(1.6km)옮기는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 200명이 필요하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 전북 고창에서의 실험은 9.8톤을 85명이 동원되어 4시간 동안 70m를 끌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실험은 한 사람이 120~160kg을 끌 수 있으며, 이 외에 동원된 사람을 포함하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고인돌의 운반과 축조에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는데 적게는 50여명에서 많게는 200~300명 정도입니다.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사람은 한 가족에서 1~2명이라고 할 때, 5인 가족으로 보면 많게는 1,000명에서 1,500명의 인구수를 가진 집단이어야 가능합니다.
  • 이 사람들의 동원은 당시의 고인돌사회에서 하나의 거족적인 행사였을 것입니다.

10 무덤 기능만 있었을까? 무덤과 제단 묘표석으로 사용

  • 청동기시대의 묘제 중 돌널무덤, 움무덤, 독널무덤은 무덤의 기능만 가지고 있으나 고인돌은 무덤 이외의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인돌의 기능 문제에 있어 고인돌에 나타난 덮개돌 형태와 하부구조, 입지와 군집내에서의 위치로 보아 다음 세가지 기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고인돌은 무덤으로 사용된 것이다.
  • 고인돌이 무덤이란 것은 19세기 말부터 제기되었으나 이후 충북 제천 황석리 13호에서 완전한 사람뼈가 발견되어 보고되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인돌 무덤방의 규모가 무덤으로서 형태와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무덤방의 길이와 폭이 다양하여 펴묻기, 굽혀묻기, 두벌묻기, 화장이라는 장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근거로는 첫째, 고인돌이 한곳에 떼를 지어 분포하고 있다는 점, 둘째, 무덤의 가장 직접적인 자료인 사람뼈가 발견된다는 점, 셋째, 무덤 축조 과정에 묻은 껴묻거리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둘째, 고인돌은 제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 고인돌을 축조하던 사회에서 여러 집단들의 협동과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어떤 상징적인 기념물이 필요 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거대한 덮개돌을 가진 고인돌은 일정한 지역 내에서 거족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때 많은 사람의 동원을 필요로 하며 협동과 단결력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지연으로 결속된 여러 집단들의 공공집회 또는 타 집단과의 경계를 표시하는 건조물로서 제단의 의미를 가진 고인돌이 건립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셋째, 묘표석으로 사용된 것이다.
  • 묘표석은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또는 묘역 조성 집단의 권위와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 그리고 단순히 묘역임을 표시하는 것 등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들은 고인돌군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제단고인돌과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군집의 중앙이나 한쪽에 치우쳐 위치한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앞보다 작은 규모이거나 소형으로 그 자체는 무덤방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됩니다.

11 지배자들만 고인돌에 묻혔을까? 특정한 계급만의 무덤으로 보기 어렵다

  •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신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묻힌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고인돌이 지역에 따라 형태나 밀집도가 다르고, 무덤방의 군집성이나 형태에 있어 다양한 면을 보이기 때문에 여러 주장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인돌에 묻힌 주인공은 고인돌이 오랜 시기동안 축조되어 왔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묻힌 사람의 신분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강력한 지배자가 빨리 출현한 곳도 있고, 늦게 출현한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 한편 고인돌의 군집에 따른 무덤방의 구조나 배치상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만의 무덤으로 상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신분은 족장(族長)과 같은 지배자의 무덤이라는 설, 지배자와 그 가족의 무덤이라는 설, 혈연 공동체 집단의 공동무덤이라는 설,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의 무덤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12 고인돌에서 발견된 뼈의 의미는 무엇일까? 장례풍습, 신앙형태 등 추정 가능

