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면 부곡리]절터뿐인 성산사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02.26
- 조회수 : 1991
고수면 부곡리에 성산사의 옛 터가 쓸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절터의 뒷마을 이름이 증산인데 승려들이 붐벼서 증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아주 오랜 옛날 증산 마을에 봉씨 한 사람이 높은 벼슬을 지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성산사의 승려들이 문안을 올리지 않는다고 봉씨는 승려들을 데려다가 핍박을 주고 매질을 하였다.
결국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하나둘씩 절을 버리고 멀리 떠났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높은 벼슬을 했다는 봉씨는 조선시대의 세도가로써 당시 숭유척불 사상으로 승려들을 괴롭힌 것으로 추측된다.
절터 주변의 들판을 성산이라고 하며 절터에 있는 연못을 성산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사찰 이름이 성산사로 생각되며 이 절은 이름 높은 사찰이어서 고승들의 수도 처였다고 한다.
옛부터 고승들이 있는 곳에는 돌로 만든 말을 세워 절의 입구를 밝힌다고 하는데,
약 40여년 전 일본 사람이 이 석마를 가져가고 말고삐를 매는 돌로 만든 말뚝만 남아 있다.
이 절터에는 상반신이 없는 석불이 있는데 상반신은 증산 마을에서 학독을 만들었으며 이 학독을 만든 이는 눈이 멀었다고 한다.
이 절을 처음세운 분은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고구려 장수왕의 오해를 사서 남으로 피신해 왔다고 전하는데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이 고승을 안내하여 이 성산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터만 남은 이곳은 우리 전통적인 불교 유적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도 많은 기왓조각이 나오고 있다.
이 기와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상반신이 없는 석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절터의 뒷마을 이름이 증산인데 승려들이 붐벼서 증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아주 오랜 옛날 증산 마을에 봉씨 한 사람이 높은 벼슬을 지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성산사의 승려들이 문안을 올리지 않는다고 봉씨는 승려들을 데려다가 핍박을 주고 매질을 하였다.
결국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하나둘씩 절을 버리고 멀리 떠났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높은 벼슬을 했다는 봉씨는 조선시대의 세도가로써 당시 숭유척불 사상으로 승려들을 괴롭힌 것으로 추측된다.
절터 주변의 들판을 성산이라고 하며 절터에 있는 연못을 성산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사찰 이름이 성산사로 생각되며 이 절은 이름 높은 사찰이어서 고승들의 수도 처였다고 한다.
옛부터 고승들이 있는 곳에는 돌로 만든 말을 세워 절의 입구를 밝힌다고 하는데,
약 40여년 전 일본 사람이 이 석마를 가져가고 말고삐를 매는 돌로 만든 말뚝만 남아 있다.
이 절터에는 상반신이 없는 석불이 있는데 상반신은 증산 마을에서 학독을 만들었으며 이 학독을 만든 이는 눈이 멀었다고 한다.
이 절을 처음세운 분은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고구려 장수왕의 오해를 사서 남으로 피신해 왔다고 전하는데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이 고승을 안내하여 이 성산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터만 남은 이곳은 우리 전통적인 불교 유적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도 많은 기왓조각이 나오고 있다.
이 기와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상반신이 없는 석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