  •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경우 몇몇 유적에서 사람뼈가 출토되고 있어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 우리나라 토양은 산성을 띠고 있는 곳이 많기 때문에 유기물질인 사람뼈가 부식되어 흔적조차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고인돌에서 사람뼈가 출토된 예는 충북 제천 황석리, 강원 춘천 중도, 대구 달성 진천동, 경남 진주 대평리 등 몇 예가 알려져 있지만, 중국 길림지역과 북한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뼈가 출토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뼈 출토로 보아 고인돌 축조 당시 묻기방법, 머리방향, 껴묻거리가 놓인 위치를 통해 장례풍습을 살필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그 당시의 사상, 신앙적인 측면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고인돌에서 발견된 사람뼈로 보아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 묻은 것이 보통이나 탁자식의 경우 한쪽면의 개폐가 용이한 문돌이 설치되어 있어 여러 구의 시신을 함께 묻는 복장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해도 오덕리 고인돌의 예처럼 무덤방 내부에 3~4개의 칸막이된 공간에 사람뼈가 흩어져 있는 특수한 예도 있습니다.
  • 사람뼈가 완전하게 남아있는 충북 제천 황석리의 두 무덤방에서 각각 1구씩의 사람뼈가 출토되었습니다. 이 사람뼈는 바로펴묻기한 상태로 성인남자로 판명되었고, 키는 174cm와 145~150cm로 추정되었습니다. 이곳에는 간돌검 또는 곱은옥과 대롱옥이 부장되어 있었으며, 나이는 대개 20~30세 초반이라고 합니다. 이 무덤방에서 울토된 곱은옥은 머리쪽에서 쌍으로 출토되고 있어 귀걸이를 장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키가 174cm인 사람뼈를 복원하였을 때 짱구머리를 하고 있으며, 코가 크고 광대뼈가 나온 형상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단두형인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장두형으로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13 고인돌은 언제 축조되었을까? 기원전 5천년 경 부터 유럽에서 축조 시작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
  • 고인돌은 언제부터 축조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궁금증입니다. 고인돌은 유럽에서 절대연대 측정을 기준으로 하여 대개 기원전 5,000~4,500년 경에 처음 시작하였다고 보고, 그 시기는 신석기시대에 해당됩니다. 신석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농경의 시작과 관련하여 이와 함께 거석문화가 인근 서유럽지역으로 파급 확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프랑스 서안에 있는 브리타니지역을 중심지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 아시아지역의 고인돌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인도가 기원전 10세기 전후, 일본이 기원전 4~5세기 경, 중국 기원전 11~12세기, 북한이 기원전 12세기 경에서 최근 기원전 40세기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의 거석문화는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신석기 시대부터 축조되었다고 하나, 지역에 따라 그 형태나 시기가 각각 달리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12세기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4 한국의 고인돌은 언제 출현했을까? 기원전 12세기 무렵으로 추정

고인돌은 1,000년 동안 만들어진 선사시대 산물
  •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의 연대와 형식간의 선후관계를 통해 추정하거나, 자연과학적인 연대측정 자료를 응용해 시기를 파악하는 추세입니다. 절대연대 자료에서 본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기원전 12~9세기라는 공통된 측정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원전 12세기경에는 고인돌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최근 북한에서는 종전의 기원전 12세기 설에서 단군릉 발견 이후 고인돌을 단군조선과 관련지어 절대연대에 의해 기원전 40세기 후반기까지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 연대는 전자상자성공명법(ESR), 열형광법(TL), 핵분열흔적법(FT)등을 이용한 절대연대 자료를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 소멸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유물의 출토로 기원전 3~2세기설이 대체로 수용되고 있는 편입니다.
  • 따라서 우리나라 고인돌은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1,000년 동안 만들어진 청동기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 고인돌은 왜 사라졌을까? 새로운 지배계층 등장과 선진문화 수용으로

사회 변화 따른 인력 동원 등 어려움
  • 고인돌은 왜 소멸되었을까? 고인돌의 소멸은 당시 사회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고인돌 후기의 사회는 지배계층의 등장과 외부로부터 선진문화의 수용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지배계층인 수장층의 등장은 기존의 각 지역을 배경으로 한 지배집단간의 이합집산에 의해 급격한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합니다. 농경지 확보를 위한 전쟁에서 얻어진 소산물로 사람들의 신분이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집단안의 사람들간에 지배와 피지배층으로 다양한 계층이 분화되면서 권력의 중앙 집중화가 진행되고, 한편으로는 합법적으로 정복 전쟁이 수행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의 고인돌보다는 봉분이 있는 나무널무덤이 등장하게 됩니다.
  • 이 무덤에서는 다량의 청동기가 부장되어 있으며 청동제 무기로 소속 집단을 강제적으로 제압하거나 의기류로 집단의 모든 의식 행위를 집행하는 것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즉 정치와 제사를 관장하는 제정일치 사회의 최고의 지배자임을 과시한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고인돌과는 다른 무덤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 다음은 선진문화의 수용입니다. 선진문화는 철기문화입니다. 고인돌이 축조되는 시기의 청동기는 무기류가 주를 이루고 있고, 과장되거나 커져서 의기화되는 반면에 철기는 무기보다는 농경도구 등 실생활 용구들을 많이 제작하게 됩니다. 이 철제 농경도구는 석기로 하던 작업량 보다는 3~4배가량의 능률을 올리 수 있는 도구입니다. 이 농경도구를 이용한 농경지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에서 고인돌 축조는 낭비이고 소모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인력은 생산활동에 투입되었고, 무덤의 양식도 많은 인원이 필요없는 나무널무덤이나 움무덤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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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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